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변화 (계21:1-22)
본문
부활의 변화 / 계 21:1-22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의 부활을 소망하며 지키는 특별한 주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물어보겠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절박함이 있는지요? 만약 오늘 1억을 나누어드리는 주일이라 하면 사람들은 오늘을 매우 기다릴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지식과 소망을 나누어 드린다고 하면 얼마나 기다릴까요?
부활의 땅
오늘 부활에 대한 지식과 소망을 위해 어떤 본문을 살펴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일부의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NKRV) 이 본문은 우리가 부활하여 살 세상에 대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우리는 부활합니다. 그날에 우리가 보는 이 하늘과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하늘과 땅이라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매우 많이 새로워진’ 하늘과 땅을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전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땅입니다. 부활하여 사는 세상에는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합니다. 바다 좋아하시는 분은 애석하실 수 있는데요.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여 살게 될 천국에는 바다가 있을 겁니다. 본문의 바다는 악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의 크기는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2000스타디온(2220km)되는 정육면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활한 사람들이 살게 될 신도시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이 144000명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수 12에 많음을 의미하는 만을 곱한 수입니다. 상징적인 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144000명의 총체로서 교회를 의미합니다. 곧 장소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많은 금은보석으로 되어 있는 문과 성벽 그리고 주춧돌이 나옵니다. 소위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것과 비슷한 천국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그들의 말이 거짓입니다.
이 본문은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천국에 참여하는 교회(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간단한 스터디 바이블만 보아도 다 그것이 장소가 아니라 사람(교회)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정육면체로 나오는데 성경에서 정육면체로 나오는 것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지성소입니다. 이 땅에서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 제한적인 장소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들이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교회는 지성소처럼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의 자리가 되며 천국의 모든 곳이 하나님이 임재하는 지성소가 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늘 함께 하듯 천국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였을 때 하늘에서 새로운 땅이나 신도시가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과 땅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우리가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될 곳이 금은보화가 가득한 엄청난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라는 사실에 실망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우선 여기에서는 우리가 부활하여 살 곳은 이 하늘과 땅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입니다. 먼 이상이 아니라 가까운 현실입니다.
부활의 삶
새하늘과 새땅이 아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변화된 지금의 하늘과 땅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부활 후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부활 후의 삶은 어떨까요? 부활후의 삶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인 타락 전의 생활을 보면 좋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의 모습이 부활 후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본래 영원토록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부활 후에도 영원토록 사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해 사람들은 이상한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사는 주체는 바로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삶도 지금의 삶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삶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이 영원토록 살게 될 삶일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슬픈 일들이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NKRV) 그러나 부활 후에는 모두 없을 것입니다. 죽음과 수고의 열매를 맺지 못함과 인간관계의 아픔 등은 모두 타락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후에는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 땀 흘리는 수고는 있으나 수고의 열매가 정직하고 풍성하게 있을 것이며 인간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가 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은 그대로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부모자녀의 관계는 없으나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부부의 관계보다 서로 더 친밀하며 부모 자식 간의 사랑보다 더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땅에서 좋은 것은 천국에서의 모습을 반영하며 나쁜 것은 천국에서 결코 있지 않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갖게 되는 우리의 모습은 영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육체는 지금처럼 많은 것에 제한되지는 않지만 지금 육체가 즐거워하는 많은 것을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좋은 것은 더 좋을 것이며 나쁜 것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얻는 좋고 기분 좋은 것은 부활하여 우리가 살아갈 모습을 반영합니다. 그것보다 더 좋겠지만 그 좋은 것의 연장선에서 그러할 것입니다. 부활한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지고 부활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체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듯이 말입니다. 이 땅에서 어떤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좋은 일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후에 우리가 부활하여 천국에서 살 때 우리는 그 좋은 일이 이어질 것입니다. 지금의 좋은 일이 더 배가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좋은 일이 있을 때 부활하여 살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이 기쁨이 계속되지는 못하지만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시게 하심을 감사하며, 그리고 비록 이 기쁨이 계속되지는 못하겠지만 천국에서 이 기쁨이 다시 더욱더 풍성하게 지속 될 것을 알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있습니까? 무시당하고 명성이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에서 우리의 부활한 몸의 천국생활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참으로 아름다운 영광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고유한 존재요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니 어떤 누가 무시하겠습니까? 참으로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예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부활 후에 그런 아픔이 없는 날이 약속되어 있고 지금의 아픔은 곧 마칠 것이기 때문에 아픔 속에서도 우리는 부활을 소망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며 기쁜 일을 기뻐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활에 대한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픈 일을 아파하는 것도 부활 후에 대한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능으로만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것을 느끼고 꿈꾸십시오. 부활을 모를 때는 그러한 것이 모두 희미하였으나 부활을 알면 매우 확실하게 보입니다. 기쁨을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고, 슬픔을 아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신앙과 욕심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시고 부활을 알려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이제 그러한 기쁨을 부활이라는 확실한 이름으로 소망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변화.
부활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부활을 지금의 삶과 매우 다른 것으로 생각하여 사람들은 부활을 꿈꾸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살게 되는 땅이나 삶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부활을 소망해야 합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아등바등하며 탐욕 탐식 탐색이라는 욕심으로 무조건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이 아닌 이 땅에서의 삶은 그러한 것이 결코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더 큰 욕심으로 잡으려 합니다. 더 많은 죄를 지으면서 잡으려 합니다.
그래서 욕심으로 계속 더 많은 죄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단을 바꾸어야 합니다. 욕심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구해야 합니다. 욕심은 아무리 부려도 그가 원하는 것을 잡을 수 없지만 부활은 그러한 것을 넉넉히 잡을 수 있게 합니다. 욕심은 불신앙이지만 부활은 신앙입니다. 욕심은 내가 잡는 것이지만 부활은 예수님이 잡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을 소망하십시오. 부활이 우리의 소망이 되게 하십시오. 부활소망을 가지면 세상의 일에 좌절하지 않고 헛된 욕심 부리지 않고 사랑하며 섬기며 아름답게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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