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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호2:2-13)

본문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호세아 2장 2-13절


 




이성 간에 서로 눈과 마음이 맞게 되면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하고도 느껴보지 못했던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에 연인 사이에서 한쪽이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주게 된다든지 부부 중 한 명이 외간남녀와 정을 통하게 될 때, 그 미움의 감정 또한 극렬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정절을 깨뜨리고 간음을 저질렀을 경우에 그것을 용서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고, 잊어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며, 더욱이 그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잊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사랑해 준다는 것은 실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대반전이 성경에는 자주 나타나는데, 이 호세아 2장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본문은 남편이라면 누구나 다 증오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간음한 아내를 깨끗이 용서하고 잊어줄 뿐 아니라 아예 새로이 결혼식까지 올리면서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맞이해 주는, 참으로 신기한 신랑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인격과 성품을 소유하고 있는 신랑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처럼 지극한 사랑을 받아 누리게 된 아내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당연히 미워해야 할 대상을 오히려 지극한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이런 일은 세상의 부부 사이에서는 거의 찾기 어려운 것이지만,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일어나고 있는 기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기한 일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까?

   간음했던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로 돌아가서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받는 행복한 아내로 사는 모습이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는 간음한 여인처럼 악하고 추한 죄인이었다가 그 원래의 남편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온 신실한 성도가 꼭 지키고 발휘해야 할 신앙생활의 정절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실한 성도는 미혹하는 우상과 이단을 상대로 ‘진리를 옹호하는 영전(靈戰)’에 앞장서야 합니다.


   본문 2절부터 4절에 “2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4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고, ‘영적 이혼 상태’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 이스라엘 백성 중에 비록 소수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의로운 신자들에게 내리시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그처럼 영적으로 행음하고 있는 “어머니” 즉 우상숭배로 타락하고 있는 자기 조국 이스라엘의 죄악을, 그 나라의 국적과 그 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백성 중에서 오직 ‘참된 이스라엘’로 남아 있는 경건한 신자들이 대항하고 나서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 “논쟁하라”는 말은 그저 단순히 말싸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법적 소송을 벌이다’ 혹은 ‘고발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참된 성도들이 그 타락해 가는 조국의 죄악을 꾸짖으면서 당장 회개해야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함에 있어서,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어긋나는 모든 범죄 행위를 백일하에 고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소돔성의 악한 백성들 앞에서 의로운 법관처럼 논쟁했던 롯과 같이, 참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악을 정죄하고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와 그런 논쟁을 해야 하는 자식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같은 핏줄을 나눈, 아니 그 핏줄에서 태어난 몸이 그 어머니를 상대로 논쟁하고 소송해야 한다면 그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럽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그 어머니를 진정으로 구해낼 수 있는 길이라면, 자식은 어머니와 싸움을 벌이는 것까지도 불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3절과 4절에 이어지는 대로 “그렇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은 ‘벌거벗김’을 당하고 “광야”와 “마른땅같이” 목마르게 되고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고 영영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 안에 팽배하고 있는 온갖 죄악을 두고도 그나마 남아 있는 소수의 의인들이 진리를 지키는 영적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그 민족과 사회와 후손의 앞날은 점점 더 무서운 저주에 빠지게 될 뿐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참된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할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나 목사가 다른 교회를 향하여 논쟁을 벌이는 것은 마치 어머니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자식의 경우처럼 괴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복음 진리에서 어긋난 길을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기독교인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교회라는 같은 간판을 걸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을 상대로 논쟁하지 않는 것은, 결코 진정한 이해와 관용의 자세도 아니며 참된 사랑의 자세는 더더욱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간음하면서 돌아다니는 어머니를 보고도 아버지에게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시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계에는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는 참 많습니다만 그 대부분이 다 사소한 ‘윤리적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를 비판하려고 한다면 정말 중대한 문제, 교회가 하나님과의 영적 정조를 깨뜨리는 배교 행위, 바로 우상혼합주의나 이단사상에 빠지는 죄에 대하여 발 벗고 나서서 논쟁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요한 논쟁을 하는 목사나 신학자는 너무 적고, 그 대신에 참된 교회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찾는’ 일을 교회 비판의 주된 이슈로 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식이 자기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좀 좋지 않다고 해서 그것 가지고 어머니에게 대들고 시비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사귀는 것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머니와 싸워서라도 반드시 말려야 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신자라면 바로 그런 교회의 ‘영적 음행’을 가장 심각한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지극히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그 ‘얼굴에 음란이 뚜렷한’ 교회들, 즉 이단 사상을 대놓고 가르치는 교회들이야말로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성경 말씀의 법 앞에 출두시켜서 엄중하게 고발해야 할 대상입니다.

   ‘유방 사이에 음행이 가득한’ 교회들, 즉 우상종교와 소위 종교일치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교회들이야말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자 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목소리를 높여 탄핵하고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대적인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생전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종교혼합운동에 앞장섰던, 이 시대의 모든 우상종교와 이단종교의 괴수인 것을 똑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네들도 행복하시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 속에 예수 십자가 대속 공로에 대한 믿음이나 천당 영생에 대한 소망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습니까?

   정말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게 되어서 행복합니다.

  ’라는 정도의 신앙고백은 나와야 할 텐데, 그냥 자기 혼자 마냥 행복하다면서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님이 어디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이제 천당 가게 되니 행복합니다. 우리 나중에 천당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말 한 마디쯤은 남겼어야 할 텐데, 그냥 ‘당신네들도 알아서 행복하게 잘 사시오.’ 하고 죽었습니다.

   자기도 천당을 믿지 않고 죽으니까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그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이나마 행복하게 잘 살도록 노력하라는 말 외에는 더 이상 해 줄 말이 실제로 없었던 것 아니었겠습니까?

   교황이라는 사람의 유언만 들어 보아도 이처럼 그 정체가 뻔한데, 오늘날 이 천주교를 기독교의 형제쯤으로 생각하는, 아니 오히려 ‘개신교의 어머니 교회’라고까지 말하는 목사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은 정말 땅을 치고 개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이 지상에는 ‘음란한 자식’들만 낳는 교회, 예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이 없고 천당구원이 없는 사탄의 자식들을 기독신자라는 버젓한 이름으로 양산시키고 있는 교회들이 실제로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바로 그런 가짜 교회들이야말로 우리가 끝까지 싸워 물리쳐야 할 ‘집안의 원수’입니다.

   분명히 진리에서 떠난 이단이요 사신 하나님을 떠난 배교자일 때에는 비록 같은 이름을 나눈 기독신자와 교회라 할지라도 ‘논쟁하고 또 논쟁하며’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조국의 교회들로 하여금 ‘본 남편’을 찾아 돌아오게 만드는 영전(靈戰)의 사명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실한 성도는 음행자와 탕자까지도 결국 돌아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택자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5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5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6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5절에서 “음행”과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는 바로 바알 같은 우상을 숭배한 것이었습니다.

   5절 하반절에 기록된 “떡”과 “물”은 필수음식물이며, “양털”과 “삼”은 의복을 위한 것이고, “기름”과 “술”은 인생의 풍요와 기쁨을 위한 기호식품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부터 풍성하게 내려주셨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알 우상숭배에 빠진 그들은 이 모든 ‘의식주’의 은총을 받아 누리면서도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자들” 즉 바알을 위시한 이방 신들이 그들에게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눈과 마음을 남편 아닌 다른 남자에게 주고 있던 이스라엘, 아니 아예 그 외간 남자를 찾아다니던 ‘아내’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6절 말씀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연애하려고 “따라가고” “찾아” 가는 길들을 “가시”와 “담”으로 막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이후부터는 그들의 인생에서 매사가 잘 풀리지 않고 온갖 장애물이 가로막으며 환난과 재난만 따라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마치 탈선한 아내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밤새도록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남편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이미 버린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웬만한 남편이라면 그냥 몰래 뒤따라가서 현장을 목격하고 그 증거를 가지고 당장 이혼해 버릴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그 이스라엘 백성의 인생을 ‘가시’로 찌르고 ‘담’을 쌓아서라도 아예 그런 우상숭배의 길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바로 그런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알게 된 자들은 그제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야 하겠구나.’ 하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었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세상의 낙을 누리는 “지금”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던 “그 때의 내 형편”이 훨씬 더 “나았던”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번 택하신 자녀가 신앙생활의 정로를 벗어나 딴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면 그를 따끔하게 징계하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벌을 주어서라도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만드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때로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일견 매정한 남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진짜 이유는, 이처럼 그 뒤에 한없는 사랑을 감추어 놓고 계시기 때문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 쪽에서는 자주 변심하더라도 하나님 쪽에서는 한번 주신 사랑을 중단시키거나 거두시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을 가지고 매섭게 꾸중하실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인생의 매까지 맞게 하시는 진짜 의도는 오직 당신의 사랑하시는 택자를 끝까지 보전하시려는 이 한 가지 때문인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빼먹고 놀러 가면 놀러 가서도 마음이 찝찝하고 불편하지 않습니까?

   십일조를 아예 하지 않거나 하는 척은 해도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사업에 구멍이 펑펑 나고 생활은 더 쪼들리게 되지 않습니까?

   교회생활을 게을리 하면 내 인생을 마음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오히려 집안 곳곳에서 시험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곁길로 빠져나가려 할 때 만약 그런 불편한 마음의 ‘가시’가 생기고 그런 인생의 ‘담’들이 가로막게 되면, 아직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시는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이 나쁜 짓을 하려고 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시려고 그 문밖에 담을 쌓아 놓으시고 그 길에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게 하시는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절대로 좋아할 일이 못됩니다.

   유아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주일예배 출석도 하지 않는데 학교 성적은 쑥쑥 올라가고, SFC 출신인 청년이 결혼 후에 오히려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고 있는데도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불안한 조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아예 가만히 내버려두려고 작정하셨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견 편해 보이는 인생이 계속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너는 버린 자식이니 네 마음대로 죄 짓고 살아라.’ 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미 유기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탈선한 인생을 통과하면서 이리저리 얻어맞고 상처투성이가 되게 하신 후에라도 결국은 집을 나갔던 탕자처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라고,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을 절실히 깨닫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에 ‘가시’를 치시거나 이루고 싶은 일에 ‘담’을 쌓으시는 것은, 비록 음행자나 탕자라 할지라도 한번 택하신 자는 결단코 놓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섭리인 줄로 깨닫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들어가고 있던 배은배신의 길을 떠나 ‘본 남편’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감격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실한 성도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게 반드시 내릴 ‘궁극적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8절 이하 13절에 “8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9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1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 13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처럼 당신께 배은하고 영적으로 음란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육신을 위해 공급해 주시던 것들을 끊으심으로 벌을 주려 하셨습니다.

   8절에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은과 금” 등 사람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재물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이 “내가 그에게 준 것”이며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9절에서 그 모든 것을 도로 빼앗아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내 곡식”, “내 새 포도주”, “내 양털”, “내 삼”이라고 하나하나 당신의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는 자연히 그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또한 감사할 줄 모르는 죄로 직결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인생은 자기네가 먹고 입고 살게 된 원인에 대하여 전혀 엉뚱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문명이 잘 발달된 현대에 ‘재수 좋게’ 태어난 덕이라고 여기든지, 아니면 오직 자기 자신이 죽어라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주어진 당연한 결과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경고하시기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 8:17, 18)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복을 감사하지 않고 모두가 다 ‘자기 스스로 이룬 것’이라고 교만에 빠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의식주의 복을 빼앗아 가심으로써 벌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11절에 나오는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희락”으로 지키는 “명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그들은 그런 거룩한 날들을 통해 누리던 복도 박탈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섰으니 그들이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성일을 지키며 예배를 통하여 받던 은혜와 기쁨과 힘도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며 그것 역시 하나님의 징벌이었던 것입니다.


   이 벌이 앞의 의식주를 끊는 벌에 비해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까?

   사실에 있어서는 훨씬 더 중한 벌입니다.

   그들은 ‘주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빌 4:4)이란 더 이상 누릴 수 없고 오직 세상 쾌락만 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며 성도와 교제하며 교회를 섬기는 이 놀라운 복을 사람이 누리지 못하게 될 때, 그의 영혼은 남은 평생을 주리고 목마른 가운데서만 살다가 그 끝은 영벌이라는 죽음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일단 임하게 되면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는 말씀대로 모든 것이 완전 끝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보고도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우리가 방심하며 회개를 늦추어서는 절대로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가 오고야 말 것이고 그때가 되면 그 사람의 지은 모든 죄를 다 찾아내어서 ‘그 죄 지은 만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음행한 아내까지도 용서하시고 기다려 주셨던 하나님을 끝까지 저버릴 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국 그 인생을 벌주기로 작정하시게 되면 그 저주는 더 이상 ‘아무도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끝까지 거부하는 죄인을 반드시 벌하실 것이라고 하신 이 엄중하고도 무서운 선포를 결코 가볍게 듣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용서와 복을 선포해 주시는 하나님은 또한 저주와 멸망 역시 똑같이 경고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조금이라도 간과하거나 무시하다가는 정말 완전 끝장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무슨 참된 회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내릴 당연한 징벌이 없다면, 그 회개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는 용서란 것이 무슨 은혜로운 일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이처럼 명백한 언어로 선언하신 저주, 죄에 대한 벌, 하나님을 배반한 간음자들이 받아 마땅한 지옥영벌을 무슨 ‘부드러운 말’로 완곡하게 바꿀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결을 거역하는 행위이며, 그 엄하신 모습 뒤에 있는 한없는 자비와 인애의 성품을 모독하는, 실로 무례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벌은 단지 사람의 몸이 의식주를 잃고 병에 걸리고 천재지변을 당하게 하는 정도로 끝나는 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벌뿐 아니라 원래 창조주와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로 지음 받았던 사람에게서 그 최고의 은혜와 복을 박탈해 버리시는 가장 무서운 벌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경고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처럼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원히 단절될 무서운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을 진정 두려워하면서, ‘본 남편’에 대한 정절을 끝까지 순결하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남편이 싫다고 집 나갔던 아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던 아내까지도 자기 ‘본 남편’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한없는 사랑이요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혼인잔치집의 문이 영영 닫혀버리기 전, 아직도 남편이 그 아내를 기다려 주고 있는 이 고마운 기회에 우리는 늘 스스로 회개하고 이웃을 전도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가족과 민족의 생명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는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미혹하려고 온갖 술수를 쓰고 있는 우상과 이단의 정체를 백일하에 고발하면서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인생에 시험과 환난이 닥쳐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택자를 끝까지 보전해 주시려는 사랑의 손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 당장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별 일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의 날이 오고야 말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늘 깨어서 등에 기름을 채우고’ 주님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택자를 향한 사랑에 영원토록 조금도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오늘도 성경의 매서운 경고와 인생의 고통스러운 매까지 사용하시면서 우리를 불러 주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원래 추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간음한 여인’ 같은 우리를 오히려 당신의 ‘정결한 신부’로 만들어 주고자 하시는 그 신랑의 한없는 사랑과 일방적인 언약 때문인 것입니다.

   우상과 이단을 대항하여 논쟁하는 용기, 택자를 향한 하나님의 불변의 인자를 의지하는 믿음, 그리고 반드시 있을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서, 스스로 ‘지금보다 더 나았던 이전 형편’을 늘 사모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이 악하고 패역한 세대에서 여전히 음란하게 살고 있는 자들까지 ‘본 남편’에게로 다시 이끌어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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