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4:19)
본문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 갈4:19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요?
그리고 바울이 '해산의 수고를 한다'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 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룬다' 이 말을 다른 말로 옮기면
'너희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되기까지, 그리스도의 모양이 드러나기 까지'
이렇게 우리가 번역을 약간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저희 교회에서 아주 자주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는 예수님 닮은 사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 해오면서
'저 분은 참 예수님 닮았다' 우리가 그렇게 느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도전하는것은,
"교회로서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교회를 본 적이 있는가?"
제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물론 '그렇다' 하고 대답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거의 없습니다.
어떤 신앙 그룹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은 있어요.
그러나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교회를 내가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은 '없는 것 같아요.'
집단적으로 교회에 교인들이 모여 있는 그 가운데 '그리스도가 형성된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거짓 교사들과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이
갈라디아 교회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여러분, 율법주의의 가르침에 빠지게 되면, 교인들이 신앙생활 할 때 어떻게 되죠?
전부 자기 의를 추구하게 되요.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랑하려는 그런 마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 앞에 자기 의가 없는 것 때문에 한탄하던지,
자기를 어떻게 하든지 자기 공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몸부림을 치든지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이게 반드시 일어납니다. 이게 자유도 없고 속박입니다.
그런 교회는 굉장히 열심이 있지만, 열심이 있어보이지만 그게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닙니다.
굉장히 뜨겁고 열심있는 교회인데, 우리가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
굉장히 사랑이 없고 정죄 당하는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나 역시 열심이 없는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 드러나는 모습은 뭐죠?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고요, 자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교회성장주의를 내세우면서 열심히 영차 영차 하면서
교회가, 모든 교인이 일사불란하게 그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막 열심을 내는
어떤 교회가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변에 가끔 그런 일부 교회들이 있음을 봅니다.
그런 교회는 숫자가 자꾸 늘어가요. 그리고 그 교회 규모가 자꾸 커져갑니다.
근데 그 교회에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십니까?
거기서 보여지는 모습은 굉장히 육적인 모습이에요.
자랑하고 싶은 마음, 어떤 자기 공로에 집착하는 마음,
성취를 내세우고 싶어 하는 마음.. 그런 겁니다.
세상의 성공 논리가 그대로 통하고 있는 그러한 교회의 모습,
한 마디로 굉장히 세속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것과 반대되게 그리스도의 형상.. 이런 말은 무엇입니까?
참된 복음의 신앙 위에, 복음 진리위에 서서 복음으로 살아갈 때,
복음의 열매로써 드러나는 그 모습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온전히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는 모습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야 되요.
우리들의 인간적인 열심, 인간적인 열정, 인간적인 노력, 애씀,
물론 우리가 주님을 좇아 살고자 할 때, 애씀, 노력 이런 것들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애씀의 종류가 다르고, 노력의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하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신뢰하면서 주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그런 모습이 있는가요?
그렇게 살 때, 즉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하여 역사합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어요. 그야말로 그분들은 전부가 <그리스도의 형상>이었습니다.
빌립도 그리스도 같이 행했고, 베드로도 그리스도처럼 행했고,
뭐 니고데모도 그리스도처럼 행했고, 이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을 만나도
각각의 개성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데 공통점이 있는 거예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른데 뭔가 비슷해요.
그것은 다들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참된 복음을 믿고,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는 거죠.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 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주제
여러분 우리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자, 그리스도를 닮자" 하는 것은 수양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요즘 영성 훈련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가르침과 책들이 나와 있는데
여러분이 그런 책들을 읽을 때도, 복음의 관점에서 분별해야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또 다른, 가톨릭 적인 영성 비슷하게
또 다른 수행주의, 또 다른 수련주의, 또 다른 수도원 주의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있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개신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도 기도와, 고독과, 침묵.. 이런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독과 침묵, 이런 훈련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은혜의 수단'에 대해서 여러분께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
은혜의 수단은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교제하고.. 하는 이런 은혜의 수단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를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강화하는 수단입니다.
은혜의 수단은 바꾸어 얘기하면 믿음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더 바라보게 하고, 복음을 더 붙잡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때문에
복음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가 드러내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슨 노력해서, 수련해서, 결심해서 되는 게 아니고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갈 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뭐죠?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복음 안에 있어요.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렇게 시작했던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냐?' 갈3:2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그들 안에 복음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있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들이 맛보았어요.
그런 복을 지금 다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율법주의를 좇아감으로써!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룬다는 말은,
우리 안에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이고, 우리가 복음을 좇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치는 모습이 된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
물론 이 모든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항상 인간 도구를 쓰세요.
다시 말하면 복음사역자의 수고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누구입니까? 지금 바울은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죠.
▲'내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내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 갈4:19
여러분 복음 사역이라는 건요, 마치 생명을 낳는 그런 일이지요.
즉 해산의 수고입니다.
제가 남자이기 때문에 해산의 수고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묘사를 해봐야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자분들은 다 압니다.
아주 오래 전에 달라스에서 어느 목사님이 사경회를 인도하러 오셨는데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 분이 설교 준비를 위해서 늘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으셨습니다.
내일이 주일인데, 토요일 밤 늦게까지 설교 준비가 안 돼서 끙끙거리고 있었대요.
사모님이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애 낳기 만큼이나 어려울까요?'
그러자 그 목사님이 '애 낳는 정도라면 내가 이 자리에서 하나, 둘, 셋, 열을 낳겠다, 그렇게 힘들다'
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좀 과장이 들어갔겠죠.
그러나 설교를, 내가 전할 내용을 정리하는 그런 정도라면 뭐가 힘들겠습니까?
사실 지금 저도 목사가 된지 지금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매주 설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경험과 어떤 노하우는 다 있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이 설교를 통해서 정말 듣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달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건 보통 막중한 책임이 아니지요.
영적으로 게으르면, 그냥 설교 준비를 '무슨 말을 할까?' 만 이렇게 준비하고는
그냥 쉽게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생명을 전하는 그런 사역이라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일이겠죠.
'해산의 수고를 한다..' 바울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해산의 수고'라는 말은, 신학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종말에 주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종들이, 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일정한 고난을 당해야 된다.. 그런 개념이 있어요.
그래서 그 고난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려 하노라' 왜 그렇죠? 골1:24
지도자들이 먼저 앞장서서 그 고난을 당함으로써
이제 일반 교인들에게 돌아갈 고난의 몫을 줄이겠다.. 그런 의도로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그런 뜻도 아마 포함 될 거예요.
그러나 복음사역 이라는 것은,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깨닫는다'는 말은, 교리적 설명을 듣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교리적 설명이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교리적 설명을 들어서 머리로 이해를 해도, 그게 깨다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실제로 자기의 삶에서 체험하며 사는 사람이
그 복음의 생명을 전염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사람이 그 말씀을 나눌 때
그 사람 안에 역사하고 작용하는 복음의 생명력이
듣는 사람에게 전염되어서 옮겨지는 것, 그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물론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성령께서 복음사역자를 통해서 하시기 때문에
복음사역자는 그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에게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부터 그 이하를 보면
'우리는 예수 죽임 당한 것으 우리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할 때, 기꺼이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교회 안에, 사람들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바울은 해산의 수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 되겠구나'
왜요? 그들이 마치 지금 유산되고 있는 것 같아요.
복음을 듣고 잘 출발했는데, 지금 중간 시점에서 다시 바울이 해산의 수고를 해야 된다고 느낄만큼
지금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너희를 대하여 음성이 변하려 함은 내가 의심이 있다' 갈4:20
'과연 지금 내가 걱정하는 그대로가 아닌가? .. 내가 염려가 된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4:12~20절까지 살펴보았는데요.
한 가지만 <적용>하고 우리가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 어떻게 들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또는 여러분이 설교자들을 대할 때
어떤 목사님은 어떻다.. 이 목사님은 이렇다.. 저 목사님은 저렇다..
우리가 이렇게 나름대로 느낌을 가지고 있고, 평가하고 나름대로 가늠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하는 것이 바른 태도일까요?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이 한 말을 종합해보면
외모로 사람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학력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이 어떠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다
그 사람 외모가 잘생겼다
그 사람이 말을 잘 한다 .. 이런 것들은 다 아닙니다.
그런 걸 보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럼 뭘 봐야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가?' 그것만 봐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반문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걸 알기가 어렵다고!'
우리들 일반 교인의 입장에서는, 어느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지
그것이 바른 복음의 진리인지 우리가 어떻게 분별 하냐고?
그럴 때는 <그 설교자의 내면에서 역사하는 생명을 여러분이 보셔야 됩니다.>
말만 듣지 마세요. 말(설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말로써는 사람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어요.
유명한 설교자는 콩을 팥이라고 설명해도 듣는 사람들이 아멘 합니다. 참 이상하죠?
그 정도로 우리가 분별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말은 우리가 사람을 현혹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역사하는가?
정말 저 사람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가? 이것은 사실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설교를 들을 때, 누군가가 전하는 말을 들을 때,
말 뿐 아니라 사람을 봐야 됩니다.
▲설교에 대해서 3C가 있습니다. 제가 수시로 생각을 하고, 동료 목회자들에게도 나누곤 합니다.
설교의 세 요소는 무엇인가? 첫째를 컨텐트 (Content 내용) 입니다.
내용이 정말 성경에 충실해야 됩니다. 내용이 좋아야 돼요.
두 번째는 커뮤니케이션(전달 Communication)입니다. 전달을 잘 해야 돼요.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전달을 잘 못하면 효과적인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세 번째 C예요. 캐릭터(성품 Character)입니다. 그 사람 자체, 인격입니다.
헬무터 틸리케 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데 20년이 걸린다' 그런 말을 했어요.
무슨 말인지요? 설교를 준비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설교자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설교자가 정말 자기가 전하는 그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는,
그런 참된 신앙의 모습을 가지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는 말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는 설교자가 모든 설교의 법칙을 다 어겨도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면
자기는 그 설교를 듣겠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가상 중요한 건 인격 Character 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케릭터 에 대해서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설교를 바로 들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설교를 정말 영적으로 깨어서 분별하면서
바른 복음을 들어야 되고, 바른 복음을 전하는 바른 설교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면
바른 설교를 들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와 있죠.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19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설교와 말씀 사역은 사실상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그래서 저도 늘 좌절하고 늘 절망합니다.
누가 제게 그렇게 묻더라고요.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주장하는 대로의 교회입니까?'
'제가 늘 교회의 본질에 충실해야 된다.. 정말 바른 복음을 외쳐야 된다.. '
그런 말을 하거든요.
그런데 갈수록 그 톤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어요.
옛날에는 세게 말했는데..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우리도 뭐 비슷합니다. 우리도 잘 못합니다' 자꾸 그렇게 대답하게 되니깐
자꾸 주눅이 좀 들어요.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확신은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야 돼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되고 계신가?' 우리가 이 질문을 우리들 자신에게,
우리 교회를 향하여 정직하게 던지기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갈라디아서 4장 11절에서 20절을 우리가 함께 묵상하면서
참된 복음의 사역이 무어인지, 어떻게 우리가 복음 사역자를 대해야 할지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지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함께 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 모든 것을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고 맛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질그릇교회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어 가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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