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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악이 아니라, 약이다 (요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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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악이 아니라, 약이다 (요한복음 9:1~3)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코로나전염병으로 전 세계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과 생명을 잃고, 경제적 손실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Pandemic, 세계적 재앙이라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코로나라는 악재가 선물해주는 몇 가지 플러스알파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이 불필요한 외부 활동을 줄이고, 집으로 일찍 귀가합니다.


둘째,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오붓하게 살아갑니다.


셋째, 부부가 서로 배려하고 보호해주며 살아갑니다.


넷째, 삶이 단순해지고, 경제적으로 절약하며 살아갑니다.


다섯째, 여러 종류의 질병을 예방하고 있습니다.(감기, 결막염, 수족구병 등)


여섯째,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은혜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일곱째, 아이들이 튼튼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못 가는 대신, 집에서 좋은 음식을 충분히 먹으며 영양을 보충합니다. 특히 저는 우리나라 아이들의 미래저력을 생각해볼 때 체력을 탄탄하게 보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머지않아 대학생이 되고, 해외유학을 가고, 군대에 가면 지구력이 짱짱할 것입니다.



여하튼 고난은 악이 아니라, 약입니다.


사실 인간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일반 종교의 해석은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모두 고난을 전생의 죄 값이나, 저주로 규정합니다. 인과응보식 업보나 불행한 운명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만큼은 고통을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고통이라는 것은 죄 때문에 초래된 나쁜 악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가져온 고통이라는 악을 하나님은 약으로 선용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시 때문에’라기보다 〔가시 덕분에〕라는 긍정의 신앙을 심어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런 불행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누구 탓입니까?」


이런 묘연한 질문에 예수님은 너무나 멋진 제 3의 대답을 하십니다. 3절을 봅시다.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놀라운 복음입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풀어주는 하늘의 해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면하는 시련이나 고난에 대하여 누구를 탓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십니다.


고난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신앙적 관점으로 풀어가자는 해법제시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주목해보라는 더 큰 안목을 갖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인과응보식으로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 사람의 시련이나 어려움에 대하여 사랑이 없는 정죄의식으로 풀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고난의 의미와 목적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해봐야 합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련이나 고통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 연단하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이번 시련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실까?’라는 희망적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주목해야합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1절과 2절이 대칭적 앙상블을 이룹니다.


우선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사람들은 정죄의식과 비판의 차가운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봅니다.


이처럼 우리도 고통의 이유만 따질 뿐, 고통의 짐을 나누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가슴 따뜻한 사랑보다는, 매정한 이성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희망방정식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해야합니다.


저는 이런 표현을 참 좋아합니다.


『당신의 고통 뒤에는 하나님의 큰 목적이 있습니다.』(God’s purpose behind your pain.)


그래서 저는 고난은 악이 아니라, 약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약이 될까요?



1.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눈을 열어주십니다.



오늘의 주인공 시각장애인은 자신의 문제 덕분에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은총으로 눈을 뜨는 행운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 구세주이심을 보게 되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9장 전체내용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영혼의 눈이 열려가는 과정이야말로 멋진 드라마입니다.


첫 번째 단계로, 그는 예수님을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11절)


두 번째 단계로, 그는 예수님을 종교적 선지자로 생각합니다.(17절)


세 번째 단계로,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 구세주로 믿습니다.(38절)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했습니다.(he worshiped Him)



우리도 뜻밖의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영혼의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보이는 영적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33번이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긍휼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기적의 하나님을 보게 해주십니다.



본문 2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낸다.」는 헬라어는 「밝히 보여주신다, 눈을 열어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 눈의 비늘을 벗겨주십니다.


우리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봅니다.


지난주에 목회자들이 어두운 밤에 별을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별은 캄캄할수록 잘 보입니다.


우리가 밤하늘의 별을 조금이라도 많이 보려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고난이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는 신앙의 눈을 열어줍니다. 고난 덕분에 주님이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9장 마무리에서는 두 종류의 상반된 모습을 대비시켜줍니다.(38~41절)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선명하게 보는 영안이 열립니다.


그런데 그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면서도 영의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눈뜬 소경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을 깊이 관찰해봐야 합니다. ‘나는 눈이 먼 자인가, 눈이 열린 자인가?’


혹시 우리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영의 눈이 열리지 못하면 얼마나 더 불행해질까요?


우리 모두 심령의 눈이 열려 하나님이 보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 눈을 어둡게 하는 영적 비늘이 벗겨지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해갈수록 하나님이 크게 보이기를 축복합니다.


인생의 어떤 소용돌이에서도 신비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선명하게 보는 눈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간증하게 하십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난 이 맹인은 꿈만 같은 현실을 살아갑니다. 치명적인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간증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9장 18절부터 내용이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 시각장애인과 그의 부모는 생생하게 간증합니다. 그들의 간증은 단 한 마디입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놀라운 간증이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갑자기 어려움을 당면할 수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을 겪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간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1664년 영국이 낳은 물리학자 Isaac Newton이 23살 되던 해 런던에는 흑사병이 창궐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대학들도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골로 피신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관계로 틈만 나면 시골 외갓집으로 내려가 요양을 하던 뉴턴도 어쩔 수 없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학업을 중단하는 절망감을 안고, 외갓집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그는 적막한 시골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하루 종일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인류문명의 3대 창안이라고 할 수 있는 〈빛의 신비, 만유인력, 그리고 미적분〉이라는 놀라운 열매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래서 과학계에서는 이런 절망의 때를 「뉴턴의 기적의 해」라고 명명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적의 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고난을 통해 간증하게 하십니다. 놀라운 기적은총으로 간증하게 하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어둡고 힘든 때일수록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힘이 없어, 절박하고 애절하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간증의 주인공이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전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을 간증하는 호주사람 선천성 사지절단 장애인 Nick Vujicic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치명적인 절망상태를 신앙으로 극복하여 하나님을 간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긍정마인드가 참 매력적입니다. 그는 자신의 절망적 장애를 놀라운 긍정으로 해석합니다.


『Go Disable → God is able. 장애는 물러가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저는 Nick Vujicic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절망을 절망시키는 사람〕


Nick의 강조점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어떤 한계에 놓여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한계를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


그의 간증은 언제 들어도 역동적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나를 포기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스포츠에서 장애물 경기의 허들은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서라’고 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넘어서는 자입니다.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생의 어떤 걸림돌도 디딤돌로 바꾸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Nick Vujicic는 그의 책 결론에서 감동적인 말로 희망을 줍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는 대신, 나로 하여금 기적이 되게 하신다.』



얼마나 역동적인 간증입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내 인생을 간증이 되게 하십니다.


최근 중국 공산당이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수많은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했습니다.


우리 지구촌교회에서 파송한 박열방 선교사와 장대위 선교사도 어쩔 수 없이 철수하였습니다.


얼마나 씁쓸한 낭패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힘든 고난을 신비한 은혜로 전환시켜주고 계십니다. 박열방 선교사는 명지대학교에서 중국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정래 선교사는 경기대학과 아주대학을 중심으로 중국유학생 교회개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전염병 사건으로 대학캠퍼스 안에서 어떤 공간도 제공하지 않고 있어, 모임을 갖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문제청소년들을 케어해주는 민들레학교에서 주말에는 개척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공모를 했는데, 장정래 선교사의 생명수교회에 낙점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비용도 부담하지 않고 마음껏 교회로 활용하는 기적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고난을 통해 간증하게 하십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간증이 있습니까?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 눈이 열린 사건을 어떻게 간증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고난을 통해 어떤 간증의 삶을 살게 하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각장애인처럼 하나님을 간증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의 기적은총을 간증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오늘 메시지는 이 한 마디입니다.


【고난은 악이 아니라,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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