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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창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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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창세기40;1-23(201004)

 


 


참 좋은 일


 


어떤 분이 “어제는 지나갔기 때문에 좋고, 내일은 올 것이기 때문에 좋고, 오늘은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습니다.


나는 어제를 아쉬워하거나 내일을 염려하기보다는 주어진 오늘을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오늘 안에 있는 좋은 것을 찾고 받아들이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새로운 아침이 주어지는 것은 새로운 기회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안에 있는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루가 좋아지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어제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리라는 마음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건 어떤 일이건 항상 좋은 일이라고 고백하며 살면 좋지 않은 일들도 좋은 일들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면 좋은 것들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가득 채워지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복음으로 채워지면 좋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P4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10년 동안 종살이에서부터 가정 총무로 살았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이루셔야 할 구원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보디발 부인의 욕정을 사용하여 요셉을 감옥에 갇히게 하신다.


감옥도 다른 곳에 있는 감옥이 아니라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이다.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은 왕의 죄수들 곧 정치범들이 갇히는 감옥이다.


요셉은 정치범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범들이 갇히는 감옥에 갇혀야 할 이유가 없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었다는 죄목, 성폭행범, 성추행범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죄를 범한 종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혀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도 요셉은 정치범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힌 것이다.


요셉이 감옥에 갇힐 만한 죄가 있어서 갇힌 것도 아니다.


주인의 아내가 벌인 욕정에 맞추어주지 않았다는 괘심죄에 걸려서 성폭행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것이다.


어쩌면 요셉은 억울해도 한참이나 억울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요셉의 결백이 밝혀졌으면 감옥에서 석방시켜 주어야 정상인데, 어느 누구도 요셉을 석방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감옥에서 새로운 일을 시킨다.


왜 그러는 것일까?


왜 석방시키지 않고 계속 감옥살이시키면서 또 다른 일까지 시키는 것일까?


 


D4.


 


① 궁궐 안에서 사건을 일으키도록 하시는 하나님.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바로 궁에서는 모종의 사건이 발생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로가 크게 진노하면서 중요 직책에 있는 두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1절에 보면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로 왕이 진노하면서 두 관원을 감옥에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왕이 마시는 술과 왕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라면 이들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살았던 관리라고 할 수 있다.


왕이 먹고 마시는 음식에 관한 것처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왕이 먹고 마시는 음식은 왕의 신변에도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살았었지만, 왕의 진노로 보디발의 집에 있는 정치범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간수장이는 요셉에게 두 관원을 잘 보필하도록 새로운 직책을 맡긴다.


 


왕궁에서 일어난 사건과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이 바로 왕의 친위대장의 집에 있는 감옥이기 때문에 왕궁에서 일어난 사건과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이랑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직간접으로 우리들의 삶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지 않는 한 직접적으로 우리들이랑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들이 직접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삶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에는 우리들이랑 전혀 관계가 없는 곳에서 어떤 사건이 터졌는데, 그 불꽃이 우리들에게까지 튀는 경우가 많다.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것은 나비의 날개짓처럼 작은 움직임이 폭풍우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오늘 대전에서 공기를 살랑이게 한 나비의 날개짓이 다음 달에 중국에 있는 북경이나 일본에 있는 동경에 폭풍우를 몰아치게 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전과 중국의 북경이나 일본의 동경과는 거리도 멀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는 좋은 영향이든, 좋지 않은 영향이든 서로 어떤 모습으로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요셉의 삶이 보디발의 집에도, 감옥에서도 좋은 영향력으로 남았던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력이 되어서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②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감옥에 갇힌 두 관원에게 스스로 풀어낼 수 없는 꿈을 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꼭 사용해야 할 이방인들에게 꿈으로 찾아와 주시고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방인들은 본래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찾아와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찾아와서 역사해 주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꿈에 찾아와서 꿈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사역을 추진하기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시면 이방인이건, 신앙인이건 가리지 않고 꿈을 꾸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추진해 나가시는 사역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히 역사해 가신다.


 


두 관원은 같은 날에 의미심장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 꿈인 것인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어떤 의미가 담긴 꿈인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꾼 꿈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 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꾼 꿈이 분명히 어떤 의도가 담겨진 꿈인 것은 분명한데, 그 꿈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꿈을 꾸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두 관원이 느끼는 근심은 곧 얼굴에 나타난다.


요셉은 그들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라고 하면서 묻는다.


그들은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라고 하면서 말한다.


요셉은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라고 하면서 자신이 꿈을 해석해 드리겠노라고 말한다.


먼저 술 맡은 관원이 ‘밑져 봐야 본전 아니겠나?’ 하는 심정으로 별로 기대도 하지 않고 자신이 꾸었던 꿈을 이야기한다.


술 맡은 관원은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라고 하면서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한다.


술 맡은 관원의 말을 들은 요셉은 곧바로 해석해 준다.


요셉은 그에게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라고 하면서 곧 복직될 것이라고 해석해 준다.


요셉이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는 것을 떡 맡은 관원이 같이 들으면서 ‘그럴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떡 맡은 관원은 요셉에게 자신의 꿈도 해석해 달라고 한다.


떡 맡은 관원은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라고 하면서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한다.


떡 맡은 관원의 꿈을 들은 요셉은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라고 하면서 바로 왕이 처형시킬 것이라고 해석해 준다.


요셉이 해석해 준 대로 3일 후에는 바로의 생일이다.


생일날을 맞이하여 바로 왕은 술 맡은 관원에게는 특사시켜주면서 복직시켜 준다.


그런가 하면 떡 맡은 관원에게는 사형장으로 끌고 가서 처형시킨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세계를 펼쳐가시기 위해서 주시는 꿈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지혜만이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꿈해몽가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해석해 준다 해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주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꿈을 해석해 줄 수 없다.


세상이 주는 꿈은 세상의 원리를 따라서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


세상에는 꿈해몽가들이 아주 많다.


흔히 철학관이라는 이름으로 성행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꿈을 해석하는 원리에 따라서 꿈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세상의 원리를 따라서 해석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와 지혜로 해석할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꿈을 해석해 달라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미심장한 꿈을 주셨다는 감동이 들게 되면 오직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도록, 꿈의 의미를 깨우쳐 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


괜히 꿈해몽가를 찾아간다고 하면서 사탄의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꿈을 해석하는 원리는 사탄의 소리에 따라서 꿈을 해석해 주는 것이다.


장난삼아서라도, 재미로라도 그들을 찾아가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갔다가 사탄의 영에 빠져들게 되고, 사탄의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사탄의 소리가 우리들의 영을 망가뜨리게 된다.


흔히 예언해 준다는 이상한 기도원을 찾아가서도 안 된다.


이상한 사람들에게 예언기도를 받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꿈을 풀어준다고 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엉뚱한 짓거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예언가들이 다 그런 것들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한 예수점쟁이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오직 삼위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 66권에서 가르치고 전하시는 말씀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③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하시는 하나님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복직이 되거들랑 바로 왕에게 잘 말씀드려서 자신을 석방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석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다시 왕궁에서 술 맡은 직으로 복직된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요셉의 부탁을 기억하면서 바로 왕에게 청원하여 요셉의 부탁을 들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야속하게도 관원은 까마득히 요셉을 잊어버린다.


23절에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까마득히 잊어버렸을까?


만약에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리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바로 왕에게 청원하여 요셉을 감옥에서 석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은 본래 보디발의 집에 거주하는 종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다시 종의 신분으로 회복될 수도 있다.


요셉이 종의 신분으로 회복되면 다시 가정 총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다른 종이 가정 총무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요셉은 다시 다른 종들처럼 힘든 노예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다시 보디발 부인의 끊임없는 유혹을 받거나 모함을 받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요셉이 감옥에서 석방 되어지고, 바로의 특혜로 보디발의 집에서도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요셉이 다시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거나 석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미리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목적이 사라지고 만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해 주신 말씀을 요셉을 발판으로 이루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13-14의 말씀에서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라고 하신 언약의 말씀을 성취해 나가시기 위하여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노예로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고,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식솔들을 애굽으로 보내서 400년 동안 살다가 4대 후손을 통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구원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술 맡은 관원의 뇌리에 깊이 간직하도록 하시고는 일시적으로 요셉에 관하여 까마득히 잊어버리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요셉이나 술 맡은 관원에게나 한동안은 꿈에 대해서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다.


만약에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기억하면서 요셉을 구출하기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여 요셉이 석방받고 어디론가 가버렸다면, 41장에서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애굽에 있는 모든 학사, 박사, 전문가, 점술가들 중에서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기억하면서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하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차근차근히 성취되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초점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감옥살이를 더 하게 만드시고, 술 맡은 관원에게는 기억력을 잊어버리도록 역사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초점은 인간의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초점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과 의지와 주권을 따라서 구원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요셉의 삶을 힘들게도 만들고, 형통하게도 만들고, 감옥에도 보내고, 석방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그대로 감옥살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요셉이 감옥에 그대로 머물러야 하는 이유, 요셉이 계속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이유는 전폭적인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추진해 나가시는 구원의 세계를 이루어가기 위한 발판이요 초석을 놓는 것이다.


 


L4 & B4


 


우리 신앙인들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만 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머물고 싶지도 않고, 머물수록 더 안 좋은 일들만 생겨나는 곳이 있지는 않는가?


더 이상 머물고 싶지도 않고 계속 좋지 않은 일들만 생겨나는데, 아무리 떠나려고 노력해도 떠나지 못하는 곳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떠나려고 발버둥 쳐 봐도 떠날 수 없는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만 되는 곳이 있을 수 있다.


머물면 머물수록 싫어지고 좋지 않은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떠날 수 없다면, 그래서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면, 거기를 향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뜻과 의지가 있지 않을까?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다른 종들처럼, 다른 죄수들처럼 힘들게 살지는 않았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종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가정총무로서 오히려 다른 종들을 거느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감옥에서는 다른 죄수를 케어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다른 종들이나 죄수들처럼 힘들지 않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셉은 보디발의 집과 감옥은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다.


요셉은 자유인으로 마음껏 살고 싶다.


요셉은 어디서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아서, 종살이를 해야 하고, 감옥살이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온갖 무시와 멸시를 당하면서 인격 유린을 당하고 있는 직장, 지긋지긋한 직장을 떠나서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하는 직장들인도 부지기수로 많다.


목사님들 중에는 지금 사역하고 있는 사역 처소를 사임하고 다른 임지로 옮기거나 교회를 개척하여 마음껏 사역하고 싶어하시는 목사님들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있는 곳이 지옥같이 힘들고 어려운 곳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지금의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곳에서 더 머물러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① 동서남북이 꽉꽉 막혀 있는 것같은 답답함 속에서도 유일하게 뚫려 있는 하늘을 바라봐야 한다.


 


곧 하늘에 뚫려 있는 곳을 향하여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진정한 뜻과 의지를 보여달라고, 깨달을 수 있는 영성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금 겪고 있는 온갖 갈등과 고민과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②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나 요셉을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도록 놔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나 요셉을 감옥살이하도록 붙잡아놓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종살이에서 나오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감옥에서 나오게 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때가 분명히 있다.


지금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의 삶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지금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다고 해서,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고 계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에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서 힘들고 어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음을 믿음으로 붙잡고 믿음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서민들이 느끼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꼴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라는 믿음으로 순간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조금만 더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겨내면서 잘 극복해 나가야 한다.


분명히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도 곧 끝나게 될 것이다.


올해가 다 지나가더라도 언젠가는 끝나게 될 것이다.


중세시대에 유럽에 불어닥친 흑사병, 페스트병은 장장 3년 동안 유럽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언제 흑사병이 끝날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루했던 흑사병도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지금 온 지구촌을 고통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도 곧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전문가들은 백신이 11월에 출시하여 백신주사를 맞기 시작하더라도 전 지구촌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종식되려고 하면 아마도 내년 2021년 말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한 구원의 손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만 더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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