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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얼굴 (행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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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얼굴 (행6:8-15)





(행6:8-15)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1.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그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셔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즉 사도들, 특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었던 사람을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고 말씀하자 곧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를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하게 입증되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행2:41)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4:4)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더해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욱 더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게다가 수많은 이적과 표적 등이 나타나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등이 깨끗이 낫자 예수님 당시 못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를 전파하지 못하도록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사도들을 탈옥시켜 주시면서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연합하여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를 방해하기 위한 온갖 음모가 꾸며졌으나 하나님께서는 일촉즉발의 살벌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사도들로 하여금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셨고, 그들로 더 큰 용기와 확신 속에서 예수의 증인된 사명 수행에 진력(盡力)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맹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 교회에는 성도의 수가 무려 20,000~25,00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불과 1,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 정도로 증가되었다는 것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급성장하게 된 교회가 사도들이 오직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혀 힘쓰도록 하기 위해, 교회 내에 구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일곱 집사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일곱 집사의 자격은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스데반 집사가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충만하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는 집사로 봉사했지만 교회 밖으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표적과 기사 등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주로 헬라파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면서 전도하다가, 유대교 지도자들로 부터 성전과 율법과 모세를 거스린다는 거짓 증거로 공회에 고소당해 끌려가 더불어 논쟁했지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자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잡아다 죽이려 작정했습니다. 이들 유대교 지도자들은 앞서 4,5장에서도 수차례 사도들을 위협하여 복음 전도를 저지하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가 조직(집사제도)을 갖추며 더욱 부흥해 가자, 이들은 종교적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회를 핍박하기로 계획하고, 그 구체적 실행으로 민간에 혁혁한 “큰 기사(奇事)와 표적(表蹟)을 행함”과 더불어 말씀을 전하는 스데반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뱀과 같이 독을 내뿜으며 살기등등한 이들 유대교 교권주의자들 앞에 체포되어 끌려온 스데반의 모습은 평화와 기쁨을 잃지 않은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라고 했습니다.

H.G. 웰스는 아브라함 링컨을 세계의 여섯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아마 자기 할아버지 이름은 몰라도 링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링컨처럼 고생을 많이 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스무살이 될 때까지 그는 손에서 도끼 자루를 놓아보지 않았습니다. 직업만 하더라고 뱃사공, 농부, 노동자, 장사꾼, 품팔이, 군인, 우체국 직원, 측량사, 변호사, 주 의원, 상원의원, 대통령까지 안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학교에 다닌 것은 모두 합쳐서 1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독학으로 유명한 웅변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한 마디로 땀과 노력의 생애였습니다. 링컨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링컨은 문학적 수준에 있어서 세익스피어와 성서 연구는 전문가 수준이었습니다. 1865년, 57세의 나이에 흉탄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링컨은 열심이 배우고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고 사랑을 나누어 주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링컨은 특색있게 생기기도 했지만 그 얼굴에는 성실과 정직과 인자와 강한 의지가 동시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에는 고생과 눈물과 땀의 자국이 역력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관대함과 이해심과 통찰력까지도 지닌 얼굴입니다. 혹 성도 여러분 가운데 죄악의 세상가운데 살면서 삶에 찌들어 있는 얼굴 모습은 없습니까? 아니면 그런 가운데서도 천사의 얼굴을 이루어가는 자신의 모습인가요? 천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 장자권을 양도받고 눈이 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이 일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자, 어머니 리브가가 아들 둘을 한꺼번에 잃을 수 없다며 야곱을 멀리 하란 땅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시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지내며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형 에서의 원한이 풀어졌는지 몰라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형이 400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오는데, 자기를 죽이러 오는 지 살리러 오는지를 알 수 없어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세워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형님을 만나게 되는데, 원수로 대할까봐 걱정했던 형님은 동생과 형의 관계로 반갑게 만나서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창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에서라는 이름 자체가 “붉다”는 뜻이고 또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라 험상궂은 얼굴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동생 야곱이 볼 때 “하나님 얼굴을 본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하나님의 얼굴처럼 볼 수는 있습니다. 살기등등(殺氣騰騰)한 대적 앞에서도 스데반은 천사의 마음과 천사의 사랑을 지녔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천사의 얼굴로 나타나게 된 데는 첫째, 그가 은혜와 성령의 권능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산에서 내려올 때 그 얼굴의 광채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그를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마에 수건을 둘렀습니다. 이는 모세가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그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출34:30-35)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2. 마찬가지로 스데반도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혔으므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되며 큰 권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서 있었을 때, 세상의 권위가 능히 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행6:8-10)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성도는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충만하게 될 때, 성도로서의 성령의 권위를 세상 사람들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했습니다.

(행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스데반의 적대자들이 여럿임에도 불구하고 스데반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 것은 바로 그가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공회 앞에 끌려가게 될지라도 무슨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10:19-20)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히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스데반은 자신의 지혜를 통해 설교하거나 변론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말했으므로 그와 변론한 자들이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관한 한 박사라 할 수 있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대한 토론에서 참패를 당했다는 것은, 성경이 인간의 지혜로 해석되거나 가르쳐질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힘있게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3:14-17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아덴에서 자신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다가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전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즉 복음을 전도할 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습니다.

(고전2:1-2)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당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헬라 철학과 여러 가지 지혜들에 해박하며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하려고만 했다면 그의 박식한 철학적 논리로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삶만을 있는 그대로 전파하여야 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하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증거는 지식의 나열이나 매끄러운 설명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부패한 인간의 삶을 깨끗하고 영원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는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아무런 각색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특한 힘(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이성과 지성이 아닌 마음과 영에 호소함으로 그 사람의 가슴 속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에 호소하며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는 인간의 수식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에서 선포되어지고 세상에 전파되어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생명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복음의 대적들은 사도 바울을 경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후10: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바울은 작은 체구에 말솜씨는 졸렬했습니다. 그는 용기나 결단이 부족하지 않았고, 그의 대적들에 의해 흠잡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자들처럼 호언장담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에 충실한 사역자로서 두려움과 떨림을 지니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대적들이 두려워 떤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고 복음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전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위로써 전파했습니다. 즉,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성령이 전하는 대로 말씀을 전했고 그 진리를 나타내도록 성령의 역사에 맡겼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은 논리성이나 지식의 정도, 문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능력”임을 체험하고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 체험(간증)과 철학적 지혜로 설교하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쓰라린 전도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아덴에서 오직 한 번 기독교를 철학적인 말로 바꾸어 보려고 했습니다. 아덴의 말스 언덕에서 그는 철학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말과 용어들을 사용하며 그들이 인용하는 말을 자기도 인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행17:22-23)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17:32-33)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그러나 바울의 그러한 방식의 복음 전도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철학적인 설교는 전혀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전도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참된 것이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전하는 것이 가장 옳은 전도 방법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개종 체험과 전도 여행을 통해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 실제로는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뿐이며 성령의 지혜만이 완전하며 십자가를 온전히 의지할 때만이 복음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혜는 복음이며(고전2:6-9), 그 지혜의 근원은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고전2:10-16) 고린도 전서 2:6-16을 보겠습니다.

(고전2:6-16)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과 지식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실패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성령의 일(역사)을 거부하고 미련하게 여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증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뿐이었고 그것도 말재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복음을 전파할 때 “두려움과 떨림”으로 했습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사도 바울이 심히 떨었었다고 고백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아덴에서의 전도 실패와 유대인들의 훼방과 대적, 그리고 고린도인들의 철학적 사변과 교만한 태도, 도덕적 타락 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철학적 지혜와 사변(思辨)과 구변(口辯)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자신의 부족함으로 복음의 능력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할 때 복음 전도에 승리하게 됩니다.

3. 더 나아가 성령은 우리 자신의 성격까지도 개조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으로써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어 스데반의 모습처럼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작 “최후의 만찬”에 얽힌 일화입니다.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결심하고 유럽 일대를 돌아다니며 모델을 찾았습니다. 마침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얼굴을 지닌 사람을 만나게 되어 그를 모델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고는 돈을 주었습니다. 그 후에 열 한 제자의 얼굴은 모두 그렸는데 가롯 유다를 그리지 못해서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기 위해 10년을 헤맸습니다. 전유럽을 두루 다니던 중 어느 날 길가에서 술취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가롯 유다의 얼굴과 똑같이 생겼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와서 모델로 삼아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리고 그림을 마무리졌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다 빈치는 돈을 그 사람에게 주었으나 돈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돈은 이미 받았으니 안 줘도 됩니다.” 다 빈치는 놀랐습니다.  “언제 받았습니까?” “당신이 10년 전에 예수의 얼굴을 닮은 사람을 모델로 그린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삐에꼬로 단기멜렉이었지요.” “내가 바로 삐에꼬로 단기멜렉이오. 돈은 10년 전에 한번 받았으니 안 받겠소.” 다 빈치는 똑같은 사람을 한번은 그리스도의 얼굴로, 한번은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렸던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든 그 얼굴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그 마음에 은혜가 있을 때 그 얼굴이 예수님을 닮은 얼굴이 될 수도 있고, 그 마음이 약해지고 타락하고 썩어 버릴 때, 마치 가롯 유다의 얼굴처럼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사람의 피부는 4년마다 바뀐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예쁘게 보이려고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만 사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바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병들면 아무리 바른다 해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마음에 기쁨과 은혜와 빛이 있어야 얼굴도 빛이 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썩어가는데 어찌 그 얼굴을 빛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그에 따라 성품과 외모가 천사처럼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죄로 찌들거나 세상사로 병든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닮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反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병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에서 근처에 떨어진 포탄으로 말미암아 심한 화상을 입어 중태에 빠졌습니다. 그는 곧 본토의 재향군인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치료 끝에 다행히 그 병사는 완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흉칙할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기독교인인 성형외과 의사를 만나 상담하였습니다. 의사는 매우 희망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이전의 모습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혹시 당신 얼굴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진이 있어야 그대로 수술을 할 수 있지요.” “의사 선생님, 저의 얼굴은 굉장히 못생겼거든요.” 여기까지 말한 순간 병사는 우연히 의사의 진료실 벽에 걸려 있는 워너 솔맨이 그린 그리스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부탁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의 얼굴처럼 만들어 주시겠어요?” 의사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윽고 병사는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되었고 그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벽에 걸려 있는 솔맨의 그리스도상을 보며 그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이제 제 얼굴은 저 사람의 모습과 똑같아요.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군가요?” “저 그림 속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아, 그래요? 저도 그 분이 훌륭하신 분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러자 의사는 병사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 분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은 병사는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곧 구세주를 그의 삶 속으로 영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기쁨으로 충만해서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만들어 준 그 의사에게 달려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제 얼굴이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최선을 다하여 그 분처럼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는 성도로서 매우 불행한 일인데도 많은 성도들이 그 불행을 느끼지 못하므로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같은 변화는 우리 자신의 힘이나 의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결국 기독교도 다른 여러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수양의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데반과 같이 변화된 모습을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변화된 모습을 지닐 수 있습니다. 사람은 훈련이나 교육을 통해서 좀 더 고상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는 있으나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는 결코 변화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천주교 교인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개종자들을 얻은 매콜(R.W.McAll)은 신앙심이 두터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매콜이 파리에서 죽었을 때 전에 무정부주의자였던 한 노동자가 매콜의 관 옆에서 몹시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당신은 이 사람의 친척입니까?” 라고 묻자 그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 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분이 당신에게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얼굴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매콜의 얼굴이 예수님의 구원을 말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권능, 그리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하는 천사의 얼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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