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그리고 또 사라 (계3:14-22)
본문
사라 그리고 또 사라/요한계시록 3:14-22
섬기는 삶의 축복이라는 글입니다. 하늘에서 천사가 찾아와 같이 가자고 했는데 60세가 되신 분은 “지금 안 계신다고 하세요.” 70세가 되신 분은 “지금은 아직 이르다고 하세요.” 77세가 되신 분은 “지금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하세요.” 80세가 되신 분은 “아직 쓸 모가 남아 있다고 하세요.” 88세가 되신 분은 “쌀을 좀 더 먹고 간다고 하세요.” 90세가 된 분은 “서두르지 말라고 하세요.” 99세가 되신 분은 “알아서 때가 되면 스스로 간다고 하세요.”라고 각각 말하더랍니다. 이 글은 고품격 도심형 실버타운인 종암동에 있는 노블레스 타워 대리석 벽에 있는 내용인데 제가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세상에는 아직 사랑하고 돕고 섬길 사람과 대상이 남아있으니 그들을 돕고 사랑하고 더 섬기다 가겠다고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지내온 일생을 회고하면서 보편적으로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베풀지 못한 것, 참지 못한 것,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 매일매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풍부한 물질적 부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고 영적 교만에 빠져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주님은 이 교회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일곱 교회중 유일하게 책망만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중심지였고 모직 공업과 유명한 의학교가 있는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에바브라에 의해 시작된 라오디게아 교회(골4:12-13)는 사도 바울의 지극한 관심 속에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에 입각한 정상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본문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한마디의 긍정적인 평가도 받지 못한 가장 퇴보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15절에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도다”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16절에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해 있던 영적 미지근함은 교회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쁜 상태입니다. 신앙의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사고 또 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으로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금을 사라
본문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금은 믿음을 뜻합니다(벧전1:7). 불의 연단은 시련을 표시합니다. 라오디게아에는 금이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에 연단된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사야만 합니다. 시험과 핍박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연단되는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이런 수많은 시련을 이긴 자가 신령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금을 많이 가진 자가 물질적인 부자이지만 시련을 이긴 성도가 영적인 부자입니다. 시련을 통한 믿음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해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금과 같은 돈과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에 경제적인 부자가 곧 믿음의 부자라고 착각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부자라”는 말은 부유함과 거만함을 생각나게 합니다. 물질적 부자와 영적인 부자가 꼭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부자가 영적인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여도 영적으로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들은 물질적인 부유함을 영적인 부유함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A. D. 60년에 그들은 대지진을 겪었으나 재건을 돕겠다는 로마의 제의를 거절하고 자력으로 재건할 정도로 부유하였고 당당했습니다. 또한 이 도시에 금융자산이 대단했음을 지케로(Cicero)가 거액의 신용장을 이곳에서 현금으로 바꾼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꿈을 가질 때만 청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꿈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히 열심히 해도 잘되지 않을 수 있고 치밀하게 짠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경영에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경영 능력과 상관없는 문제가 돌발적으로 일어나면 손쓸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 오해를 일으키고 변칙적인 일이 일어나 관계를 망칩니다. 내 마음 하나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데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자니 얼마나 변수가 많겠습니까? 세상은 앞으로 더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지고 예측하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이때 믿음이 왜 중요합니까? 믿음은 일어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선(善)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일이 파편적이고 서로 관계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어떤 것도 우연한 것이 없고 가치 없는 것이 없습니다. 어제까지 나를 괴롭히던 일이 오늘은 내 삶을 축복으로 연결하는 고리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그분 말씀만 믿고 순종함으로 광야를 잘 통과하면 반드시 가나안이 열립니다. 99%가 안 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누구나 금이 많은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는 정반대의 영적 궁핍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가난하여 예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불로 연단한 금과 같은 믿음의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금은 있으나 믿음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믿음은 있으나 물질적인 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물질적인 금도 풍부하고 영적인 믿음의 금도 풍부한 번동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흰 옷을 사라
본문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흰 옷은 의의 옷입니다. 사죄를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직물의 명산지였으나 의의 옷은 그리스도에게서 사야 합니다. 의의 옷은 사람이나 라오디게아에서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감과 세제를 사용해도 의의 흰 옷은 될 수 없습니다. 의의 흰 옷의 공급처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의 의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의 의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의 의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의 옷을 입은 자가 원죄의 사람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됩니다. 라오디게아는 양털로 만든 의류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의류 생산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 도시의 사정과 정반대가 됩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서 기르던 양에서 얻은 털로 만든 검정 모직을 즐겨 입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의의 흰 옷’을 입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에 영적을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제아무리 화려한 최고의 옷을 걸치고 있다하더라도 예수님의 눈앞에서는 그 사람의 인격과 행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즉 그들은 도덕적이고 영적 부패로 인하여 자신들의 위선되고 더러운 모습이 완전히 노출된 것입니다. 좋고 비싼 옷으로 벌거벗은 것을 결코 가리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영적 추태를 가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진 흰 옷을 사서 입어야 합니다.
‘자녀를 자녀로만’이라는 귀한 글을 소개합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가끔 자녀를 나의 투자의 대상으로 여기는 착각을, 나의 삶을 자녀에게서 보상받으려는 유혹을, ‘다 너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했던 이기심을, 그리하여 그들이 나에게 속해 있지만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소서. 나로 하여금 부모로서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자녀의 성장보다 내가 먼저 성숙해짐으로 그들을 훈계하게 하소서. 그들을 이끌어 주되 강요하거나 협박하지 않으며 그들을 돕되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실패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지 않게 해 주소서.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으며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과소평가하지 않고 그들의 하찮은 질문과 사소한 행동방식에도 진지하게 반응하며 매사에 그들을 존중함으로 존경받는 어른이 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유명한 사람으로가 아니라 ‘유능한 사람’으로 일류의 사람으로가 아니라 ‘유일한 사람’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나게 해 주소서. 이처럼 성숙한 어른들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정과 자녀를 크게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른들의 욕심과 위선의 검은 옷을 벗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입었던 더럽고 추한 옷과 미움과 싸움의 피 묻은 옷을 벗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읽고 회개했던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동안 입고 있었던 어둠과 육신의 옷을 벗고 빛과 예수 그리스도의 흰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는 아닌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얼룩진 검은 옷과 싸움으로 인한 피 묻은 옷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하신 의의 흰 옷을 입는 번동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안약을 사라
본문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성령의 전망력과 판단력입니다(골1:27, 2:3). 라오디게아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신령한 안약은 예수님께서만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역의 특산물인 안약을 사서 치유하라고 명령함으로 그들의 영적 시각 장애를 치유하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라고 명령하십니다. 라오디게아에는 치료의 신인 맨카루(Men Karou)의 신전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눈이 먼 상태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안약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눈 먼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육신의 밝은 눈을 가졌어도 영적으로 어두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적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영적 추함과 죄악과 빈곤한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롬1:21-23).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악된 현실을 바로 깨닫게 하시며 또한 죄로 어두워진 우리의 눈을 밝게 여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눈을 여시고 수치를 가리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시며 영성을 회복시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성도의 영적 침체와 마비된 삶을 건강하고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악과 세상의 정욕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주님의 안약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취재 기자가 91세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소원이 뭐예요?” “남들이 들으면 욕하겠지만 오래오래 사는 게 소원이에요.” “왜 그렇게 오래 살고 싶으세요?” “오래 살아야 내 딸을 돌보거든요.” “노환에 몸 가두기도 여의치 않은 그 할머니는 두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중증 장애를 가진 70세 딸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의 부축이나 보조 장비 없이는 걸음조차 떼기 어려운 이 딸과 평생 함께 했습니다. 화장실을 갈 때도 목욕을 할 때도 늘 함께였습니다. 이 할머니가 91세까지 사신 비결은 딸입니다. 그 버거운 삶이 할머니를 지켰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일평생 져야 할 버거운 짐으로만 느껴집니까? 누구든 말씀을 짐으로 여겨 피하려 한다면 위험에 노출됩니다. 말씀은 협상대상이 아닙니다. 쉽고 가벼운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선택하려 하면 위험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번지 점프 줄이 무겁다고 가느다란 줄로 교체해 달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줄이 거추장스럽다고 잘라 달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줄이 생명줄과 같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생명줄입니다. 불편할수록 안전해집니다. 무거운 짐일수록 신앙의 균형을 잡아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단단히 붙들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로 가야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려 애쓸 때 결국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킵니다. 말씀을 지키는 수고가 성도의 삶을 안전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영적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말씀이 있어야 영적 시력과 판단력이 회복됩니다. 시편 111편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계명을 지킬 때에 훌륭한 지각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안약입니다. 영적 지각과 판단력으로 세상과 죄를 이기고 사명을 잘 감당하는 번동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야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문 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고 주님과 교제하는 신령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금을 사고 의의 흰 옷을 사고 영적인 안약을 사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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