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도우라 (행16:6-10)
본문
우리를 도우라 (행16:6-10)
(행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 노아 당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며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악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도, 의롭게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삶을 살았던 노아를 구원하시기 위해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창6:5-9)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방주를 120년 동안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방주를 만드는데 무려 120년이 걸리게 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모두 쓸어버려 심판하시되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노아가 산 위에 방주를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회개는커녕 노아를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마침내 홍수가 40일 동안 계속되자 온 지면이 물로 가득하게 되어 천하에 높은 산들이 잠기게 되었고 노아의 방주만이 물 위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창7:17-18) (17)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세 아들과 며느리들, 이렇게 8식구들만 구원받았습니다. 세상에는 노아의 8식구들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홍수 심판 후 이들 가족들이 방주에서 내려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는데, 노아가 그 포도주에 취해 그만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잠이 들었습니다.
(창9:20-23)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그런데 장막을 지나치던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말합니다.’ 이 말은 함이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 주지 않고 오히려 구경거리로?여겨 다른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드러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함으로부터 이 사실을 들은 셈과 야벳은 그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벌거벗은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목격한 함의 태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아비의?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여기 ?“보고”라는 말의?히브리어 <라아>는 지나가다가 슬쩍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흥미 있게 계속해서 주목했다는 뜻입니다. 함은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 있는 장면을 보고 놀라서 후다닥 뛰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부끄러운 광경을 계속 보면서 즐겼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야동을 보듯이 즐겼다는 것입니다. 보고 나서 혼자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 나가서?형제들에게 “고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함의 행동에는 집안이나 이웃의 실수를 덮으려고 하는 마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생긴 것을 즐기는 태도입니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데서 쾌감을 맛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집안에서 드러난 수치스런?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퍼뜨려 더 어렵게 만드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주었습니다.
(창9:23)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어깨에 메고”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를 나타냅니다. 이는 종의 태도를?표현합니다. 아버지가 실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아들들은 아버지 섬기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옷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실수했다고 해서 자녀의 도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 드림으로 부모 섬기는 도리를 다 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실수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셈과 야벳의 이러한 태도에서 아버지의 인격을 보호하려는 조심스러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름답고 고상한 태도는 드러난 아버지의 수치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실수와 수치에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저주와 축복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사랑으로 덮어주지?아니한 함에게는 형제들의 종이 되리라는 저주가 내렸습니다.
(창9:25)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여기 ‘가나안’은 함의 후손들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 가나안 족속들이 나무를 하고 물긷는 노예로 셈족 이스라엘을 섬긴?적이 있습니다.(수9:27) 그러나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으로, 끝까지 아버지의 인격과 권위를 보호하며 섬긴 셈과 야벳은 각각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창대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9:26-27)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노아가 실수하여 수치를 드러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노아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셈족은 노아의 소원대로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되어 온 인류를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족속이 되었습니다. 이 셈족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믿음의 조상으로?삼으시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통해 약속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야벳 족속은 오늘날 서양 대부분의 나라들로 “셈의 장막에 거하며 창대케 된다”고 했는데, “셈의 장막” 곧 기독교의 그늘 아래 창대한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현대 과학과 기술 문명을 일으킴으로써 과연?창대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어긋남이 ?없이?반드시 역사 속에 성취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오늘 본문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함과 그리고 셈과 야벳의 후손에게 내려진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야벳 후손들이 사는 서양, 즉 유럽으로 들어간 사건입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성령께서 그것을 막고 유럽 쪽으로 인도하신 사건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간절했으나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허락하지를 않았습니다.
(행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그것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리라”(창9:26-27)는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복음은 아시아에 머물지 아니하고 유럽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뜻이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베드로가 3천명을 회개시킨 사건이나 그가 베푼 많은 표적과 기사들도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교회가 흩어진 것도 복음을 더욱 확장시키려는 성령의 강권적 역사하심에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핍박자 사울을 회심시켜 이방인을 위한 복음 증거자로 세우신 것도 성령의 역사였고, 바울의 선교 사역에 함께 하사 능력을 베푸시고 방향을 제시하시며 유럽으로 인도하신 분도 바로 성령이시었습니다. 이제 바울을 유럽으로 인도하신 성령께서는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로 인도하셔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성령께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를 설립하시고(행 2:1-4), 그 교회를 성장 발전케 했으며(행 2:43-47) 더 나아가 전 세계로 복음을 확장하는데 있어 그 주도적으로 역사(役事)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확실히 복음 전파의 과정에 있어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개입하사 이끌어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행전 전체를 두고 볼 때 바울은 어쩌면 먼저 소아시아의 중심 수도인 에베소를 중심으로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대도시에 복음을 먼저 전하는 것이 확실히 효과적인 복음 선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서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번번히 바울은 성령을 통해 저지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전도 계획과는 관계없이 자기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쪽도 저쪽도 막으시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주춤거리고 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이때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마게도니아로 떠났습니다. 바울의 이같은 지체하지 않는 순종으로, 주의 성령께서 이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는 순종으로 오늘날 구원의 복음이 전 세계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 도중에 얼마나 심한 고난을 당했는지 이루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고후11:26-27)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그가 이 모든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일편 단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낌없이 그리스도께 바친 사람입니다. 핍박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더 오래 살고, 더 편안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도하는 데 덜 위험하고, 핍박이 덜한 지역을 선택하는 인간적인 타산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5:16-25에서 이같은 그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갈5:16-25)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따라서 그는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하나님께 절대 의존함으로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인들과 뜨거운 작별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행선(行船)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움없이 고스(Cos)를 통과하여 로도(Rhodes), 바다라(Patara), 베니게(Phoenicia)를 거쳐 두로(Tyre)에 도착하여 7일 동안을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 두로에서 머무는 동안 그곳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핍박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것만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바울에게 명령하셨다면,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죄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이 두로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기다리고 있음을 바울에게 통보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을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선택권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말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행21:13)...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사도 바울에 대한 예루살렘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을 향하던 중 또 한 번 가이사랴에서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의 복음 전도자 빌립(초대교회 7집사 중 하나)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선지자 아가보가 찾아와 수난을 예고하였던 것입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음으로서 바울이 그처럼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행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아가보의 표현을 통한 예언, 즉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묶음으로써 바울이 그처럼 될 것임을 표현한 계시는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성도들은 이 표현 계시를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사랑하고 아끼며 염려하는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던 것입니다.
(행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그러나 믿음의 형제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며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까지도 각오하였음을 선언합니다.
(행21:13-14)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할 수 있는 고백은 이것뿐일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일사각오의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바울의 복음 사역은 죽음까지도 불사한 것이었고, 그러한 비장한 결심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케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부딪쳐 올 위험을 알면서도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서는 자신의 안전을 전혀 돌보지 않았던 바울은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여러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되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이 결박과 핍박으로 자신을 기다린다 해도 자신은 죽기를 각오하였노라며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에베소 사람)를 데리고 성전 유대인의 뜰에 들어갔다고 모함하여 온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규례에 따르면 성전 가운데 유대인의 뜰에 이방인이 들어가게 되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행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해서 돌로 쳐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 천부장이 군사를 파견하여 바울을 체포했습니다.
(행21:27-33)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결박되어 심문을 받고 투옥되었는데 그 날 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23:11)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야벳의 후손 서양 사람들, 즉 유럽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찍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키며 그에게 주신 말씀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행9:15-16)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바울의 전도 사역에 있어 중대한 순간마다 나타나셔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이번 사건에도 개입하시어 현실의 고난을 감내(堪耐)할 수 있도록 뚜렷한 목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했듯이 로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암담한 현실 가운데 있던 바울에게 원대한 비젼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로 향한 더 큰 비젼과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사명까지 감당하도록 격려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인간은 자기 사명을 끝낼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Man is immortal until his work is don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위해 로마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바울의 꿈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로서 로마에로의 복음의 진출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러한 비젼과 확신은 바울로 하여금 앞으로 닥쳐올 많은 환난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가자, 암살단 40명을 만들어 바울이 호송되어 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 암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질이 이같은 사실을 바울에게 알려 로마 당국은 바울을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과 창병 200명을 준비하여 안전하게 바울을 호송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당국에 자신은 로마 시민권자이고, 그래서 로마에 가서 황제의 판결을 받기를 원한다고 밝혀 마침내 로마로 호송되어 가게 됩니다.
(행25:21)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하나님께서 “(행23:11)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고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로마 당국에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여기저기로 끌려다니면서도 자기의 무죄를 변명하여 석방될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군대에 의해 그대로 로마까지 호송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암살자의 위험을 피하여 로마에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의 인생해석은 빌립보서 1:12에서 분명합니다.
(빌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 “진보”는 전진을 뜻합니다. 바울의 인생관은 복음의 전진에 있습니다. 복음의 전진을 위해서라면 옥살이라도 의미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위해 온갖 박해와 핍박, 그리고 투옥되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전진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전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발가벗기우신 채로 십자가에 못박혀 온갖 수치, 창피, 부끄러움과 멸시 천대를,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면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시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창피와 수치, 멸시를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그 창피와 수치, 그리고 멸시와 고통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면 예수님께서도 최후 심판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를 전파하다가 높아진 위신이 떨어질까봐 두려워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차라리 인생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환영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책자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만삭이된 어떤 여인이 무릎까지 눈이 쌓인 추운 어느 날 산길을 걷다가 너무나 힘이 들어 눈 위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기진맥진 쓰러져 죽게 됩니다. 때마침 이른 새벽 선교사 한 분이 새벽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짚차를 타고 눈길을 가는데 불빛에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아기 울음소리가 눈 속에서 들려오고 왠 여인이 나체로 눈 위에 죽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기를 낳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 속옷까지도 다 벗어서 아기를 싸놓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것입니다. 후에 이 아기는 선교사의 양아들로 훌륭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양 선교사가 그 옛날의 상황을 그 양아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네 어머니의 신분을 사방에 수소문 해 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어느 산 어디에 네 어머니를 묻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네 어머니가 너를 살리고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청년은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두문불출합니다. 몇날 며칠을 방에서 드러 누워만 있던 이 청년이 눈이 펑펑 쏟아지자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가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무덤을 부둥켜 안고는 “오 어머니 내가 당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다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어 놓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는 또 웁니다. “오 어머니 그때 이 만큼 추웠습니까?” “이 만큼 부끄러웠습니까?” 여러분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무덤도 남겨 놓지 않고 이 땅에 자신의 몸된 교회만을 남겨 두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셨습니다. 이 교회를 부둥켜 안고 주님께서 남겨놓으신 남은 고난을 감당하면서 “주여, 이만큼 고통스러웠습니까? 주여! 이만큼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까? 주여!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일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고백이 성도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바울이 마게도니아로 곧장 떠나게 된 이유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요청때문이었습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말은 영혼의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이는 복음을 직접 들려 달라는 요청의 소리입니다. 마게도니아는 그리스, 알바니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를 잇는, 바로 유럽의 관문입니다. 지금의 유고 지역이 바로 마게도니아입니다. 마게도니아의 중심지는 빌립보로서 로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발전되었고, 사회 질서나 군사면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지지 않을지 모르나, 바른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여 우상을 섬기고 인본주의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른 신앙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멀리서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사회적인 실패, 그리스, 곧 헬라의 문화적이며 지식적인 실패, 그리고 유대교의 종교적인 실패가 이렇게 마게도니아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깝게 부르짖게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마게도니아와 같은 곳입니다. 당시 유럽에는 아름다움, 철학, 예술,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그 어떤 것을 바울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줄 수 있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영적인 면이 가장 결핍되어 있었고 그들에겐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은 오늘날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지구촌의 한편에서는 쏟아지는 물질의 풍요 속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먹고 마시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생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생필품마저 없어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단 이러한 물질적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혼에 대한 사랑이 메말라 있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지라도 영적인 굶주림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영적 실체나 능력을 향한 굶주림입니다. 우리는 굳이 본문에서와 같은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사랑과 동정에 굶주린 사람들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시아의 30억 인구가 이 생명과 사랑의 복음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구 9억의 인도, 14억의 중국에 복음을 모르는 그 많은 사람들, 일곱 교회가 있었던 터키 지방에 지금은 교회의 씨가 말랐습니다. 선교사가 제일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 바로 터키입니다. 또한 러시아의 엄청난 인구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건너와서 도와달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계 인구가 지난해 77억 5천만입니다(독일 세계 인구재단의 최근 보고). 그 중에 60%가 아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은 1%도 안될 정도입니다. 99%가 아직도 복음을 모른채 있는 것입니다. 한국만이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약 10여년 전의 통계입니다만, 세계의 인구 중 매 시간마다 기아(飢餓)나 다른 원인들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약 6,000명 정도이며 매 시간마다 14,000명이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세계 인구가 매 시간마다 대략 8,000명씩, 매일 약 200,000명씩 증가하고 있다는 것과 그 중에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거나 거의 알지 못하는 지역에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영국과 같은 몇 개의 나라들에서는 매년마다 교회에 나오는 신자의 수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비록 한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의해 격려를 받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유럽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비율은 겨우 5%에도 미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전세계가 죄악 속에 빠져 있습니다. 스페인은 선진국중 가장 <죄많은 나라>로 조사되었습니다. 스웨덴의 수출전문지 스벤스크 엑스포트 스트라테기가 실시한 국제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19개국 중 흡연, 음주, 마약, 도박, 포식(飽食), 야간 유흥, 매춘 등 부문에서 스페인이 단연 종합 1위를 차지해 스페인이 프랑코시대 이후 <죄의 소굴>로 전락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스페인은 야간 유흥과 도박 부문에서 1위를 점령했습니다. 이어 프랑스, 미국, 영국, 네델란드, 덴마크,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까지 10위를 기록했습니다. 2위인 프랑스는 1인당 술 소비량이 가장 높았고, 3위의 미국은 마약문제가 19개국 중 최악의 상태로 지적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들나라에 못지않게 <죄가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한 몫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목마른 심령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과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 죄 용서를 갈망하는 사람들, 구원의 소망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든 문제와 소망을 풀어줄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해답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수많은 책들이 있어도 우리의 길에 빛되는 성경이 없고, 수많은 날은 있어도 주일이 없으며, 호화 주택은 있어도 평안이 없으며, 지식은 있어도 참 지혜가 없고, 할 일은 많아도 안식이 없고, 경제적 풍요는 있어도 마음의 부요가 없고, 귓가에 음악이 있어도 마음의 노래가 없으며, 마음에 상처가 많아도 치유가 없고, 오늘은 있어도 영원이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인생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더욱 더 크게 열려지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더 넓게 열어서 그들을 가슴에 품고, 또 손을 더 넓게 펴서 사랑의 손길을 크게 펴 돕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아이의 작은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선교를 위한 작은 헌신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축복하셔서 수 천명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마스터 키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진실로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전파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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