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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 (갈5:16-26)

본문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9월 달에는 창세기 1장 1절을 암송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에 힘입어, 특별히 회복과 치유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 주에는, 내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돌아서는 시점에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 앞에 서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둘째 주에는 질병의 고통, 삶의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버티고,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주님과 나, 단 둘만 남는 만남의 상황을 만들라는 말씀을 드렸고, 셋째 주에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용서의 능력을 공급 받아, 나도 모든 사람을 능히 용서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살자는 말씀을 드렸고,


넷째 주에는, 치료 받고 회복 된 후에 그 은혜를 저버리고 감사하지 않는 옛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10월의 암송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 말씀으로, 우리가 너무 많이 듣고, 잘 알고 있는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 외울 때, “사, 희, 화, 오, 자, 양, 충, 온, 절” 이런 식으로 압축해서 많이들 암송하셨을 겁니다. 10월에는 이 말씀 열심히 외우시고, 깊이 묵상하는 시간도 갖으시고, 성령과 관련된 찬양도 많이 들으시는 가운데,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하여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어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책에서 오늘 본문 말씀 위쪽에 제목을 붙여 놓은 것을 보시면,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육체와 영”을 대비해서 말씀 하는 구절이 1절에서 17절 까지 나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두 군데 모두 성령이 오신 이후 우리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좋은 방향이 어딘지는 알겠지만, 인간의 나약한 의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조금 넓게 보겠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실까요? ① 가장 먼저는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②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께서 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가 됨을 믿고 고백하게 역사 하셔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③ 마지막으로는 죄가 죄 됨을 알게 하셔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죄를 짓더라도 속히 돌이켜 회개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일하심을 크게 나누어 본 것이고, 사실 성령님은 참 세밀하시고, 다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시고 동행동사 하시면서,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감찰하시고, 인생길을 상담해 주시고, 의의 길로 잘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있을 때에만 보호 받고, 자라나고, 인도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서 성령이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시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우리의 연약함, 나약한 의지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상태를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 합니다.


 


흔히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는데, 성령 충만이 마치 빈 그릇에 물을 담듯 무언가를 채우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동안 많이 들어오셨겠지만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령 충만은, 나의 생각, 나의 의지, 나의 말, 나의 행동 등, 나의 모든 전 인격적인 움직임 전체를 나보다 말할 수 없이 뛰어나고, 능력이 많으신 성령 하나님께 온전하게, 모든 것을 맡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완전히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면, 가라고 하는 곳으로만 가기를 즐겨하고, 하라고 하는 행동만 하고, 주어진 말만 절제해서 발언을 합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씀 드리면, 가지 말라는 곳에는 절대 가지 않고, 하지 말라는 행동은 두 눈 딱 감고 즉시 멈추고, 하지 말라는 말은 단 한 마디 입도 벙긋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지 안 한지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삶의 태도와 언행, 이것을 곧 “삶” 이라고 하는데, 삶의 면면을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금세 표시가 납니다. 외식한다고 많이 혼이 난 바리새인은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말을 잘하는 성경 해석자들이었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 어디에서도, 성령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다 자기 주장, 자기 고집, 자기 관행들을 들먹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 만만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들이 곧 열매 맺은 나무이고, 다듬어져 가는 완성품이라는 대단한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떠신가요.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여러분은 성령 충만 하신 상태이신가요? 아니면 성령을 소멸시키고 근심 시키고 있는 중이신가요? 신앙생활은 성령이 나를 통해 얼마만큼 일하시도록, 마음껏 내 마음과 육체를 맡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나옵니다. 성령이 마음껏 일하시도록 온전하게 맡길 때에, 비로소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들이 맺어지게 됩니다.


 


곧 성령의 열매는, 내가 무엇을 해서 뚝딱 얻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성령이 나를 통해 일하신 것이 뚜렷하게 드러날 때, 만인 앞에 드러납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면 누구라도 그 모습, 상태를 확인 가능 합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가 맺었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성령의 열매들은 가짜이고,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가고, “사.희.화.오.자.양.충.온.절”,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 싫어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고 싶어 하는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를 방해하고 넘어트리려는 방해 공작도 그만큼 강도가 세집니다.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 열심을 내면, 성령의 열매가 많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걸려 넘어트리려는 어둠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이전보다 더 상황이 나빠지기도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내면에서는 빛과 어둠, 육체와 성령이 엄청난 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시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로마서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아멘.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조차도 자기 내면에서 성령과 육체가 싸울 때, 이겨내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이겨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 내면에서 성령이 말씀하시고, 안내하시고, 길을 보여 주어도, 연약한 인간 들은 사탄이 주는 유혹을 덥석 덥석 붙잡고, 죄의 길을 선택하기를 너무나도 쉽게 해 버립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가장 기뻐하시는 순종의 모습이지만, 사탄의 입장에서는 가장 질투 나고, 빼앗고 싶은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예수님을 고백하면 할수록, 성령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사탄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가합니다.


 


그 큰일을 감당했던 사도 바울이, 얼마나 큰 내적 공격에 시달렸을지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사도 바울 만큼 신앙의 진보를 이루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도 힘들어 했는데, 내가 어찌 큰일을 감당하면서, 육체의 소욕을 물리치고, 성령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지경인데 앞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성령을 열매들을 하나라도 맺어 갈 수 있겠는가? 지레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발버둥 치고 방해 공작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그 사탄의 방해공작을 완전하게 파괴하고, 완벽하게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승리의 권세아래 있는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육체적인 욕구가 강해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승리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권세를 힘입어 성령 충만함을 이루어 가려고 죄와 유혹에 맞서 당당히 싸운다면, 반드시 우리에게도 승리의 순간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해봐야 안 되는 그림의 떡을 그려놓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모든 이가 그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을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희망이 있음을 우리 에게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성령 충만이 도대체 이루어질 것 같이 않을 만큼 신상 상태가 좋지 않으신가요? 그렇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금이 좋은 기회입니다. 사탄이 잠시 육체의 소욕으로 우리를 강하게 밀어 붙인다고 하여도, 사도 바울이 외쳤던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자신의 연약함을 한탄하고, 가슴을 치면서, 이미 완벽하게 승리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더 크게, 더 세게 목 놓아 부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끊어 낼 수 없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안아 주셔서, 다시 불 같이 일어날 수 성령 충만으로 역사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본문 19-21절은 육체의 일을, 22~24절은 성령의 일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두 가지 갈래의 결말이 너무나 뚜렷하죠. 육체의 일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잘 읽어 보시고, 이러한 육체의 일들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해서, 자꾸 내 생각대로 선택하고 살아가다 보면,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하겠구나, 심각한 위기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을 따라가면, 23절에, “이 같은 법을 금지할 법은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가는 선택과 행동에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성령을 구하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데로 따라가기로 작정하고, 결단하고, 한 주간 그러한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성령의 강력한 권능아래 보호 받으며, 많은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싶으시죠?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고 싶으시죠? 아멘입니다. 그러시다면, 오늘 말씀의 24, 25절을 보시면서 두 가지를 꼭 기억하시오.


 


  첫째, 24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일을 거스르는 나의 육체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서 완전히 죽었다는 태도와 자세, 이것이 제대로 선행 되고 고백 되어질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우리 주님의 고귀하신 죽음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죽은 몸이기 때문에,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의 충만 함을 구하는 것만이,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25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 말씀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왜 어렵고 부담이 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까?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 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보다 더 단순 명료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해 주는 말씀이 또 이을까요?


 


제가 단언컨대, 성령으로 살지 않는 모든 것은 100% 다 헛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고, 칭찬하시도 않고, 결정적으로는 하나도 기억하시도 않으십니다. “사.희.화.오.자.양.충.온.절”, 왜 이런 성령의 열매들을 알려 주셨습니까? 이런 열매들이 우리의 인생의 결과물들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을 마지막 심판 날에 반드시 헤아려 보시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잘 안다. 내가 너를 인정한다는 말씀과,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 내가 너를 부인한다”라고 하시는 마지막 결정의 말씀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으로 살았으면서, 성령으로 행한 내용물들을 보시고 판단하시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있으니 성령을 받았을 것이고, 성령을 받은 믿음이라면, 곧 성령대로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과 성령으로 행하라는 것은 같은 의미 선상에 있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은, 그것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열매 저 열매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함의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라도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우리 육체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서, 이제는 죽은 육체로 살지 말고, 살아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권세 있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이 당장 얼마나 있을까? 마지막에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맺을 수 있을까? 너무 앞서 가서 이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에, 내 안에서 싸우고 있는 성령의 편에 서기로 새롭게 결단 하십시오. 그리고 그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루하루 묵묵히 나아가다 보면, 내 자신도 놀랄 만큼 엄청난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00교회의 모든 성도가 9월 한 달 동안 성령을 구하시고, 성령에 맡기시고, 육체의 일이 아닌 성령의 일하심을 따라 말하시고, 움직이시면서, 우리 주님의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기억하시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수확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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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연약함을 돌보시고, 육체의 일은 버리게 하시며, 오직 성령의 일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릴 수 있도록 강권적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성령을 보내 주시고, 성령으로 일하도록 은혜 내려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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