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은 대로 서로 용서하라 (엡4:25-32)
본문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은 대로 서로 용서하라(에베소서 4장 25–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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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주에 이어지는 주기도문 설교를 이어가겠습니다.
9월 달력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주기도문 내용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오늘 본문 32절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용서는 해방되는 자유의 선언이며 용서로 돌아온다. 용서는 성숙한 인격이며 사랑은 용서하는 능력이다」 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죽음의 희생과 부활의 능력으로 인해 죄와 사망 가운데서 영원히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진리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는 그냥 단순한 용서가 아닙니다. 단 한번으로 완전한 용서, 영원한 용서가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모든 죄를 완벽하게 용서 받았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다시는 용서함 받지 못하는 상황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별로 재미없고, 오히려 지긋지긋하고, 속상하고, 짜증나고 분노하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고 하여도, 우리에게는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능력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이렇게 선포하여 주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 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했으니 너도 나와 같이 용서하는 자로 살아가거라” 아멘.
00교회 모든 성도 마음 안에는, 용서 받았다는 넘치는 확신과 그로 인한 풍성한 감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알아볼 주기도문의 내용과, 에베소서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 내면에 그 어느 누구라도 다 용서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 용서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은혜가 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매우 단호하고도 강도가 높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라고 묻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이 곧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인데, 만약에 일곱 번 용서 해줄 수 있다면, 그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용서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 용서해 주는 것은 인내의 한계이고, 도저히 참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선을 그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일곱 번의 일곱 번, 곧 490번까지 용서의 횟수를 늘리셨습니다. 491번째는 용서 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용서라는 것은 숫자나, 횟수에 제한이 없는 것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490번 용서의 상황을 비유로 한 번 더 설명해 주셨는데, 일만 달란트 빛진자와 백 데나리온 빛진자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으로부터 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빛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 동료가 빌려간 백 데나리온은 탕감해 주지 않으면서, 동료의 목을 잡아 흔들고, 참아달라는 하소연도 무시하고, 그 동료를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만 달란트 빛을 탕감해 주는 것을 철회하고, 그를 옥에 가두고, 빛 진 것을 다 갚게 합니다. 주인은 그 만 달란트 빛진자에게 노하여 말하기를 “악한 종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라고 하였습니다. 비유를 다 말씀 하시고 예수님은 질문자인 베드로와 그 제자들이 들으라는 듯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만 달란트 빛진자가 누구입니까? 죄인들, 바로 우리들입니다. 도저히 탕감 받을 수 없는 빛을 지은 우리들은,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사랑의 마음)에 기인하여 모든 죄를 탕감 받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백 데나리온 빛진자들(이웃)을 못살게 굽니다. 서로 동료로, 형제로 어울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서로에게 빛진 것을 조금도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눈곱 만금도 없습니다. 빛진자를 더 억압하고, 분노를 퍼붓고, 저주하고, 너도 당해봐라 내치고 몰아냅니다. 딱, 악한 종의 모습이 우리의 면면에서 다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서 이것 보다 더 부담스러운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골 2:13) 아멘.
도무지, 끝까지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남을 용서하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 남을 용서하기는커녕 남의 잘못을 드러내고, 공격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러한 악한 모습들을 다 기억하셨다가, 용서하지 않는 악한 그 모습 그대로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말씀대로라면, 용서가 용서를 낳고, 저주가 저주를 낳습니다. 긍휼을 베풀면 긍휼함을 받고, 판단 정죄를 일삼는 자에게는 똑 같이 판단 정죄가 내려집니다. 너무나 단순하지만 너무나 무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무섭고 두려운 용서의 말씀을 들었으니, 이제 용서와 긍휼을 우리 자신에게 한 번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서,
① 만 달란트 빛진 자처럼 우리는 죄와 사망과 심판에 대해 일체 탕감을 받았습니다.
단 한 번(십자가의 은혜)에 탕감이 다 되었습니다.
② 일흔 번에 일흔 번 이라도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일흔 번에 일흔 번이 훨씬 넘는 수많은 용서를
이미 받았습니다. 지금도 계속 받고 있습니다. ③ 민망하고 말조차 꺼내기 힘든 더럽고 추악한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음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또 용서하시고, 또 기회를 주십니다.
아마 죽기 전까지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받은 탕감, 내가 받은 용서, 내가 받은 긍휼을, 과연 내가 용서해야 할 대상에게 얼마만큼 적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였나,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것도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용서의 기억이 없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데 무슨 용서를 하나, 나는 용서할 사람이 아니라 사과 받고 용서 받아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에게 상처와 고난을 받게 한 가해자가 끝까지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저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는데 내가 미쳤다고 용서를 하나, 저자가 내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경에 뭐라고 했든지, 예수님이 모두를 다 용서 하셨든지, 성경은 성경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죽어도 저자를 용서할 수도 없고, 평생토록 저주하면서 살아가겠다. 분노의 올가미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세 가지를 이유로 든 것은, 지금 현재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저나,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 가득 담겨져 있는 여리고 연약한 모습이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다만, 내가 피해자가 아니고 오히려 가해자 일 수 있다는 사실, 내가 용서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당사자라는 사실, 내가 성경 말씀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적인 행동도 다 무시하고 오히려 여전이 남 탓으로만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하여 냉정하게 살피고,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옭아매는 자승자박의 곤고함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세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 밭이 없습니다. 그만큼 이기적이고, 자기편의 주의적인 생각에 단단히 묶여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그만큼 우리 마음이 무너져 있고, 틀어지고 왜곡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쁜 마음 밭을 갈아 없어서(起耕,기경해서) 좋은 밭 만들고,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교정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내 의지, 내 결단으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그 위대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내 안에 예수님(하나님, 성령님)을 가득 채우기 전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용서하려는 마음이 전혀 발동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는 정말 귀한 기도문을 남겨 주셨습니다. 저는 이 기도문이 세 가지로 분해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둘째, 내가 남을 용서할 수 있도록 제 안에 충만하게 임하시고 용서의 능력을 날마다 강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셋째. 주님처럼 남을 무조건 적으로, 마음껏 용서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가서, 내가 남을 용서하며 자유롭고 평안가운데 살다 왔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끝까지 도와주실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용서 받았음에 감사하고, 용서 할 수 있는 결단의 능력 주심에 감사하고, 용서하며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도록 믿음을 구하는 것,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준 용서의 기도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단순한 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라, 설교 준비하며 감동 주신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위에는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이라는 주제가 쓰여져 있습니다. 용서의 구절이 가장 마지막에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곧 우리 신앙생활의 정점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 된 것을 말하고(25절), 분을 품고 죄를 짓지 말고(26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27절), 도둑질하지 말고(28절), 더러운 말이 아닌 덕으로 선을 세우는 말을 하고(30절),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비방과 악의를 버리는(31절), 이러한 하나님을 본받는 믿음생활을 열심히 해 나가다 보면 32절 같은 절정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잘못과, 가해 행위와, 사과하지 않는 무례함들이 보인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되어, 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상대할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용서함 받은 것 같이, 그 사람을 조건 없이, 미련 없이, 다 용서 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마음이 곧 믿음의 주인 되시는, 용서의 주인공이신 우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다 여기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반드시 우리 모두를 용서의 사람이 되기까지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절정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남을 용서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은 예수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난 절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면, 우리도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다면, 자유와 평안과 소망과 믿음을 충만하게 공급해 주셔서, 우리 삶을 참으로 복되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을 용서해 주는 주체가 되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 주님께 매일같이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고, 이제는 내가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용서의 능력을 구하시고, 모든 사람을 조건 없이 다 용서할 수 있는 신앙의 절정에 다다르셔서, “주님!, 제가 주님이 말씀 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주님 앞에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예비 된 천국백성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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