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시19:12)

본문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시19:12


 


‘허물’이라고 할 때 일반적인 뜻은 실수를 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또 스스로 실수를 하여 자신이 피해를 본 것을 말한다. 신앙 사상적으로 볼 때는 자기는 잘한다고 했는데 나와 다른 사람의 구원에 손해를 보게 하는 것이 허물이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했는데 ‘살리셨도다.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것은 과거사적 용어다. 이것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살아나서 구원을 얻은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중생’ 또는 ‘거듭남’이라고도 하고, 신학적인 용어로는 ‘기본구원’이라고 한다.


 


이 기본구원을 얻었어도 그 당장에는 자신의 영이 중생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하는 것을 자신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른다. 왜 그런가 하니 눈에 보이거나 인식이 되지 않는 영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이 중생을 한 후에, 영이 살아난 후에 예수를 믿어가면서 서서히 깨달음이 오면서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것이 확실히 믿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예수는 나의 구주라’고 하는 것이 확실히 믿어지면서 어느 때인가 자신의 영이 중생이 되었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믿어지게 되는 거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 일반 보편적으로 교회에 계속 나오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고백도 한다면 이 사람은 영이 중생이 됐다고 보는 거다. 영이 중생이 된 사람은 주님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아무리 신앙 믿음이 없어도 천국입국은 된다.


 


영이 중생된 사람이 죄를 짓는 중에 갑자기 죽어서 그 죄에 대한 회개를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성경에 없는 주장이다. 이건 기독교 기본교리도 모르는 사람의 말일뿐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기본교리도 모르는 거짓된 교인들, 거짓된 목회자들이 많다.


 


그 다음에 ‘너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는 것도 있는데, 이건 ‘이룰구원’을 말하는 거다. 이 이룰구원을 다른 말로는 ‘성화구원’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룰구원이란 간단히 말하면 영이 중생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한다. 성경 전체가 이 말을 하고 있다.


 


딤후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여기서의 ‘온전’이란 하나님의 속성, 혹은 인격성,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성경은 한 마디로 예수 믿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한다.


 


네가 예수를 믿느냐?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이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성을 말한다. 안 믿는 사람들의 지혜와 지식성은 아무리 오래 가봐야 이 세상에서의 평가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영이 중생이 되지 못한 사람은 그 속의 지식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저주받고 타락된 기존지식이기 때문에 이들의 소원 목적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세상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유명하고 날고 긴다 할지라도, 아무리 도덕가 철학가라 할지라도, 도통을 했다고 할지라도 해 아래의 것을, 죄 아래의 것을 구하기 때문에 이 사람의 지식은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영이 중생이 되었으나 생명과요 진리요 생명수요 영생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안 믿는 사람들처럼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된 기존지식을 따라 사는 거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순전히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즉 하나님의 선, 사랑, 거룩, 진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즉 지식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옳은 지식, 지혜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옳은 지혜를 받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순전히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의의 사람이라. 의의 사람은 주권이 있다.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성경에 ‘너희들이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거든 하물며 교회 안에서랴’ 라고 하셨듯이 세상의 모든 도덕군자들을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정죄권이 있다.


 


계:에 보면 예수님 당신이 가지신 그 권을 일곱 교회에서 말하고 있다. 이게 대단한 권이다. 교권이라면 이게 진짜 교권이다. 교권은 진리권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속화된 교회에서 자기가 무슨 장이라도 되면 세상의 요소를 가지고 권을 행사하려고 한다. 이런 교권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즉 지혜지식성적, 도덕성적, 하나님의 의와 주권성을 갖게 되면 이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다. 오늘날 세속화된 교회에서 거짓 종들이 중국에서 배워왔는지 장풍을 쓰면서 사람을 이지 저리 넘어뜨리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신령천국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신령천국에서 중국의 소림사에서 배워온 장풍을 쓰겠느냐?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거짓이 되었으면 그런 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이 능력자라고 하며 행세를 하겠느냐?


 


우리는 영의 눈을 가지고 교회를 봐야 하다. 예수 믿는 사람이 육신의 눈을 가지고 교회를 보는 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육의 눈을 가지고 교회를 보는 기준과 똑같은 거다. 네가 목사냐, 집사냐, 장로냐? 그 눈을 가지고 교회를 본다면 네 지식이 안 바꾸어졌구나. 하나의 세상 종교적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기독교를 볼 수 있느냐? 못 본다. 그 기준을 가지고 바리새교인들을 볼 수 있느냐? 그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을 볼 수 있느냐? 못 본다.


 


자기는 잘한다고 했는데 신앙 사상적으로 볼 때 자타의 이룰구원 면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면에 손해를 본 것, 예수학교는 열심히 다녔는데, 매 주일마다 예배는 드렸는데 말씀 깨달음으로 구원이 된 것이 없는 것,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아진 그 성품 그 인격 그 이치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서 써먹고 정복하며 나가야 되겠는데, 나의 언행심사로 통해서 예수가 건너가고 진리가 건너가고 상대가 예수님께로 밀착이 되어 들어가야 되겠는데 그게 없다면 나는 안 믿는 사람들의 정신으로 살았다는 말이 되는 거다.


 


왼쪽 편에 있는 자들이 ‘예수이름으로 전도하고, 병자도 고치고, 선지자 노릇도 하고, 구제도 하고 다 했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난 너를 모르겠다’ 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내가 언제 너보고 그런 거 하라고 했느냐?’ 이런 뜻이다. 그러니까 일은 열심히 했는데 주님의 성품이 입어진 게 없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처럼 닮아지는 것이다. 소원이 닮고, 목적이 닮고, 예수님의 취미성으로 닮고, 예수님의 간구성으로 닮고, 예수님의 추구성으로 닮고, 이러면 예수가 나에게 들어온 것과 같은 거다. 예수님의 소원은 택자의 구원을 이루는 거다. 그러면 ‘너의 소원은 뭐냐?’ 할 때 기독자가 뭐라고 해야 하겠느냐? 오늘날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뭐라고 하겠느냐? ‘주님의 이름으로 일을 크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라고 할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보고 언제 그렇게 가르치더냐? 내가 능력이 없어서 건물 짓고, 집 짓고, 활동하는 걸 가르치더냐?’ 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만능의 능력자다. 만능의 능력자가 일꾼이 없어서 너를 불러서 일을 시키더냐 그 말이다.


 


주님께서 나를 부른 것은,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는 것은 ‘너는 나를 닮아라’ 그 말이다. 주님께서 방편적으로 이것저것을 시키는 것은 나를 깨닫게 하려는 거다. 그런데 일을 시키면 툴툴거리는 사람이 있느냐? 이건 안 된다.


 


오늘날 세속화된 교회에서 성경을 보는 이치가 다 틀렸다. 말세에 거짓 종들이 많다고 했다. 거짓 종들이 있는 곳에는 거짓 교회도 있는 거다. 거짓 교회라고 해서 그 교인들이 다 지옥에 간다고 보면 안 된다. 좋게 말해서 천국은 들어가는데 하는 짓이 마귀 짓을 하는구나. 내 자식인데 깡패 짓을 한다고 해서 아버지의 호적에서 제외가 되느냐? 안 된다. 그러나 실컷 두들겨 맞고, 감옥에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고, 자기 일생이 자연사가 되지 않고 완전히 고통 중에 일생이 다 낭비가 된다. 건설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일반적으로 망한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쫓아 살다가 이런 식으로 된다면 영의 눈으로 볼 때 이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갈 면이 전부 망한 거다. 이러면서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너는 폐인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해도 주님의 온전한 성품을 하나도 닮지 못한 것은 폐인이다. 이처럼 자기의 이룰구원에 손해를 보는 것이 자기의 허물이다.


 


오늘날 기독자가 세속화된 교회의 사명자들에게서 배웠다면 이룰구원의 깨달음을 다 놓친 거다. 그런 곳에서 재산을 다 바쳐가면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할지라도 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은 없다. 예수를 전할 때 물질성으로 관계성이 먼저 되어놓으면 진리본질로 들어가기가 참 어렵다. 예수님 당신은 만능의 능력자이지만 물질성으로 인간 대 인간의 연관을 짓지 않았다. 교훈을 먼저 줬다.


 


사람을 고치는 일, 속사람을 바꾸는 일, 세상성적으로 질이 그렇게 되어있는 것을 완전히 하나님의 성품화로 질적으로 바꿔놓는 것이 기독교다. 이게 복음이다. 이게 영의 일이다. 이게 진리운동이다. 이게 천국복음 운동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그런가? ‘예수 믿어 축복받고, 잘 살고, 만사형통되고’ 이런 걸 가르친다.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거냐? 예수를 안 믿으면서 부자로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된 거냐? 그러니 이치에 어그러진 거다. 이치에 어그러져 있는 것은 거짓말이다.


 


과녁을 향해서 활을 당겼는데 그 활이 표적을 넘어갔거나 빗나가는 일이 있는데, 이건 활을 안 쏜 게 아니라 쏘기는 쐈는데 점수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다. 이룰구원은 나의 이성과 몸이 진리와 성령의 영감에 피동이 될 때 되어 들어가는 거다. 이게 화살이 과녁을 정확히 맞힌 것과 같은 거다. 이걸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령님과 유기적 연합이라고 한다. 이게 아니면 사람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를 않는다.


 


사람이 바꾸어지는 것은 행동을 강조해서 되는 게 아니다. 먼저 지식적으로 바꿔놓으면 그 지식에 따라서 이성도 몸도 움직여 들어가는 거다. 따라서 지식이 안 바꿔져 놓으면 예수를 바로 못 믿는다. 이런 상태로는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어도 사단 마귀나 거짓 종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지옥은 못 간다.


 


자기 혼자서 마음만으로 죄를 지은 것은 자기만의 구원에 손해다. 그 다음에 활동으로 죄를 지을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손해가 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마음만으로 죄를 지은 것은 자기에게 허물로 생각지를 않더라. 그리고 그것이 행동화로 나타나도 별로 죄의식을 갖지 않더라.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민감하게 더 나아가 한 차원 올라가서 죄를 봐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이 자기 속에 시커먼 마음을 품을 수 있다. 그러면서 일반적 도덕성의 차원에서 자기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받기도 한다. 이런 정도의 차원은 기독교인들도 스스로 안다. 그리고 성경 구절적으로도 ‘마음으로 지은 죄는 이미 범죄한 것’이라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죄를 지으면 ‘회개합니다’ 하고 회개를 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도덕적인 개념의 죄를 짓거나 했을 때 그렇게 하는 거다. 그 한 예로 십계명을 말하면서 일반사회의 윤리 도덕성적인 개념으로 십계명을 보는 거다. 그러나 이건 성경적이 아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의 영이 잘 되라고, 영인성장이 잘 되라고, 영의 사람이 잘 되라고 준 거다. 육의 사람이 잘 되라고 준 게 아니다. 영의 사람이 잘 되기 위해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이것도 써봐라. 저것도 써봐라’ 하고 세상의 뭘 동원시키든지 해서 우리의 신앙 믿음을 크게 하시기도 한다.


 


세상은 교회를 위해 만든 것이다. 창:에 성도들의 신앙 믿음을 위해서 세상을 만들어 놓고 ‘한 번 다스려봐라. 통치해 봐라’ 하셨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의지로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세상성으로 소원 목적이 돼버렸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를 믿게 한 것은 이제는 하늘로 향해서 살라는 거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과 예수를 믿으면서도 속화된 채로 믿는 사람은 그 마음이 세상을 목적을 해서 나가는 마음이고, 진리본질을 따라 바로 믿는 사람은 천국을 목적해서 마음이 나가는 거다. 질이 다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볼 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보다는 국가에서 허가를 받은 이방 종교인들을 더 높이 본다. 종교인이라고 하면 그래도 양심적으로 사니까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높이 본다. 그러면 이런 이방 종교인들의 소원 목적성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을 향해 있느냐, 세상을 향해 있느냐? 세상이다.


 


십계명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고 하는데, 유교도 삼강오륜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도를 만들어 놓고 자기가 지키고, 또 다른 사람도 지키라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과 쓰는 글자도 같고 소리도 같지만 지식이 나오는 출처가 다르다.


 


공자의 부모 공경성은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공경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법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거다. 이건 질이 다른 거다. 하나는 땅의 것이고, 하나는 하늘의 것이다. 하늘의 지식으로 부모를 공경하면 간단히 말해서 그 부모가 하늘로 들리움을 받는다. 땅의 교훈으로 부모를 공경해봐야 그건 땅의 차원밖에 안 된다. 질이 다르다.


 


안 믿는 사람들이 서로 좋아해서 ‘우리 영원히 같이 살자’ 라고 할 때 이 ‘영원’의 개념이 어떤 거냐? 이 ‘영원’이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의 개념이냐? 아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개념이 현재적으로 물질적으로 행복하고 단꿈을 꾸는 이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 갔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설령 죽은 이후에까지 그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라서 하는 말일지라도 이건 물질성의 개념이요 생각이기 때문에 사람이 바꾸어진 하나님 앞에서의 천국에까지 가는 ‘영원’이 아니다. 질이 다른 거다.


 


사람의 마음이 세상으로 향방을 잡고 가는 마음이 있고, 천국으로 향방을 잡고 가는 마음이 있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은 천국을 향해 가는 마음은 전혀 없는 거고,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가고 있다면 이걸 자기의 허물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행동 죄를 안 지었다고 해서 이런 면에 대해 자기의 허물로 느끼지를 못한다면 이 사람은 예수 바로 믿기가 참 힘들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의 마음이 천국이 아닌, 하나님이 아닌 땅으로 향해져 있다면 수치스런 일인데 오늘날 속화된 교회가 여기에 대해 자기의 허물이 되는지, 허물이 안 되는지에 대해 별로 느끼지를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며 하나님께 그것을 달라고 부르짖고 금식기도를 하고 있다면 이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수치스런 일이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세상의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다’ 라고 성경구절로도 명백히 되어있는데 오늘날 교회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이 남의 교회를 까는 소리냐? 남의 교회를 까는 소리로 들리느냐? 자기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하나님의 진리이치, 하나님의 생명이치, 신적인 도덕이치에 안 맞으면 맞춰야지 ‘왜 까느냐’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러는 자신이나 다른 교회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바로 나가고 있다는 거냐?


 


예수 믿는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예수님의 소원 목적을 땅의 소원 목적으로 하락을 시켜놓느냐? 누가? 자기가. 그래놓고도 예수님을 높인다고 하느냐? 그런다고 해서 높아지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자기부터 속성적으로 주님을 닮아 가면 된다. 이러면 자기도 올라간다.


 


인간에게 제일 가치가 있는 것이 돈이나 물질이나 부귀나 명예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고상함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영광스럽다고 하신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물질 사상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이 사람이 가는 곳곳마다 ‘뭘 달라. 돈 달라. 차 달라’ 할 것이니 이게 얼마나 저질적이냐? 불에 타지는 것, 시간이 지나면 변질될 것을 자꾸 달라고 해서 그게 얻어지면 축복이냐? 하나님께서, 성경이 말씀하는 축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것은 이 땅이냐, 신령천국이냐? 신령천국이다. 성경을 봐라. 당신의 백성들을 천국에 데려다 놓고 그 다음에는 땅을 전부 불에 살라버린다. 왜 살라버리느냐? 빌딩들이 얼마나 높고 보기가 좋으냐?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서울 한복판에 세계적으로 큰 건물을 지었다면 이게 하나님께 영광일 텐데 왜 그걸 다 불에 태워버리느냐? 그걸 불에 태워버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게 없어지는데 왜 불에 태워버리느냐?


 


‘네가 믿음으로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어디 한 번 불에 태워보자’ 해서 ‘불탈 구원’이 있고 ‘부끄러운 구원’이 있는 거다. 네가 예수 믿으면서 뭘 많이 준비했느냐? 불 탈 것으로 준비를 해놓고 ‘나는 믿음이 있노라’ 한다면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보자’ 하고 불에 태울 때 불에 다 타버린다면 영광될 게 뭐가 있느냐? 이게 바로 불탈 구원, 부끄러운 구원이다. ‘너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지도 않고 부자라고 했구나(라오디게아 교회). 네가 눈이 멀었구나. 벗었구나.’


 


우리는 영인성장 면에서, 영적인 차원에서 벗은 자기를 알아야 한다. 이게 자기의 허물이요 수치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예수 믿는 자기가 거짓된 종들을 만나고 이단자들을 만나서 성경을 가지고 말씨름을 할 때 자기가 성경을 한 이치도 몰라서 실력적으로 이길 수가 없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치는 분명한 거다. 뭐가 진리이치냐? 도덕성이나 지혜지식성이나 능력성이나 하는 것이 영원 궁극적인 세계에까지 효력성이 있는 것을 가르치거나 그걸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거다. 이 사람은 모든 이해타산 평가성이 죽음의 저 너머에 결과와 목적으로 들어있다. 이게 예수 믿는 거고, 이게 신앙 믿음이고, 옳은 거다.


 


그런데 예수님 당신의 사람 되어먹지 못한 세계적으로 엘리트 종교지도자들의 두목자들이 하늘나라를 전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죽였다. 오늘날은 어떤가? 옳은 진리이치로 말을 하면 이건 성령의 영감의 감화가 이치를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는 건데 많은 기독자들이 이걸 발로 밟아서 눌러버리고 있다. 이건 성령 훼방 죄다. 너는 사함 받지 못한다. 사함 받지 못한다는 의미는 지옥에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면에서 너에게 이루어질 이룰구원은 없다는 거다. 이 이룰구원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 성장하라’고 했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숨은 허물은 자기 자신도 모른다. 숨어있는데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면 ‘숨은 허물’이라는 게 허물이 있기는 있는데 자신이 생각이 안 나서 숨은 허물이라 그 말인지, 그래서 그것이 앞으로 자기의 허물이 될 수 있는 그 면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적으로 허물의 상태로 있는데도 그 면을 모른다는 말인지? 어느 것이냐? 현재적으로 자기가 허물상태로 있는데도 그 면을 모르고 있는 것이 숨어있는 허물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현재 자기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것으로 얼마나 채워졌느냐?’ 하는 이것을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것에 대한 욕심이 날 텐데 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자기가 하나님의 것을 가지지 못한 것이 자기 자신의 허물인 줄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면 도덕성이 높은 사람은 자기의 명예적인 면의 허물에 대해 민감해서 자기가 직접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도 양심상 인격적 수치와 부끄러움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간혹 볼 수가 있다. 정치인들 중에도 자기 측근의 문제 때문에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하며 내려앉는 일이 있다. 이건 선악과 따먹은 차원이지만 일반적 도덕성적인 차원에서 양심이 바로 선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많으면 살만한 세상이 된다. 그런데 죄를 지어놓고도 물증이 없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딱 잡아떼면 심증으로는 죄를 지은 걸 빤히 알 수 있음에도 그냥 풀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신앙 사상적인 면에서 계시사상을 모체로 하고 마음이 돌아가는 무형의 향방에 대해 인식하면서 그 다음에 일반적인 지식으로 범죄를 잡는다든지 한다면 그 수준이 굉장히 고단수인 거다. 기독교회에서 정말 성경적으로 사람들의 영의 눈을 밝혀주고, 도덕성적인 차원, 지식적인 차원에서 빗나가 있고 마음의 향방이 빗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면, 또 기독교 안에서 다 그렇게 산다면 정말 살만한 세상이 된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에는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 성경을 이루느라고 그러는 건지 사방에 십자가가 엄청나게 많이 붙어있지만, ‘우리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라고 하지만 그런 교인과 교회를 보기가 드물다.


 


애국자라면 누가 애국자냐? 소원 목적은 세상으로 되어있으면서 태극기를 들고 나가서 만세를 부르면 그게 애국자냐?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인격적 차원으로 높이 올리는 그런 교회가, 그런 종들이 애국자가 아니냐? 사람을 못 쓰게 인도하면서 애국자라고 하는 건 애국자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제시대 때에 애국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논밭을 다 팔았다. 이게 일반적으로 정말 애국자다. 그런데 지금은 애국자라고 하면서도 이런 사람이 있느냐? 오히려 길거리에서 노점을 하고 시장터에서 새우젓 장사를 해서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할머니가 있는데 이게 정말 애국자다. 온 나라 사람이 이걸 본받아야 한다.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어야 하는데 자신이 그렇지 못함을 인식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허물이구나’ 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참 고차원적인 사람이다. 성도의 마음은 자유하는 마음이다. 이 자유는 인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유를 말함이 아니다. 이건 참 자유가 나이다.


 


현재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는 자유한다고 하며 사느냐, 구속을 받으며 산다고 하느냐? 자유하며 산다고 한다고 한다. ‘내 마음대로 산다. 간섭하지 말아라. 내 자유로 산다’ 라고 한다. 그런데 영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통해서 보니 죄 아래 살고 있다. 죄 아래 살고 있는데 그게 자유냐?


 


자기가 진짜 자유인이라면 ‘예수 믿읍시다’ 하면 ‘예, 믿겠습니다’ 해야지 왜 좋은 소리를 듣고도 예수를 못 믿느냐? 이건 자기 마음을 가지고도 자기 자유대로 자기 마음을 못 쓰는 거다. 진리대로 하는 것이 자기의 참 자유다. 사람은 이 자유를 해야 하는데 성도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옳은 것에, 진리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는 마음은 자기의 숨은 허물이다.


 


자기가 믿음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싶으냐? 성경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했으니 예수 믿는 사람은 진리로 자유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진리로 자유가 아니다. 사망권 아래, 죄권 아래는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선은 없다. 왜냐?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은 상태의 선행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안 믿는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모두가 사망권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사망권 안에 놓여있는 상태에서 자기가 아무리 선행을 한다고 해도 이건 질적인 면에서 사망권 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 죽은 상태에서의 일반적인 모든 선행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거듭난 것이라야 한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신앙 질적 성분적 성격적인 면에서 선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진실이라든지 이런 것들의 개념을 몰라서 기독교 우두머리들이,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자들이 이방인들과 손을 잡고 같이 일을 하고 있다. 이게 될 말이냐? 구약성경에 보면 이런 자들을 어떻게 했느냐? 전부는 저주다. 이방신들 중에 하나님과 동등적인 신이 있느냐?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하나님과 같은 동등권의 이방종교가 있느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개념으로 풀면 성경해석이 되는 거냐? 안 된다. 그런데 거짓된 종들의 세계에서 성경을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니 이방종교도 기독교와 같은 것으로 알고 하나님과 돌부처를 같이 앉혀놓는 거다. 이게 될 일이냐? 예수님께서 모세오경을 가지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도다. 외식자들아’ 라고 선언을 하셨고, 이들은 그 예언대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사라졌는데 오늘날 교회가 어찌된 건지 바리새인들보다 더 밑이다. 완전히 땅이다.


 


예수님이 세계 4대 성인 중에 하나냐? 신인 결합 일위로 도성인신 하셨고, 33년 동안 하나님 앞에 죄와 허물이 없이 사셨고, 우리의 죄 짐을 짊어지고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이렇게 한 이방신이 있느냐? 하늘로부터 온 이방신이 있느냐?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 안에서 질적인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 줄을 모르니 이런 자들이 기독교를 이방종교와 같은 차원으로 만들어 놓는 거다.


 


인간은 자신의 허물을 알게 되면 수치를 느끼는 존재다. 우리는 진리로 자유해야 할 존재인데 자기의 허물로 인해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쳐다보며 ‘아, 이것이 나의 허물이로구나’ 하면서 자유가 없는 그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 본 적이 있느냐?


 


눅:18에 보면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있는데, 이 과부의 기도가 참 고차원적이다. 이 과부가 무엇을 자기의 원수로 여기느냐?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가 이때까지 믿어왔는데도 자기 속에 하나님의 것은 없고 세상 것이 가득 들어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며 자기 속에 하나님의 것이 있어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기도가 이 과부의 기도다. 하나님의 것이 없음을 한탄하며 자기 속에 하나님이 것이 없는 것을 원수처럼 여기는 것이 이 과부의 기도다. 그 원수를 살아생전에 갚고 가겠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자들은 어떤가?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거짓 종들에게 속아 넘어갔고,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 넘어갔고, 물질적으로 손해가 나버렸고, 시간적으로 손해가 나버렸고, 경제적으로 손해가 나버렸고, 젊음이 손해가 나버렸고, 전부가 손해가 나버린 것을 자기가 좋아서 하 것이니 어디에 가서 보상을 받을 거냐?


 


우리가 남에게 속아 넘어가면 참 분이 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남에게 속은 것은 임시성적이다. 세상에 속한 거다. 그러나 거짓 종에게 속으면 이건 영원히 가는 거다. 속은 그것이 영원히 간다. 그래서 성경은 이룰구원에 대해 강력하게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우리는 예수 믿는 정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은 하나의 일반 종교인과 같은 레벨선상에서 믿는 게 아니다.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사사건건이 시대적 바람, 종교적 유행적인 바람을 모두 이용 응용 활용을 해서 나도,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영능의 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으로 닮지 못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지옥 맛을 톡톡히 보고 간다. 일반적으로도 자식이 부모의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맞는 게 아니냐? 그런데 교리적으로 잘못 알면 예수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네가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하는 것은 공갈협박인 줄 알아라. 우리는 공갈협박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