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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도입니까? (살전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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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도입니까?(살전1:1-10)


 


양승훈 교수가 쓴 <물에 빠져 죽은 오리>라는 책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한 분이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산에 있는 회사의 부품 창고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일거리는 많지 않았고 시간도 있어서 창고 옆에 사육장을 만들어 양계장에서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서 넣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육장에 가보니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물속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오리를 이리 저리 뒤척여 보았지만 짐승에게 물린 흔적이 없었습니다.


오리가 물에 빠져죽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양계장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자 주인이 이런 설명을 합니다.


“이 오리는 양계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여서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물속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서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원래 오리는 날개 밑에 방수기름이 나오는 샘이 있어서 수시로 날개와 털에 바르고 그래서 오리가 물속에 들어가도 털이 물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물위를 떠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져 죽은 오리는 물에서 자라지 못하고 땅위에서 주인이 주는 사료를 먹고 자랐습니다.


기름을 바를 필요고 없었고 수영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기에 오리인데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오리’ 이야기는 우리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어쩌면 그 오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우리 교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오리임에도 실제로는 수영도 못하고 물위에 뜰 수도 없는 오리처럼,


겉모습은 그리스도인인데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지 못하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공부하고 여러 가지 직분도 받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교회의 모습은 크고 넓고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손가락질 당하는 교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성도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에 이와 정반대의 교회가 나오는데요, 바로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오래되지도 않았고, 성도도 많지 않았고, 건물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가지고 전도를 해서 세운 데살로니가교회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모든 믿는 자의 모범이 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 했고요,


7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했던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했고 감사하게 했고 자랑스럽게 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사도 바울은 큰 보람을 느꼈고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누군가에게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과 보람을 주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 마다 흐뭇해하시며 내가 자식 하나는 잘 키웠다. 잘 커줘서 고맙고 감사하다. 그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자녀들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늘 지켜보고 기도하고 있는 전도자나, 여러분들을 신앙으로 지도하고 위하여 늘 기도하는 신앙의 지도자들에게 큰 감사와 행복을 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사람에게 인정받을 때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떤 모습을 보였기에 그렇게 사도 바울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기쁨과 감사와 보람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3절 말씀을 보면,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했습니다.


 


먼저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역사라는 것은 History가 아니라 Work를 말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믿음의 활동, 믿음의 행위, 믿음으로 행한 일 등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행위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매주일 시간을 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의 증거요 행위요 활동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새벽마다 저녁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면 나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항상 기도하게 되어있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헌신하며 충성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 귀한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겠으며 시간과 정성을 다해 주님께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는 무엇이었을까요?


먼저는, 환난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일입니다.(6절)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환난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칼을 던지러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과 환난을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믿음의 삶에 동반되는 필수적인 요소가 환난입니다.


여러분, 환난 속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요 역사의 주관자요 섭리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가진 자는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난가운데서도 믿음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놓치지 않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은 우상을 버리는 일에서 증거가 됩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지금까지 섬겼던 우상들을 다 던져버렸다는 것에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믿음은 어떤 것에서 증거가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고 여러분들이 내놓을 수 있는 어떤 활동과 행동이 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11:1)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실상과 증거가 분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은 바로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처럼(고전13:1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 제일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세 가지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믿음 소망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근본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바탕으로 지어진 찬송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고 있고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오해하면서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내가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 소망의 사람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은 절대 말이 아니고 생각이 아니고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이요 수고요 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입으로 하려고 하고 생각으로 하려고 하고 찬양으로 하려고 합니다.


수고 없는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인도의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겠다.’는 참으로 안타까운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의 수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미국에 있는 한 무명의 사업가는 30년 동안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길거리로 나가서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있다고 합니다.


돈을 나눠주면서 “누가 당신에게 이 돈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라져버립니다.


그가 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은 30년 전의 일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는 너무나 춥고 배가 고파서 마지막 남은 돈으로 아침을 사먹고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20달러짜리 돈을 떨어트리고 그것을 주워서 “젊은이 이 돈이 여기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자네 것인가 보네”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청년은 그 고마움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후에 사업가가 된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수천달러를 들고 길거리로 나가 가난하고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 없는 사랑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수고가 있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 사랑만이 감동을 주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소망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모든 믿는 자의 모범이 되었던 신앙은 소망의 인내였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다시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소망을 가지며 그 소망가운데 인내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이 아름다운 신앙의 모범이었습니다.


소망은 어떤 것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자는 참고 인내하게 됩니다.


소망이 있다고 하면서도 인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소망은 어떤 환경과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소망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한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하고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그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리라고 사료됩니다.


먼저는, 1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방주를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높은 산에다 방주를 짓는 비상식적인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비방과 조롱을 당했겠습니까?


정신병자니 신앙에 미친 사람이니 바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방주를 짓는 일에 제대로 협조를 했겠습니까?


그런 어려움 속에서 노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홍수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때에 내가 이 방주를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며 방주를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소망이 없었다면 그래서 인내하지 않았다면 방주는 결코 지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다시 오시고 다시 오시면 주님과 함께 영생의 삶을 살게 된다는 믿음을 가진 자인 줄 믿습니다.


그 믿음과 소망을 갖고 사시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삶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고 곁길로 가게하고 비방 받고 조롱받는 삶이 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참고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옳은 자요, 바른 길을 가는 자요, 정신을 차린 자요, 가장 지혜로운 자요, 최후에 승리하는 자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설득력이 없는 것은 바로 열매가 없는 빈껍데기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와 수고와 인내를 보여주지 못하고 말로만 입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없고 신앙의 모양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물에 빠져 죽은 오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양계장에서 양육 받는 오리처럼 안일과 나태함과 적당함에 빠져 되는대로 살 때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지 못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맛 잃은 소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만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의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소망 사랑과 함께 역사 수고 인내를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할 때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가 되고 감동을 주는 종교가 될 수 있고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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