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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대까지의 은혜 (신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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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대까지의 은혜 /신5:7-11, 살후2:16-17



 



필라델피아에 백만장자 ‘스티브 지라드’씨는 어느 토요일에 자기 직원들에게 내일은 원칙적으로 쉬는 일요일이지만 방금 도착한 선박의 짐을 풀어야 하기에 내일은 모두들 나와서 일을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사장님 저는 내일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나올 수 없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그러면 내일부터 일하러 나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주인에게 자기의 형편을 말하면서 사정을 했습니다. "사장님, 저에게는 병든 홀어머니가 계시고 일을 하지 않으면 끼니를 잇지 못합니다. 계속 일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년은 애원했습니다. 청년의 애원을 듣고 난 주인은 "여보게 청년!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게. 교회 한번쯤 빠지는 것이 중요한가? 열심히 일해서 홀어머니를 잘 모시는 것이 중요한가?" 라고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 청년은 말하기를 "저는 어머니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날 밤에 그 청년은 주인 ‘지라드’씨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금보다 두 배의 월급을 줄 것이니 이제는 노동일을 하지 말고 재정부에서 모든 재정을 맡아 관리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청년의 모습에서 저 청년에게 무엇을 맡겨도 되겠다는 믿음이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천대까지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신약 본문 살후2:16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을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우리를 선택하여 불러주시고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하늘 기업의 후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아버지의 독생자를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내어주는 특별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요일4:9-11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달리신 십자가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최고의 사랑을 은혜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을 외면하거나 감사하지 못한다면 좋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만두집을 운영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만두를 만들었습니다. 최고의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기술과 정성으로 만두를 빚었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만두를 좋아하기에 만두를 먹겠다면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만두를 좋아하는 딸이 만두를 가지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권사님은 정성껏 만두를 만들어 포장을 해놓았습니다. 잠시 후 딸이 만두를 가져가며 “엄마! 이 만두 팔다가 남은 거지?”라며 “팔다가 남은 거 맞죠? 찌꺼기 남은 것 모아서 주는 거지요?”라고 말합니다. 권사님은 그 말이 섭섭하게 느껴졌습니다. 딸이 온다고 다른 때보다 더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두를 만들었는데 ‘먹다 남은 거죠?’라는 말에 너무도 서운한 나머지 푸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푸념을 하다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과 최상의 것을 주시는데 나는 하나님께 불평한 적은 없었는가? 왜 하나님이 내게 더 놀라운 복을 주시지 않으시냐고, 왜 나에게 좀 더 놀라운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냐고, 왜 더 큰 사랑을 주시지 않으시냐고 불평하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딸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투정했던 자신을 보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의 사랑임을 알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2)위로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16절에 ‘영원한 위로와’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시련을 겪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뜻하지 않던 고난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난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겸손하게 하시고, 새 힘을 주시며, 위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위로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무엇인가 이루어 보겠다고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멈추고 뒤돌아보니 ‘내가 그동안 무얼 했지? 무얼 하고 살았지?’라는 허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때로 앞길이 막막하고, 불안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하면서 마음마저 지치고, 우울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때, 주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때로 음성으로, 때로 깨닫는 마음으로, 때로 사람들을 통해서, 때로 환경을 통해서, 때로 꿈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십니다. 지난 주간 99세 되신 어머님 장례를 치르면서 코로나 19로 인한 어려운 사회적 여건 등 염려가 없지 않았지만 그런 중에도 여러모로 은혜롭게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를 느끼면서 가족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어머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환송해 드렸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과 박해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까?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가 늘 함께 했음을 그가 기록한 서신서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고후1:3-5에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3)좋은 소망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16절에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했는데, 여기의 ‘좋은 소망’은 원어로 ‘엘피다 아가덴’인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악으로 끌고 가는 미혹된 영이 주는 환상과는 전혀 다른 소망입니다. 좋은 소망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기초한 참된 소망을 말합니다. 세상에 변하고, 썩고, 없어지는 소망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고,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견고하고 확실한 하늘 소망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에도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게 만드는 소망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서, 루스드라에서, 감옥에서, 아드리아 바다에서 유라굴로의 큰 풍랑 중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 주시는 주님만 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지 헨델 (Georg, Friedrich Händel)은 후기 바로크 음악의 거장입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공연장에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공연을 방해하였습니다. 헨델은 충격을 받고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쳐보려고 애를 썼으나 도리어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돈마저 다 떨어지고 부채까지 껴안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설상가상 빚쟁이들이 그를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헨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어느 시인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부활시켜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지세요.”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헨델은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하다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비록 육체와 주위를 둘러싼 환경은 절망적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으로 영혼과 심령이 채워졌습니다. 그 후 23일 동안 금식하며 오라토리오를 완성하게 됩니다. 자신이 만난 소망의 하나님을 찬양한 곡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소망을 얻게 된 헨델은 절망의 자리에서도 평안을 얻을 수 있었고 ‘메시야’라는 대곡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소망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2.천 대까지 대대로 하나님의 은혜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구약 본문 신5:7-10에 보면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대대로 은혜 받는 비결을 보게 되는데,


1)먼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것입니다.


‘나 외에는 위하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했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며 섬겨야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생활을 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란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 속에서 양심과 욕심이 싸울 때가 있습니다. 욕심은 우리 속에서 충동하기를 아무 것도 볼 것 없이 거저 욕심대로 하라고 하고, 신앙 양심은 우리 속에서 믿는 자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책망합니다. 우리는 이때 양심의 요구보다는 욕심이 원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결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많은 경우 스스로 양심을 달래면서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좋은 성도는 항상 하나님 제일주의를 선택하며 삽니다. *노아가 그 믿음으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물리치고 방주를 예비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이성의 유혹을 받았을 때 그 믿음으로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생활에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자들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서구적인 형태의 인류 최초의 대학, 유럽 최초의 대학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국립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대학은 본래 1088년 교회법과 로마법을 가르쳐 교회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법과대학으로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로 불리워저 오늘의 ‘University’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 대학의 하루는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믿었고, 교육은 결코 지식의 전수만이 아닌 태도와 인격의 형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와 인격의 형성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볼로냐 대학에 남아있는 문헌에 의하면 이 대학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학교생활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부모와 학생들의 서약을 받고 학생들의 입학을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육 정신의 기원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십계명의 교훈은 학교생활의 중심이었고, 가정생활의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2)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너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하고, 주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야 할 주의 백성들이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산다면 실상은 우상을 섬기며 사는 자의 모습이요, 자기를 위해 바벨탑을 쌓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고래잡이 선장이 뉴잉글랜드 교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어떤 사람이 그 선장에게 묻기를, “이 예배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 선장은 대답하기를 “아무 인상도 못 받았습니다. 교인들이 찬송을 하고,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저는 어디 가서 또 고래를 잡을 것인가 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자기중심 예배가 어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또 본문11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낮추는 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높이는 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나로 인하여 높아지고, 영화롭게 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가진 부모가 죽고 싶은 심정을 가질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자녀가 그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부끄럽게 할 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녀가 부모의 이름을 높이며 영화롭게 할 때는 자식을 키운 보람, 삶에 보람을 가지며 아무리 힘들어도 자랑스럽게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녀에게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주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자들에게 같은 마음으로 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자자손손에게 이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이웃 사람들과 더불어 살 때에 주님의 이름이 찬양받게, 영광을 받게 삽시다.


3)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1, 2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려 천 대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천대까지 복 주시겠다는 것은 영원히 복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난도, 질병도, 고통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는 세상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결국 잘 되는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천국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복 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좋은 신앙의 전수자가 됩니다. 돈, 명예, 권세와 같은 유산은 자녀를 영원히 지켜주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재벌 2세나 지도층의 자녀들이 잘못된 유산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까? 그러기에 디모데의 외조모와 어머니처럼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디모데가 하나님과 바울에게 인정받은 것은 전수된 믿음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다른 것 못 해주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제일 중요한 신앙전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자녀들에게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신앙,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광 돌리는 신앙,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신앙의 유산을 남김으로,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는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천대까지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을 부어주시는 은혜, 2)위로의 은혜, 3)좋은 소망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 천 대까지 대대로 하나님의 은혜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1)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것, 2)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 3)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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