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관을 극복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의 삶 (행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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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관을 극복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의 삶(행11:1-18)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된 구원의 복음은 땅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증거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면 마땅히 복음도 모든 사람에게 증거 되어야 했고 구원에 누구도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가는 복음의 여정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지리적인 난관이 있었고 종족마다 국가마다 민족마다 난관이 있었습니다.
각기 다른 종교가 있었고 다른 풍습과 전통을 따라 많은 장벽이 복음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상제사가 복음증거에 큰 난관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사실 다른 어떤 종교보다 효도의 종교였지만 효도의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한국에 복음을 내리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기독교를 조상도 모르고 근본도 모르는 종교라고 해서 얼마나 많은 핍박을 가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맨 처음 복음을 접하게 된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난관이 있었을까요?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율법을 믿고 율법의 말씀을 따라 할례를 받고 율법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2천년동안이나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았는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아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자기들이 갖고 있는 믿음을 하루아침에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되 그것으로는 부족하니 거기에 율법의 말씀을 지켜야한다는 타협적인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 가운데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자기민족을 사랑해서 많은 민족가운데 선민으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민사상은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무시하고 적대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초대 교인들은 복음을 전하되 유대인들에게만 전했지 이방인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땅 끝까지 전하라는 말을 땅 끝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전하라는 말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19절을 보면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했습니다.
외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에게는 복음이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난관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욥바라고 하는 도시에서 머물면서 기도하는데 한 환상이 보입니다.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여 내려옵니다.
그 안을 보니 유대인들이 먹지 않는 즉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가증한 것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살았던 베드로는 당연히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지금까지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증한 것들을 먹을 수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을 때 베드로는 ‘이것이 무슨 뜻인가?’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는가?’ 생각하게 되는데 마침 고넬료라고 하는 이방인이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두 사람이 너를 찾는데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이방인이요 가이사랴에 근무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함께 식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 번이나 베드로를 권면하셨기에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게 된 과정을 설명합니다.
자기가 9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시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으니 지금 욥바에 있는 시몬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사람을 보내 당신을 오도록 초청했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베드로는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하시는데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모습으로 오순절에 자기들에게 임했던 모습과 똑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구원받았음을 확신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은 드디어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서서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을 하지 못한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2절 말씀을 보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감사하든지 기뻐하던지 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네가 무 할례 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전통을 어긴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사건이 이렇게 된 것이라고 지금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설명을 들은 예루살렘 성도들도 결국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을 회개를 주셨다고 믿게 됩니다.
여러분, 생명 얻을 구원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져야 하고 누구라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생각으로 절대 막아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복음을 증거 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를 가지고 복음이 증거 되는 일을 막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동성애 차별 금지법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어서 이 법의 통과를 기독교가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 법이 통과되면 동성애가 합법화될 뿐 아니라 동성애를 나쁘다고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위법이 되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분명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결국은 동성애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사사기 시대에 대표적인 잘못가운데 하나가 또한 동성애였습니다.
레위기 20:13에 보면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말하면서 그 불의 가운데 하나로 남색 하는 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9절)
성경말씀으로 보나 인류의 역사를 보나 동성애는 인간이 용납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죄악입니다.
그런데 법이 통과되면 그런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그런 말을 하면 위법이 되어 법에 걸리고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법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기독교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지만 동성애자에게도 복음이 증거 되어 그들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동성애자라고 해서 그들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그대로 망하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 정은 정권이 비판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복음도 듣지 못하고 멸망 받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잘못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망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북한의 김 정은 정권도, 잘못한 일에 대하여 사과하지 않는 일본 사람들도 복음을 들어야하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 부목사 한 분이 사무실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는데 "저는 그런 데는 심방 못 갑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심방을 못 가겠다니, 도대체 어디기에 저러는 걸까?' 이상한 느낌이 들어 통화가 끝난 후 물었습니다.
"왜 심방을 못 간다고 했습니까?"
"새로 등록한 교인인데요. 룸살롱을 개업한다고 개업 예배를 드려 달래요. 그래서 목사는 그런 곳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교인이 부르는데 목사가 안 간다니 말이 되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왜 못 갑니까? 그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 아닙니까? 다시 전화하세요. 내가 직접 간다고." 막상 말은 그렇게 해 놓았지만, 마음속에서는 혹시 누가 보고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들어가면서도 몇 번씩 주위를 둘러보며 망설였지만 그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겠다는 열망이 더 컸기에 담대히 들어갔습니다.
룸에 대기하던 열댓 명의 아가씨들이 사장의 VIP 손님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합니다.
웃으면서 그들을 내보내고, 룸살롱 사장인 교인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쌓여 온 아픔과 울분을 들어 주고,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죄인의 친구가 되셨던 예수님을 전했을 때 그는 예수님을 눈물로 영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룸살롱을 정리했고, 신문사 지국을 인수해 땀 흘려 일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모범적인 성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 인중 목사 설교 집에서)
우리가 룸살롱에 가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분명합니다.
여러분, 이렇듯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열려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사상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복음의 문을 닫아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집단이나 국가나 종교나 민족에 대하여 복음을 걸어 잠그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나 가치관으로 볼 때 혐오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볼 때는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리고의 세무장인 삭개오의 집에 주님은 들어가서 함께 지내고 식사도 나누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시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직접 찾으시고 만나셔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깨트려야 합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깨끗하게 했는데 너희 맘대로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고 이기적이고 왜곡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내 생각이 옳고 내 뜻이 옳고 내 감정이 옳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은 절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옳고 우리가 순종해야 할 진리입니다.
내 것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나의 잘못된 생각을 철저하게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도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가는 지리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을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두려움의 난관이 있었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분명 비난받는다는 난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난관을 극복하고 드디어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증거 하는 위대한 첫 걸음을 떼었습니다.
난관이 있으니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난관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오직 걷는 것 밖에는 다른 교통수단이 없는 그 험한 산과 골짜기를 극복하고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얼마나 우상이 많은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는 아덴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었겠습니까?
알지 못하는 조그만 나라 조선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각종 전염병의 위험과 당국의 위험이 상존하고 전혀 다른 풍습과 전통과 종교 속에서 핍박과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이 이 곳 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섭리라는 믿음을 갖고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을 알게 되고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주님은 너희도 가서 복음을 전하라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는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도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 하셔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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