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롬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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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롬8:31-39)
몇 년 전, 우리 방송에서도 소개되었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아버지 딕 호잇과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아 팔다리는 물론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 릭 호잇입니다.
아들 릭은 목에 탯줄이 감겨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된 채로 태어나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라는 장애를 갖게 됩니다.
태어난 지 8개월이 되자 의사는 아들이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며 아이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년의 시간이 흘러 아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의사를 소통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한 말이 ‘달리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과 함께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부자는 처음으로 8킬로미터 자선달리기 대회에 나갑니다.
아버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누워 아들은 끝에서 두 번째로 완주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오늘 난생 처음으로 내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후 1981년에 부자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10km가 넘는 지점에서 포기했지만 다음 해에는 마침내 완주하게 됩니다.
마라톤을 시작한지 4년이 지나자 아들은 ‘철인 3종 경기에 나가고 싶다.’는 꿈을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미친 짓이라며 이들 부자를 말렸지만 아버지는 허리에 아들이 탄 고무배를 묶고 3.9km 거리를 수영하고,
아들을 태운 자전거로 180.2km의 용암지대를 질주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고 42.195km를 달려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합니다.
아들은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 철인의 칭호를 부여받고 아버지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나눕니다.
그 후로도 이들 부자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라톤 64번 완주, 단축 3종 경기 206번, 1982년부터 2005년까지 보스턴 마라톤 대회 24회 연속완주라는 기록을 세웁니다.
또한 달리기와 자전거로 6천km에 이르는 미국대륙을 횡단하기도 합니다.
도전이 끝난 뒤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고 대답합니다.
아버지의 이 모든 수고와 도전은 오직 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없었다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아버지는 단 하나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온갖 수고와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영성신학자에게 ‘영성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말해달라고 하자 신학자는 간단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안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가장 훌륭한 영성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믿고 있습니까?
이 믿음이 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집에 돌아올 때 아들은 이미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 속을 있는 대로 썩혀드린 탕아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형마저도 동생을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삼켜버린 아들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동네사람들이 보는 시각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야단쳐서 내 쫒아야 할 아들이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들입니다.
아들 하나 없는 셈치고 냉정하게 대하고 문도 열어주지 말아야 할 아들입니다.
설령 받아들여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남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조용히, 조용히 받아들여야 할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늘 기다렸던 아들이기에 아버지는 먼발치에서 단번에 그를 알아봅니다.
먼저 달려 나와 아들을 극진한 사랑으로 맞아줍니다.
부끄럽게 맞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아들을 맞아줍니다.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동네사람들이 이렇게 수군거리지 않았겠습니까?
‘무슨 잘 한 것이 있다고, 무슨 좋은 일이라고 잔치를 다 베푸는가?’
‘저 어른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체면이 없는 분이구나.’
사람들이 다 아들을 욕하고 가장 못된 놈으로, 가장 저주받을 놈으로 생각했을 때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가장 떳떳한 모습으로 가장 귀한 모습으로 아들을 환영하고 받아들입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단지 성경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떳떳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 줄 압니다.
모두가 탕자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은 따뜻하게 적극적으로 받아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평판을 들었고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던지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며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다시 한 번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먼저는,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1절에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위하신다는 말을 다른 성경에서는 우리 편이 되신다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다른 사람편이 아니라 내 편이시고 나를 위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가 부족하거나 잘못했을 때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시고 나를 떠나계시는 분같이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족하고 연약할 때도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우리가 대적과 싸울 때도,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대적이 나를 정죄할 때, 나를 고발할 때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우리 편이 되시어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우리를 변호해주시고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 내 편이 되신다고 할 때 여러분,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능히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2절 말씀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까지 우리를 위하여 내 주신 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다는 말은 아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들처럼, 아들보다 더 사랑하시는 우리가 된다고 할 때 아까워서 우리에게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들까지 주신 마당에 우리에게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필요한 것을 다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인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 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주었습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천만에! 다만 한 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위험을 무릎 쓰면서까지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결코 잊지 말고 살아 다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구해 주실만한 귀중한 사람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가치 있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3절에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죄가 없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치열하게 논쟁을 벌입니다.
검사는 이 사람에게는 이런 죄가 있으니 이런 벌을 주어서 사회정의를 바로 잡아야한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반대로 변호사는 이 사람은 이런 잘한 일이 있고 반성도 하고 있고 피해자와 합의도 했으니 선처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이 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판사가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면 검사나 변호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합니다.
판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죄가 없는 것이고 죄가 있다고 하면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재판하시는 판사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시면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죄 있다 하시면 그 사람은 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셨으므로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고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고발할 수 없을뿐더러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롭다 하시고 누구든지 우리를 고발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삯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34절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은 한마디로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 증거입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냈을 뿐 아니라 그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셨으니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삯에서 벗어나 의로운 자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35절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얼마나 자주 쉽게 끊어집니까?
아무리 백년가약을 맺고 한 몸이 되었다고 해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부부의 연이 곧 끊어집니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약점이 있다고 사랑이 끊어집니다.
삶의 방식이 틀리다고 끊어지기도 하고 시댁이 어떻게 친정이 어떻다고 끊어지기도 합니다.
다른 더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이제 우리의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끊어지기 쉬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번 맺어진 하나님과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랑을 여러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보릿고개로 허덕이던 1960년대 초 어느 날. 한 목사가 점심을 먹으려는데 걸인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목사는 함께 밥을 먹자며 그를 밥상 앞에 안치고 식사 기도를 하려는데, 거지가 대뜸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기도는 무슨 기도냐."
성질 급한 목사는 홧김에 거지를 쫓아냈는데 그날 밤, 기도를 하던 중에 또렷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거지가 얼마나 나를 욕하고 저주하는지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단다.
나는 그 소리를 50년 넘게 들었다. 그래도 나는 매일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 밥 한 끼 주지 않고 그를 내쫓느냐.
내가 그를 위해 십자가를 졌고,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줄 모르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맡겨준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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