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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에 대한 주님의 해석 (마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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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에 대한 주님의 해석(마5:33-37)


 


우리 속담에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할 때 쓰이는 말로,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면 큰 육체적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속담의 어원은 다양한데 그 중에 하나가 끓는 장에 손을 담근다는 뜻입니다.


끓는 장에 손을 담그면 손을 델 수밖에 없고 화상이라는 엄청난 고통이 있을 텐데 그런 모진 일을 담보로 하여 자기가 옳다는 것을 장담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이 있다고 하면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하나님께 맹세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전 먼저 정탐꾼을 보냅니다.


정탐꾼들이 라합이 운영하는 주막집에 들어가 묵게 되는데 정탐꾼들이 왔다는 사실이 여리고 왕에게 알려집니다.


왕이 군사를 보내 정탐꾼들을 잡으려고 할 때 라합은 그들을 은밀하게 숨겨주고 왕이 보낸 군사들에게는 이미 여기를 떠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극적으로 구원받은 정탐꾼들을 향하여 라합은,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으니 너희도 나를 선대하라’고 하면서 그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요구합니다.


라합의 요구대로 정탐꾼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 맹세대로 여리고를 점령할 때 라합의 가정을 살려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그것은 확실한 것이고 그것을 꼭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런 맹세에 대한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죽을 때에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실 때에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맹세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고 그 서원대로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딸 중에서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택할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창24:3)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신6:13)


이런 말씀들을 보면 맹세는 하나님께 하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할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면 그것은 번역할 수 없고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 거짓 맹세가 되었습니다.


거짓 맹세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 19:12)


유대인들은 거짓 맹세를 하면 십계명의 제 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맹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맹세입니다.


민수기 30장 2절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트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서원이나 결심이나 서약은 여호와께 하는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중에 하나인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면 제일먼저 환영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고 안타깝게도 자기 무남독려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 하는 맹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에게 하는 맹세입니다.


이것은 사람과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인 것을 모르고 멀리서 온 사람으로 생각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화친을 합니다.


나중에 모든 것이 드러났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였기에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고 살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면서 한 약속이나 법원에서 증인 서약을 하는 것이나, 개인 간의 채무 약속을 하는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맹세는 하나님께 한 것이나 사람에게 한 것이나 다 같이 지켜야 합니다.


자기의 말이나 행동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맹세에 대한 주님의 교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맹세한 것에 대하여, 약속한 것에 대하여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부족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깨어집니다. 서원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신뢰가 깨어집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 사회를 믿을 수 없는 사회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예쁜 처녀가 여행 중 목이 말라 두레박줄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 물을 실컷 마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올라 갈 수가 없어서 크게 울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나이가 그 처녀를 구해주었고, 둘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둘은 헤어지더라도 반드시 다시 만나 결혼할 것을 약속하고, 증인으로 우물과 때마침 길을 건너던 족제비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헤어진 후, 처녀는 약속을 지키며 사나이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남자는 약속을 깨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놀다가 풀 위에 잠들어 있었는데, 족제비가 아이의 목을 물어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아들 하나를 또 얻었는데, 그 아이는 우물 속에 비치는 모습들을 보다가 그만 빠져 죽었습니다.


그제야 사나이는 옛날 처녀와 맹세한 약속을 회상하고 그때의 증인이 족제비와 우물이었던 것도 떠올렸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약속이 쉽게 깨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공약을 지키지 않고, 사용자들은 노동자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따라 하루아침에 입장을 번복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을 지키는 좋은 시민들이 되어야 합니다.


맹세나 약속을 지킬 때 더 살기 좋고 더 아름다운 신뢰의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역할이 우리 성도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중요한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살인의 문제나 간음의 문제나 이혼의 문제나 맹세의 문제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가, 더 바른 삶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맹세에 대한 교훈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맹세에 대한 새로운 교훈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34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정확하게 헛된 맹세,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재세례파 사람들이나 퀘이커 교도들은 이 말씀을 옛 율법을 폐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해서 일체의 맹세와 서약을 금지했고 법정에서의 맹세조차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헛된 맹세가 무엇입니까?


맹세를 하고도 지키지 않는 것이 헛된 맹세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께 맹세를 하던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맹세한 것을 꼭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맹세를 하면서도 맹세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늘이고 땅이고 예루살렘이고 자신의 머리였습니다.


이런 것으로 맹세를 하면 신뢰를 줄 수 있으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맹세를 어겨도 괜찮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맹세도 하나님과 다 연관이 된 것이기에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요 즉 하나님의 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머리는 하나님이 주신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되었기에 헛된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전에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았다고 맹세를 소홀히 여기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말에 부도를 내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서,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약속한 것은 그나마 잘 지키려고 애씁니다만 일단 교회를 벗어나고 신앙을 벗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소홀히 하고 적당히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정에서 사업장에서 직장에서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연관되는 일이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하여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사의 호감 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첨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윤활유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칭찬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과장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극적효과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존경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분에 넘치는 집에서 삽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거짓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많은 경우에 아첨을 하고 과장을 하고 속이는 말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를 살아가는 훌륭한 기술이요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다 잘못된 일이요 거짓된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거짓 때문에 우리 사회는 더 신뢰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헛된 맹세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맹세한 것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헛된 맹세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맹세한 것을 지키고 약속한 것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심문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으로부터 맹세를 요청받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를 맹세로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말하였노라’고 대답하십니다.


말하자면 주님도 하나님께 맹세하라고 했던 대제사장의 요구를 수용하여 맹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곳곳에서 맹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후 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후 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 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갈 1: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이러한 말씀들을 비추어 볼 때 오늘 본문의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같이 피할 길을 만들어놓고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맹세를 뒤집어엎는 그런 잘못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분명한 말씀은 ‘맹세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나 사람들에게 한 것이나 그것을 꼭 지키라’는 것입니다.


 


무학교회에 장로님으로 계시는 분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감옥에도 가게 되었고 장로 시무를 사임하는 일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옥살이를 끝내신 후 그는 자그마한 청소대행 회사를 차렸습니다.


힘든 일이었지만 성실히 일을 하였습니다.


사장이 직접 청소 구루마를 끌고 3년인가를 직접 일하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성실히 자신의 일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일을 하니 직원들도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고 결국 회사는 점점 커지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돈을 벌게 되었는데도 그 장로님은 자가용도 없이 언제나 전철과 버스만 타고 다니면서 최선을 다하여 빚을 갚았습니다.


결국 몇 년 전에는 그 엄청난 빚을 다 갚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한 빚까지 다 갚았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장로님의 행동으로 인하여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역시 믿는 사람이 다르다는 칭찬을 받게 되었고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엄청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 말하고 약속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고 갚겠다는 정신이 그 장로님을 예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김동호 목사 설교에서 인용)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표현대로 하자면 믿지 않는 자보다 나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자보다 나을 때 너희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약속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서원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맹세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헛된 맹세를 하지 말고 약속한 것은 내가 설령 손해를 볼지라도 끝까지 지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이 사회가 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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