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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 (계2:12-17)

본문

버가모 교회/요한계시록 2:12~17


 




주후 1세기 말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는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가이사가 하나님인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었는데, 주일 날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은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이십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이고,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그는 환난과 핍박을 받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수를 뜻하는데,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었던 일곱 교회이기도 하지만,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세 번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버가모는 어떤 도시일까요? 에베소나 서머나처럼 번성한 도시는 아니지만, 소아시아의 행정수도였습니다. 버가모가 자랑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도서관입니다.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했다고 합니다. 고대 세계에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 종이를 사용했는데, 버가모에서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둘째, 병원입니다.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라는 병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스클레피온’은 뱀을 상징하는데, 의료의 신 혹은 치료의 신을 가리킵니다. 병자들은 신전 뜰 중앙에 있는 온천에서 먼저 목욕하고, 그다음에 치료실에 가면 의사들은 ‘네 병은 곧 낫는다.’라고 말하면서 일종의 심리치료를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듣습니다. 일종에 음악치료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스클레피온 신 앞에 가서 기도로 서약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환자들이 신전에 찾아오면 우상 숭배자가 되고 맙니다. 본문 13절에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셋째, 제우스 신전입니다. 바위산에 큰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고, 버가모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날마다 제우스 신상을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제우스 신상 옆에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당들도 있었고, 황제 숭배를 위해 매일 제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버가모 교회의 예수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은 교회였고, 충성된 증인으로 안디바가 순교할 때에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안디바’는 누구일까요?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버가모 교회의 교인이었고,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이었으며, 순교자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 예수님을 가리켜 충성된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안디바도 역시 예수님처럼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목숨 걸고 믿음을 고백했고, 목숨 걸고 예수님을 증언했으며,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서 끝내 순교했습니다. 아마도 황제 숭배를 거부했을 것이고, 가이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다가 순교했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가마솥의 끓는 물 속에 던져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안디바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순교한 것처럼,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도 유대교의 본거지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큰소리를 지르면서 귀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돌로 쳐서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버가모 교회의 믿음은 온실 속의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목숨을 걸었고, 순교를 각오하는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그들은 안디바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증언하다가 순교한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탄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절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죽도록 사명에 살았고, 끝까지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딤후 4: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여러분,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잘 지켜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을 파선했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7절에는 후메네오와 빌레도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렸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파선되거나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절대 포기하면 안 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본문 14~1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 안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발람의 교훈은 혼합주의일 것이고, 니골라 당의 교훈은 향락주의일 것입니다.


먼저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민수기 22~25장은 발람 선지자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모압 왕 발락에게 매수당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셨기 때문에 저주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모압 왕 발락에게 미인계를 쓰게 했습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우상의 제물인 풍성한 음식과 맛있는 포도주를 제공하면서 아리따운 여자들의 춤과 노래로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발람 선지자는 돈에 매수된 타락한 선지자,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선택할 것을 요구하십니다(마 6:24). 그런데 그는 ‘둘 다’를 택했습니다.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다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자. 안디바처럼 살 필요 없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은 일종에 혼합주의자들입니다.


버가모 교회 안에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습니다. 예수님도 니골라 당을 미워하셨습니다(계 2:6). 그런데 버가모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은 아마도 영지주의 교훈을 따르는 율법 무용론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주장하는 이단입니다. 영지주의는 교리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이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윤리적으로는 두 극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향락주의입니다. 그중에 극단적인 향락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바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지금은 은혜 시대이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 없다. 안디바처럼 살 필요 없다.’ 그들은 방탕하고 무절제하며 방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혼합주의 신앙과 향락주의 생활을 예수님이 아주 싫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적으로 모호하면 안 됩니다. 세속화되면 안 됩니다. 원색적인 신앙을 갖고 세상의 향락과 쾌락을 이기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약속하십니다.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고,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요?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신앙의 모델이 참 중요합니다. ‘안디바를 모델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발람이나 니골라를 모델로 삼을 것이냐’ 잘 선택해야 합니다. 안디바를 모델로 삼으면 순교적 믿음을 배울 수 있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만나’는 영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은 천국에로의 초청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발람이나 니골라를 모델로 삼으면 혼합주의 신앙과 향락주의 생활에 빠지고, 결국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으로 분열했습니다. 북쪽은 이스라엘 왕국이고, 남쪽은 유다 왕국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우상 숭배자인 여로보암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유다 왕국은 다윗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왕국은 우상숭배로 전락했고,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평생 예수님을 본받았고, 그가 개척한 교회에 본이 되었습니다. < 고전 11: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빌 3: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신앙의 좋은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의 순교를 통해 순교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로 칭찬을 받았는데, 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생겨났을까요?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예수님!” 여기서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버가모 교회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히 무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단은 처음에는 똑같지만, 끝이 다른 집단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말씀을 붙잡고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인 안디바처럼 끝까지 믿음을 붙잡은 교회였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때문에 책망도 받았습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너무 멀리 떠난 이단들입니다. 예수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갖고 계십니다. 순교를 각오하는 믿음에 덧붙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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