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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돌보기~~~ (신2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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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돌보기~~~ (신명기 24:10~22)


 


우리나라는 지난 3월 25일부터 ‘민식이법’ 이라는 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에서의 운전과실 책임을 엄중하게 다루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선진 국가들은 스쿨존에서 과속하거나 교통사고를 내면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 제도를 오래 전부터 실시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안전하게 돌보려는 약자보호법입니다.


 


어린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미래희망입니다. 우리 지구촌교회는 어린아이들이 많아, 미래희망의 놀라운 복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그 복이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의 〈습관의 문법〉이라는 책에서 매우 재미있는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영국 심리학자 Richard Wiseman은 거리 곳곳에 지갑 240개를 떨어뜨려 두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실험을 했습니다. 지갑에 현금은 없이 개인적인 사진, 신분증, 기한이 지난 복권, 회원증 한두 장, 그 밖의 자잘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는데, 지갑마다 다른 것은 사진이었습니다.


각 지갑마다 노부부의 사진, 가족사진, 강아지 사진, 아기 사진을 넣어두었으며, 사진이 없는 지갑도 있었습니다.


실험 결과 지갑의 회수율에 엄청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아무런 사진이 들어 있지 않은 지갑의 회수율은 15%, 노부부의 사진이 들어 있는 지갑의 회수율은 25%,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지갑의 회수율은 48%, 강아지 사진이 들어 있는 지갑의 회수율은 53%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기 사진이 들어 있는 지갑의 회수율은 88퍼센트였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길에서 지갑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의 의식은 ‘지갑을 주인에게 찾아주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따져볼 때 귀찮은 일이다.’라고 여겨 지갑을 돌려주는 일을 망설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아기의 사진을 보는 순간 지갑주인을 향한 온정이 느껴져서 기꺼이 돌려주려는 무의식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강아지도 어린아이 다음으로 온정의 대상인데요, 강아지와 아기는 눈이 크고 입이 작으며, 연약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본인이 번거로운 수고를 하면서라도 지갑을 돌려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자를 돌보려는 긍휼의 마음, 측은지심이 잠재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모두 다 묵묵하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어린 아기의 등장 하나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바뀝니다. ‘얘기야, 안녕, 참 예쁘다, 귀엽다. 으르르 까꿍 ~’


 


그러므로 지갑에 웃는 아기 사진 한 장쯤은 넣고 다니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요즘은 스마트 폰이 지갑을 대체한 만큼, 바탕화면을 아기 사진으로 바꾸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의도에 모이기만 하면 싸움질이 잦은 국회의사당 회의장 벽면을 아기 사진으로 도배하는 건 어떨지요.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어린 아기 모세가 나일 강물에 떠내려갈 때 바로 왕실의 공주가 측은지심으로 건져주고, 자기 아들로 삼았습니다. 약자 돌보기의 본능적인 현상입니다.


어느 가정에 5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아들은 유난히 몸이 약해 아버지 마음에 애련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약한 아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애처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시장에 가서 다섯 그루의 묘목을 사왔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1년 동안 잘 길러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잘 기른 자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제각각의 노력으로 나무를 제법 잘 길렀습니다. 1년이 지난 후 아버지는 아이들이 키운 나무를 비교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가장 허약한 아들의 나무가 가장 크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형제들 앞에서 그 아들을 적극 칭찬해주었습니다.


그 이면의 사실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잠든 밤 시간이 되면 유약한 아이가 힘겹게 키우고 있는 나무에 열심히 물과 거름을 주어 잘 자라도록 하신 것입니다.


몸이 약해 힘든 삶을 살아가야하는 아이에게 용기를 갖도록 특별 배려해주신 것입니다.


약자 돌보기의 표본을 잘 말해줍니다.


 


우리 지구촌교회는 지난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면서 두 달 만에 모이는 예배를 재개했습니다.


감격이 넘쳤습니다. 교회학교도 예배를 함께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연으로 교회를 나오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담임선생님들과 목회자들이 놀라운 봉사를 하셨습니다.


교회에 오지 못한 아이들을 집집마다 찾아가 부활절 계란과 간식꾸러미, 그리고 화분까지 선물해주며, 축복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돌보아주는 감동적 헌신입니다.


우리 선생님들과 목회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크게 축복합니다. 박수해드립시다.


 


우리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어디서든지 아이들을 보시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들을 안아주시거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기도해주셨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을 번쩍 들어서 축복해주셨습니다. 하늘의 메시아가 아이들과 친구로 지냈습니다. (마가복음 10:16)


한 어린아이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은 기꺼이 달려가서 끌어안고 기도해주심으로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약자 돌보기의 표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훈계와 꾸중은 하지만, 상처를 주지 말라고 당부합니다.(에베소서 6:4) 또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말합니다.(골로새서 3:21)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경 신명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가르쳐줍니다. 특히 약자보호법의 오리진입니다. 신명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약자배려, 약자돌보기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약한 자들이 억울하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친히 공급해주십니다.(신명기 10:18)


그러기에 우리가 약자들을 잘 보듬어 주는 만큼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큰 복을 주신다고 보장합니다.(14:29)


 


오늘 읽은 신명기 24장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약자돌보기 헌장입니다. 우선 10~13절을 보면 채권자가 채무자의 인권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소위 약육강식의 상리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또 14~15절에서는 노동력이나 임금 착취를 절대적으로 엄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 자들을 억울하게 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날그날 일당을 제대로 공급해 주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할 것라고 경고합니다.(14~15절. 출애굽기 22:22~23))


하나님은 약자의 부르짖음과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그들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며 살아야하듯이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 가난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살아야합니다.(18절)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보다 약하고 어려운 자를 최대한 보듬어 주어야합니다. 만일 줄 수 있는 것,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베풀며 살아야합니다.(19~21절)


 


구약성경은 고아와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시편 68편 5절에서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보호자시라』고 소개합니다.


사람들은 약자를 경시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하나님은 섬세한 사랑으로 돌보아주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약자를 잘 보살펴주라고 당부합니다. 특히 약자를 약탈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벌하신다고 경고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힘 있는 사람들이 약자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각별하게 돌보아주심을 천명합니다.(예레미야 49:11)


 


제가 대학시절에 우리나라의 훌륭한 사회 철학자이신 손봉호 박사님한테 수업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우리 학생들에게 매우 아이러니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시는가?’


학생들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후에 교수님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약간 편애하시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더욱 사랑하신다. 가난한 자, 힘든 자, 외로운 자, 나그네를 특별 배려하신다. 억울한 자의 애환에 더욱 귀를 기울여주신다. 특히 병든 자, 아픈 자, 장애를 가진 자를 애민한 사랑으로 돌보아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편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면모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자,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 소외계층의 사람들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그분의 일순위 관심대상은 약자들입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아픈 자, 외로운 자들을 찾아가서 손잡아주셨습니다.


위로해주셨습니다. 보듬어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함께해주셨습니다.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부모도 약한 자식에게 애련한 마음을 더 쏟습니다. 학교 선생님도 어려운 학생에게 관심을 더 기울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불가피한 편애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가 약자일 수 있습니다.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 약자입니다. 나보다 더 가진 자 앞에서 부족한 자입니다. 나보다 높은 자에 비해 낮은 자입니다. 나보다 건강한 자에 비해 약자입니다.


나보다 잘 알 풀리는 자도 약자입니다. 우리 교회는 가급적 Lady first 문화를 만들어갑시다.


국가도 그렇습니다. 강대국보다 열세이면 약소국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중국에게 피해를 많이 입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약자의 한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약한 자에게 갑질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대기업에서 활동하는 분일수록 중소기업 사람들을 홀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인도 언젠가 대기업에서 나와 중소기업 운영자가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큰 교회에 다닌다고 작은 교회 성도들을 얕잡아보는 자가 있습니다. 허상신자 ~~


 


반대로 우리가 가난한 자들의 딱한 사정을 잘 배려하고 보듬어 주다보면 그들이 고마워서 복을 빌어주는 부메랑효과를 얻습니다. 약자로부터 축복 받는 사람, 얼마나 멋집니까!(13절)


우리는 어렵고 힘든 약자들이 우리의 배려에 고마워서 축복해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인정해주시고 복을 주시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의 시인이요, 훌륭한 크리스천 문학가인 Samuel Johnson의 말이 깊은 공감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렸다.」


우리 지구촌교회 장로님 중 환기사업을 하시는 장로님은 회사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인격적으로 잘 대우해주고, 섬세하게 배려해줍니다. 임금도 후하게 주고, 숙식도 최선을 다해 제공해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착함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는 외국으로 가는 선교, 보내는 선교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찾아온 외국인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는 선교’를 더 잘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본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효과를 창출해야합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약자를 잘 배려하고, 돌보아주는 신앙이 곧 경건생활의 척도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신학생과 선교사, 농어촌교회, 군인교회, 어려운 이웃, 통일민을 은밀하게 도와주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영국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이 어린 시절 동네 앞에 있는 저수지에 빠져 익사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젊은 청년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어린소년 윈스턴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은 그 청년에게 보답하는 뜻으로 장학금을 주어 대학 공부를 시켜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훌륭한 생물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수상이 되어 얄타회담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던 중, 심한 열병을 앓아 생사의 위기에 당면했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생물학자가 페니실린 주사를 들고 찾아와 윈스턴 처칠의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윈스턴 처칠의 부모님이 장학금으로 공부시켜서 생물학자가 된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페니실린을 발명한 그가 또 다시 처칠의 생명을 구해준 것입니다.


약자 돌봄의 부메랑효과입니다.


 


인생의 잣대는 소유에 있지 않고, 기부와 기여에 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을 얻는 것에서 생각한다. 하지만 성공은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야말로 Not success, but Service입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에 인도네시아 Immanuel Christian 대학교 총장 Dr. Chris Marantika가 주신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의 3P 운동을 주창했습니다.


첫째, Praying together. 둘째, Proclaiming together. 셋째, Paying together입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도하고, 그리고 함께 베풀며 살아야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번 돈보다는, 쓴 돈’을 계산하십니다. 얼마나 모았느냐보다,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카운트하십니다.


 


오늘 19절 말씀이 참 매력적입니다.(현대어성경)


『여러분이 밭에서 곡식을 걷어 올 때에도 한단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마십시오. 그것은 외국인이나 고아나 과부가 와서 주어가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신명기 14장 29절에서도 우리가 약자를 보살펴주는 만큼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고 보장합니다.


 


그러므로 약자보호는 자기보호입니다. 약자사랑은 자아사랑입니다. 약자 돌보기는 곧 자기 돌보기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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