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 (고후13:11-13)
본문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
고린도후서13:11-13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성령강림주일을 지켰고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로 지킵니다.
삼위일체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은 쉽게 하지만 실상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이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삼위일체와 비슷한 설명을 드리겠는데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다 틀린 것입니다.
1. 먼저는 제일 많이 오해하는 말인데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때에 따라 성부로 성자로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즉 제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남편으로 때로는 목사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 정말 그럴듯한 말이지만 틀린 설명입니다.
2.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이시고 각자의 역할을 3분의 1씩 맡아서 하신다는 이것도 틀린 말입니다.
3. 성부 하나님이 제일 높으신 분이시고 그 밑에 성자와 성령이 계셔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일을 하신다는 것도 틀린 말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설명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세분,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데(이것을 삼위라고 합니다.)
그 세분은 동시에 영광과 능력과 존귀에서 똑같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이것을 일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내용은, 먼저, 하나님은 세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성부 성자 성령 세 하나님이 계십니다.
둘째로, 그런데 그 세 분 하나님은 동시에 일체가 되시는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만 말하면 그것도 틀린 말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를 생각하는 즉시로 셋의 광채로 둘러싸이며, 셋을 분별하자마자 즉시 하나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약 무엇인가를 완전히 파악했다면, 그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다."
이렇게 어려운 교리를 왜 말해야 하고 알아야 하겠습니까?
이 교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해야 하고 등한히 해서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에 코로나 사태로 신천지의 실체가 많이 드러났습니다만 신천지는 교주 이만희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만희가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쓴 책에 보면 이런 주장이 확실히 나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시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삼위 신이 일체된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
즉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와 하나 되신 후에 지상의 사명자 육체에 임하여 통치하신다.”(이만희의 ‘진상’)
“이 삼위의 노정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또 예수님이 보낸 그(이만희)와 셋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실 그가 곧 보혜사요 사명자이다.”(이만희의 ‘진상2’)
이만희는 이렇게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만희는 자신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중에 성령 하나님에 해당한다고 하고 그래서 자신을 ‘삼위일체 성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귀도 잘 안 들릴 정도로 노쇠한 교주 이만희의 모습을 전 국민이 똑똑히 봤습니다.
이만희는 삼위 하나님인 성령이 아니라 늙어가는 89세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만희의 잘못된 주장을 믿고 이만희를 성신으로 이긴 자로 알고 그를 따르고 있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 교리를 알기만 했어도 미혹되지 않았을 텐데 이 교리를 알지 못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믿어야 하고 바로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구절은 목회자들이 축도로 많이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성자 예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고 신학자들이 만든 말이지만 오늘 본문과 성경의 내용을 종합하면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함께 역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니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신 일은 정말 놀랍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성자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반적인 순서인 성부 하나님을 먼저 쓰지 않고 성자 되신 주 예수의 은혜를 먼저 언급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이 높고 낮은 계급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하신 일체 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성자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언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통과 수치를 당하시고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를 대신하셨던 주님 때문에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았고 나음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나를 대신하신 은혜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피난시절에 부산항에서 석탄을 실은 기차가 범일동까지 와서 기관차를 바꾸는 시간이 10분에서 15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석탄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담아가서 연료로 쓰고 팔기도 하였답니다.
한 번은 40대 남자와 10살쯤 되는 아들이 석탄을 모으기 위해 왔습니다.
아들은 화차에 올라 석탄을 내리고 아버지는 밑에서 받고 하는데 군인들이 오니까 아들이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큰 석탄덩어리 하나가 열차 밑으로 굴러들어가니까 아들이 열차 밑으로 들어가 그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찰나에 기차가 덜커덩하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쏜살같이 아버지가 뛰어들더니 그 아들을 있는 힘껏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열차바퀴가 아버지의 허리위로 지나갔습니다.
그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아들을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아들을 대신하여 죽어가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우리 주님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성자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나를 위해 돌아가신 그 은혜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성부 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부 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부 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우리 위해 보내주신 사랑’입니다.
한국일보에 ‘기억상실 아내와 펜팔부터 시작한 남편’이라는 제목의 실제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여 재미있게 살던 부부에게 엄청난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기억상실증으로 남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물체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한 로라는 뇌손상으로 기억을 잃고 맙니다.
그 결과 9개월 전에 결혼한 남편조차 기억을 못하였고 남편은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남편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해’라고 말을 해도 듣는 아내의 눈에는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 보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느끼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까?
남편 브레이든은 포기하지 않고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그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펜팔로 만나게 된 그때로 돌아가서 매일 사랑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2년 만에 아내의 마음 문이 열렸습니다.
사고 이전의 기억이 돌아온 것도 아니고 결혼을 했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로라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고 두 번째 청혼이 받아들여져서 두 사람은 마침내 재혼이 아닌 재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남편 브레이든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율법을 주셨고 말씀을 주셨고 때로는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인간의 몸을 입히셔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끈질긴 사랑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맺어진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그럴듯한 존재라도 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은 아들까지 버리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끈질기게 사랑하신 그것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셋째로, 성령 하나님의 교통이십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을 통하여,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한 대속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의 길이 마련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구원의 복음을 알고 믿어야 구원을 받지 않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도록 역사하셨고 저와 여러분들이 그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이 진정 구원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셨고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을 믿은 우리를 향하여 ‘너는 내 구원받은 백성이라’ 하는 도장을 꽉 찍으셔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1989년 아르메니아에 4일간 대지진이 발생해서 3만 명의 인명을 앗아 갔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구하려 학교로 달려갔지만 이미 건물은 완전히 내려앉아서 아무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 아버지는 자신이 자녀에게 늘 말하곤 했던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난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이 약속을 생각하면서 자녀의 교실 가까이 가서 돌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다른 부모들은 와서 울면서 너무 늦었다는 절망적인 말만합니다.
경찰도 와서 그만하라고 말을 하였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들과 함께 돌덩이를 치우기 시작합니다.
8시간이 지나고 16시간이 지나고 36시간이 지나 38시간 만에 큰 돌을 빼내자 자기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아들은 나 여기 있다고 대답합니다.
아들이 그 공포의 38시간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아빠가 항상 나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면서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지난 어버이날에 우리 교회가 매년 해오던 부모님과 은퇴목사님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크게 비싼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모싯잎 송편을 보냈는데, 반응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먼저는, 한 두 번이 아니라 매년 보낸다는 사실에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15년)
또한 편지에 담겨져 있는 성도들의 정성에 감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노회 공로목사님이시며 총회장을 지내신 목사님께서 저한테 전화를 하셨습니다.
‘매년 어떻게 그렇게 선물을 보내줘. 한 두 명이 아닐 텐데.
먹어보니까 떡도 맛있네. 권 목사 고마워’
그 전화를 받고 오히려 제가 참 고마웠습니다. 그 목사님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선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저런 목사님이 고마워할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구원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고마워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뭐라고,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가 된다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렇게 애쓰셨단 말입니까?
우리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 속에 들어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20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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