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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여우를 잡읍시다 (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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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여우를 잡읍시다/ 아가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팔레스틴 지방의 들판에는 포도원이 많았는데 포도나무가 꽃을 피우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 작은 여우가 포도나무 뿌리를 갉아 먹어 피해가 심했습니다. 이 여우는 40센 티미터도 안되므로 무시해버리기 쉬우나 포도원을 망치는 가장 위험한 야생동물이었 습니다. 사사기 15장에 보니 삼손이 여우 300마리를 잡아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 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 의 곡식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 을 사른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무시해버릴 만큼 작은 일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 나19로 말미암은 현실의 위기를 잘 이겨내고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 삶 속의 작 은 여우들을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 속의 작은 여우들을 잡아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극히 작은 것이라도 우매함의 행위들을 청산해야 합니다. 전도서 10:1은 적은 것을 소홀히 여기는 것을 우매함으로 지적해 주었습니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무엇보다 우 리는 언제나 작은 일을 소중하게 알고 작은 것에서부터 성실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작은 일이라고 적당하게 대충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1.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트리는 작은 여우들을 잡아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신장하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해 왔으며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과 자유 민주주 의 체제를 이루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만인은 평등하며 인권은 천부적 권 리입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은 차별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에는 이미 남녀고용평등법 등 20여개가 넘는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동성애자”, “퀴어축제 참여자” 라고 해서 법적인 제재나 차별을 받지 않으며, 지난번 코로나19 집단 감염 확산지였던 이태원 클럽 사건에서도 보았듯 이 동성애자들이 도리어 과보호를 받았지 차별이나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금번에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보호법임과 동시에 동성애 반대자 처벌 법”이요 “동성애 찬성의 자유는 있으나 반대의 자유는 없는 역차별 법”으로, 헌법상 신앙, 양심, 종교,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가 아무런 사회적 합의 없이 서구 일부 국가의 타락한 성문화, 이른바 성혁명(sexual revolution)의 법제화에 편승하고 있는 배후에는 하나님의 질서와 조화를 파괴하고 아름다운 포도원인 교회를 적대시, 무력화하려는 사탄의 음모가 있는 것입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 는 구호 아래에 인권, 평등, 사랑 이라는 구호를 앞세워서 기본적인 구별조차도 없애 버리고 우리의 포도원을 헐어 차 별이 없는 사회를 이루자는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창조질서를 무너트리는 작은 여 우입니다. 차별이 전혀 없도록 차별이라는 의미를 지닌 모든 것들을 포괄적으로 다 포함하여 적 용하는 법이 포괄적 차별 금지법입니다. 100% 차별이 없는 사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차별이 전혀 없는 사회는 실현 불가능한 사회이며 만일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그 사회 는 바로 지옥입니다. 욥기18:에 말씀하심과 같이 지옥은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다 한 가지로 무서운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도 그 영광의 차별이 있다고 고린도전서 15:41에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 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 말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 말씀 하였고 창세기 5:1-2에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 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 람이라 일컬으셨더라\" 고 분명히 말씀 하였습니다. 당연히 모든 동 식물은 암, 수로 나뉘어서 번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멸하시면서 지면의 생물을 보존하기 위해 창세기 6:19에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라고 명령하셨고 창세기 7장에 노아가 그대로 순종하여 암수를 쌍으로 방주에 들인 것을 봅니다. 남녀, 암수의 양성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이 기본질서를 무너트리고 양성 평등을 주장 하다가 이제는 다양한 성 (gender)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창조질서의 파괴입니다. 자연의 어느 부분에서 암수의 양성이 혼돈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까? 이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구별과 차별을 통해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조화(harm ony)와 질서는 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된 인격들이 서로 사랑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이 하나가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포도원을 헐고 창조의 기본질서를 무너트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포괄적 차별 금지법의 작은 여우를 잡아냅시다. 2. 극히 작은 죄라도 철저히 회개하는 일이 작은 여우를 잡아내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적은 실수나 죄라도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작은 것이라도 고치기를 애 쓰며 작은 것부터 잘못된 것을 한 걸음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무섭고 큰 죄만 죄가 아닙니다. 극히 적은 거짓말 하나가 무서운 죄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1에서 죄에 대하여 얽매이기 쉬운 죄 라고 말했습니다. 옛 말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6에 “너희가 자랑하는 것 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 하 였습니다. 사울왕은 작은 불순종을 회개치 아니하고 넘어감으로 하나님께 버림 받는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예가 다윗 왕에게서 발견됩니다. 다윗이 게으르고 나태하자 곧 유혹에 넘어 진 것을 봅니다. 다윗의 작은 게으름과 안일함이 무서운 죄를 낳게 됨을 봅니다. 사무엘하 11:1-4 “(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 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 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 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 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 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극히 적은 실수나 잘못을 소홀히 여기지 맙시다. 전도서 10:1에 죽은 파리들이 향기 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든다고 말 씀 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지나며 무엇보다 우리 서로 각자가 적은 우매를 무시하지 말고 죄를 깨닫는 즉시로 자백하고 회개하여 죄에 얽매이지 않도록 합시다. 철저한 회개의 삶이 작은 여우를 잡아내고 우리 삶의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루게 합니다. 범사에 극히 작은 죄라도 철저하게 찾아내어 회개하여 작은여우를 잡아내고 코로나19의 저주를 물리칩시다. 3. 일상의 작은 불성실을 고치는 것이 작은 여우를 잡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마태복음 25;21과 23에서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 어다 하고\" 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큰 일은 책임이 무겁고 적은 일은 책임이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큰 것만을 소중하게 아는 어리석음을 버리십시오. 극히 작은 책임을 소중하게 알고 범사에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삽시다. 누가복음 16:10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모세는 적은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가 바로의 궁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면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은 견딜 수 없는 고난이며 극히 가 치없는 일이었지만 40년을 하루같이 성실하게 양을 돌보다가 민족을 구원하는 지도자 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아버지 집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자리에서 적은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성 실하고 충성하므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작은 불성실들을 찾아내고 성실 함을 회복합시다. 일상의 삶에서 극히 작은 일에도 성실합시다. 불성실의 어떤 그림자라도 자신의 삶아 자리잡지 못하게 합시다. 우리의 삶에서 불성실함을 청산하는 일이 작은 여우를 잡아 내는 것입니다. 극히 작은 시간이라도 헛되게 보내지 않는 것이 작은 여우를 잡는 일입니다. 1분 1초 를 소홀히 여기지 않고 모든 시간에 충실해야 합니다. 작은 시간에 소홀한 것이 큰 실수와 손실을 가져옵니다. 에베소서 5:16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야곱의 성실을 본받도록 합시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창세기 31:40 에서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라고 자신의 삶을 고백하였습니다. 분초를 소홀히 여기지 않고 모든 시 간에 충실했던 자신의 삶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코로나19의 거친 광야를 지나며 일상의 작은 불성실을 철저하게 찾아내어 회개하여 작은여우를 잡아내고 코로나19의 저주를 물리칩시다. 4. 사람을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을 고치는 것이 작은 여우를 잡는 일입니다. 일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우리는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주 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VIP로 여기고 대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중한 것만큼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한 것입니다. 여 러분에게 주어지는 지극히 작은 요청 하나라도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대하시 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10:42에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 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을 소홀히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자녀를 소홀히 여 기지 않고 정성을 다한 부모가 훌륭한 자녀를 만들어 냅니다. 좋은 사람을 기다리지 말고 좋은 사람들을 만드는 삶을 삽시다. 내 삶의 주위에 주어진 어느 누구도 소홀히 대하지 말고 무시하지 맙시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3-4에서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 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겸손한 섬김에 대해 권면하고 교훈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교만이나 자만의 작은 여우를 잡아냅시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섬기며 삽시다. 코로나19의 재앙을 서로 돕고 사랑하며 이겨내며 스스로 각자의 교만이나 자만을 철저하게 찾아내어 회개하여 작은여우를 잡 아내고 코로나19의 저주를 물리칩시다. 5. 작은 불평도 근절시키는 것이 작은 여우를 잡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는 잊어버리고 원한은 기억을 잘합니다. 우리는 거꾸로 은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기억하고 원한이나 미움은 바로 잊어 버려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고 우리의 심령을 기름지게 만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 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으면 삶의 현장이 옥토가 됩니다. 원망과 불평을 키우면 내 삶의 현장이 박토 가 됩니다. 우리는 요셉의 삶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요셉은 극히 적은 불평이라도 마음이나 입에 담지 아니하고 극히 적은 감사도 놓치지 않으므로 어디에 가든지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첫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므낫세는 그 의 미가 ”그것을 잊어버리자 (forget it)\"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감사로 해석하였습니다. 창세기 50:20에 보니 요셉이 형들을 향 하여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합 력하기 위해서는 극히 적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37:7-8에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 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터트리기 쉬운 작은 불평이라고 허용하지 말고 우리의 일상에서 불 평의 그림자도 남지 않도록 회개하여 작은여우를 잡아내고 코로나19의 저주를 물리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트리는 포괄적 차별 금지법의 작은 여우를 잡아냅시다. 극 히 적은 실수와 죄를 소홀히 여기는 작은 여우, 불성실의 작은 여우, 남을 무시하는 교만과 자만의 작은 여우, 불평의 작은 여우를 잡아내어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루고 전 심전력으로 성숙으로 이루어 코로나19의 위기를 극복하고 더 큰 축복의 발판을 마련 하여 우리의 포도원을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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