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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께서 부러워하는 성도가 되어 봐요 (롬16:6)

본문

목사님께서 부러워하는 성도가 되어 봐요 = 로마서16;6

 


PW : 믿음      BIW : 수고하라        AG : 로마교회의 마리아


TS : 믿음의 삶이란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하는 신앙으로 사는 것이다.


 


 


화를 이겨내 봅시다요.


 


용궁에서 어느 날 문어와 고등어가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어가 먹물을 쫙 쏘는 바람에 고등어는 앞이 안보여 어이없게 씨름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고등어가 앙심을 품고 문어를 모함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래한테 전화를 걸어서 “문어가 너를 보고 덩치만 크지 무식하고 다리가 없어서 싸움도 못한다고 하더라.”하면서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그 말에 크게 화가 난 고래는 문어를 찾아 온 바다를 씩씩 거리며 헤집고 다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포기하려고 하는데, 바위에 짝 붙어 있는 문어를 발견한 것입니다.


고래는 “옳거니!”하면서 문어의 다리를 확 낚아채서 바위에 있는 힘을 주어 패대기를 쳤습니다.


그러면서 고래가 한 마디 했습니다.


“야~이 문어야... 네가 내 욕하며 다닌다면서?”


만신창이로 얻어맞은 문어는 “제발 제 말 좀 들어보세요.”하면서 죽기 살기로 간청을 합니다.


고래는 “그래도 이 놈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아직도 입만 살아 있어.”고 하면서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문어는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문어를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 놓고 나서야 직성이 풀린 고래는 그제서야 문어를 노려보면서, “야~임마... 이제 할 말 있으면 해봐.”하는 것입니다.


문어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저 낙지예요! 전 문어가 아니고 낙지란 말예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낙지를 문어로 착각하고 두들겨 팬 것입니다.


사람은 너무 화가 나면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지고 착각하고 오해하게 됩니다.


판단력이 흐려지면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되고, 오해하여 애매한 다른 사람을 못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화쟁이’라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화쟁이’라는 말보다는 ‘사랑쟁이’라는 말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화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들 안에서 우리들 대신에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화를 이기고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P4.


 


평신도들 중에는 목회자들보다 모든 부분에서 뛰어나고 훌륭한 믿음과 인격과 재능과 비전을 가진 이들이 많다.


저는 여러 가지로 너무너무 부족하고 연약한 목사이기에 그런 성도님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작아 보이고 기죽을 때가 많다.


교회에서 열심히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위해서 밤낮 가리지 않고 수고하시는 성도들을 만나게 되면 그 분들의 삶과 신앙이 정말 부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용실을 운영하시는 여 집사님이 계시는데, 그 여 집사님께서 교회와 사역자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라는 여인을 묵상하게 되었다.


오늘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다.


6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6절의 말씀 외에 이 마리아라는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어떤 일을 하는 여인인지 전혀 말씀하지 않는다.


오직 6절의 말씀에서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한 여인이라고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기록하면 로마서를 읽는 모든 로마교회 성도님들은 마리아(Mary)라는 여인이 어떤 여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는 것이다.


마리아 여인에 대해서 굳이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로마교회 성도님들은 마리아라는 여인이 어떤 여인이라는 것을 금새 알아채는 것이다.


그러면 마리아 여인은 로마교회와 성도님들을 위하여 어떤 수고를 많이 했길래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아주 짤막하게 마리아 여인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로마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알아주고, 바울 사도가 인정해 주는 마리아 여인의 신앙과 삶은 어떤 것일까?


 


D4.


 


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은혜에 취하게 하시는 하나님.


 


주님의 몸된 교회, 로마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가장 근본적인 믿음의 뿌리는 누가 뭐라 해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없다면 인간들이 아무리 교회를 아름답고 든든하게 세워가려고 한다 해도 인간 스스로는 주님의 교회를 세워갈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영의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것이다.


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로 로마교회의 성도로서, 일꾼으로서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극진하게 섬기며 수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맡길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은혜에 흠뻑 취했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며 수고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다거나 어렵다거나 불만이나 원망, 불평 같은 것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겠는가?


무척 힘든 일이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육신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힘든 일들 지 않은 일은 없다.


너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다.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의식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마리아 여인은 교회에서 여인으로서 교회의 구석구석을 청소를 하거나 주방에서 식사로 섬기는 일도 힘든 일이다.


많은 성도들이 식사하고 나면 설거지 하는 것에서부터 뒷정리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런가하면 누군가가 옆에서 ‘자기 혼자 은혜와 축복을 몽땅 받으려고 저런다.’고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닥 움직이지 않다가 교회에 와서는 목사님의 눈에 들기 위해서 죽을 똥 살 똥 저러고 있다.’고 한 마디 거두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믿음 생활은 지 혼자 다 하는 것 같네...’하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소리, 저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저런 소리 듣자고 이렇게 헌신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에 아픔과 상처가 밀려오기도 하고 자괴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교회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교회가 작으면 그 만큼 보는 눈이 적기 때문에 탈도 말도 적을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크면 클수록 그 만큼 보는 눈들이 많기 때문에 탈도 많고 말도 많을 수밖에 없다.


성도의 수가 500명이면 천 개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고, 500개의 입에서 말을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번씩만 비난하거나 욕을 해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1년 내내 욕을 듣거나 비난을 들어야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들어야 되는 비난과 원망과 불평의 숫자는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작은 것에 대해서 속상해 할 필요가 없다.


교회가 큰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 더 큰 상급을 받거나 작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 더 작은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의 상급은 절대로 교회의 크기에 따라서 많거나 작아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진실되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사랑했는가에 따라서 상급의 크기와 량이 달라질 뿐이다.


 


마리아 여인의 마음과 영혼을 꽉 붙들어주는 것은 단 하나, 주님의 사랑, 주님의 십자가 사랑, 주님의 넓고도 넓은 호수와 같은 사랑에 흠뻑 취해 있을 때, 주변에서 손가락질을 하든, 뭐라고 욕을 하거나 비난을 하거나 비아냥을 거리더라도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 하나 붙들고 모든 어려움을 당당하게 이겨내는 것이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흠뻑 취해서 살았으면 좋겠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흠뻑 취해서 사는 성도님은 예수님께 미쳐서 예수님의 은혜에 퐁당 빠져버린 사람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사는 사람이다.


우리들도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는 믿음 하나 붙들고 저 천국만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② 교회를 위해서 애쓰는 수고를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마리아 여인의 수고를 인정해 주시면서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마음에 큰 울림과 감동을 주시면서 아주 짧디 짧은 한 마디를 기록하게 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이 얼마나 영광스런 말씀인가!


마리아 여인은 로마교회에서 자신이 맡아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는 것이다.


주방에서 식사로, 교회 청소로, 화장실 청소로, 안내위원으로, 헌금위원으로 섬기는 것이다.


교회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면서 상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세워주는 사역을 감당한다.


마리아 여인은 어르신들과 이웃들의 말벗도 되어주기도 하고,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뭇 영혼들이 주님을 믿어 구원받도록 전도하는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한다.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서 어린 영혼들에게 생명의 말씀과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하기도 한다.


구역장과 셀 리더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역도 감당하는 것이다.


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모습들을 보는 로마교회 성도들이 인정해 주고, 목회자가 인정해준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도 아내의 헌신과 엄마의 헌신된 삶을 인정해 준다.


로마교회에 수많은 믿음의 여인들이 있었지만 마리아 여인처럼 인정해 준 여인이 또 있을까?


로마서 16장에서 기록한 여인들은 뵈뵈, 브리스길라, 루포와 알렉산더의 어머니와 15절에 보면 네레오와 그의 자매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리아 여인을 기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마리아 여인의 신앙과 삶과 인격을 인정해 주면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16권의 서신서 중에서 가장 복음의 진주(眞珠)요 보배(保陪)라고 일컬어지는 로마서에 당당하게 이름을 기록하면서 모든 신앙인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커다란 울림과 감동을 주시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여인은 교회 성도들에게서 인정받는 신앙인이다.


마리아 여인은 교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신앙인이다.


마리아 여인은 목회자들에게 인정받는 신앙인이다.


마리아 여인은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신앙인이다.


그래서 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여인이 되는 것이다.


마리아 여인은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여인이 되는 것이다.


마리아 여인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서 뭇 성도들이 부러워하고 흠모하는 여인으로 당당하게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들은 마리아와 같은 성도가 우리교회에 있었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성도님이다.


마리아 여인과 같은 성도는 목사님께서 부러워하는 성도님이다.


예배에 잘 참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배의 즐거움과 행복을 알고 누리며 사는 성도님이다.


목사님께서 선포하시는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아멘. 아멘’ 기쁘게 말씀을 받아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는 성도님이다.


찬양할 때도 기쁨이 가득 넘치는 성도님이다.


교회를 섬기면서도 자신의 의나 업적을 하나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복음만을 드러내고 가만 가만히 섬기는 성도님이다.


그러면서 기뻐하고 만면에 웃음과 미소를 가득 띄우는 성도님이다.


교회를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알고 교회의 구석구석을 잘 살피면서 돌아보는 성도님이다.


교회의 허물이나 성도들의 허물을 보면 눈감아주고 말없이 주님 앞으로 나와서 눈물로 중보기도해 주는 성도님이다.


목사님께서 마음껏 좋아하고 자랑하고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울어나게 하는 성도님이다.


이런 성도가 오늘 로마교회의 마리아라는 여성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목사님께서 부러워할 수 있을 만큼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성삼위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신앙공동체인 교회에서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가정과 사회와 주변에서도 인정받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다 못 믿어도 000는 믿을 수 있다고 인정받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지금은 교회를 나가고 있지 않지만 나중에라도 교회를 나가야 된다면 다른 000때문에는 교회에 가고 싶지 않지만, 마리아와 같은 000때문이라도 꼭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고 싶다고 고백할 수 있다.


 


L4 & B4.


 


그러면 우리들도 마리아 여인처럼 목사님께서 부러워할 만큼 인정받는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①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신앙인이어야 한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교회에서 아주 작은 성도, 어쩌면 그 성도가 있는지 없는지 존재조차 알지도 못할 만큼 작은 성도가 된다 해도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큰 은혜요 축복임을 믿고 작은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다.


흔히 작은 예수가 되라고 한다.


사도행전11장에 등장하는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안디옥 교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소개하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말이 바로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이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저 교회에는 예수라는 사람이 많이 사는가봐.”하면서 작은 예수들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안디옥교회 성도님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 주변 사람들이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한 눈에 느껴지는 느낌이 “저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보여. 예수가 사는가봐”라는 반응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들은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들 스스로 목사님이요 장로님이요 권사님이요 집사님이요 선생님이라고 소개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머리를 박박 굵고 있다면 우리들은 작은 예수로, 성도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들 주변 사람들이 우리들을 어떤 모습으로 봐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작은 예수로 사는 사람은 작지만 결코 작게 사는 것이 아니다.


작은 예수로 사는 신앙인은 작아 보이지만 크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작은 예수로 사는 신앙인은 아주 작은 소인(小人)처럼 보이지만, 온 세상을 가슴으로 품고 살아가는 대인(大人)의 삶을 사는 신앙인이다.


 


② 자신을 죽이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24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밀 씨앗이 농부에 의해서 밭에 뿌려지고 심겨졌을 때, 밀 씨앗은 땅 속에 파묻혀서 죽어야만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많은 곡식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밀 씨앗이 땅에 뿌려 졌을 때, 죽지 않고 썩어버리면 절대로 싹이 돋아나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썩어서 없어질 뿐이다.


땅에 뿌려진 밀 씨앗은 땅 속에 파묻혀서 자신이 죽음으로서 새로운 새싹이 돋아나서 씨앗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자기 자신도 함께 더불어서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제는 자기 자신은 완전히 죽은 시체가 되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살아 계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은 살아 있으나 자기 자신이 아니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나 대신에 살고 계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성도는 자신을 매일매일 죽이면서 사는 신앙인이다.


자신을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아 죽일 때,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는 영광과 기쁨을 덩달아 주시는 것이다.


우리들도 흔히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고 이야기는 하면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리, 저리 소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본다.


죽은 시체는 주변에서 뭐라 해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죽은 시체는 욕을 하든, 때리든, 잡아 땡기든, 밀어내든 전혀 모른다.


죽은 시체는 자신을 꽁꽁 밧줄로 동여매든, 어떤 종류의 수의를 입히든 모른다.


죽은 시체에 싸구려 수의를 입히든 아주 비싼 황금색의 수의를 입히든 시체는 전혀 모른다.


죽은 시체는 반응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고 고백하면서 온갖 반응을 보이는 것은 죽지 않았다는 증표가 된다.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이러니 저리니 하는 말에 온통 신경을 곤두 세워서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하거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일이 생기면 곧 바로 일어나서 ‘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어!’라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라고 말씀하신다.


날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 심정으로 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목사님께서 부러워하는 신앙인이 되는 신앙인은 매일매일. 날마다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삶을 사는 신앙인이다.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고 말씀하신다.


우리들이 매일매일, 날마다 날마다 우리들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 하나님은 매일매일, 날마다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우리들 자신도 부활하는 삶, 살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와 축복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잘 낫다고, 잘 했다고, 훌륭하고 대단하다고 자랑질하는 의나 업적이나 치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복음과 보혈만이 남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우리들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③ 아주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아주 작은 일이란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위대하고 웅장하고 크고 놀라운 일들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작다. 크다. 위대하다. 하찮다. 변변찮다. 놀랍다...’등등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든 인간이라는 아주 좁은 시야에서 판단되어지는 아주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흔히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님께서 종들을 불러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종들의 재능을 따라서 다섯 개, 두 개, 한 개를 주시면서 열심히 장사하여 이문을 남기라고 부탁하고 먼 여행을 떠나신다.


다섯 개, 두 개 받은 사람은 주인님의 뜻대로 열심히 일을 해서 각각 다섯 개, 두 개의 갑절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한 개를 받은 사람은 ‘겨우 나에게 한 개 밖에 주지 않았단 말이야. 나를 어떻게 보고 다른 놈들에게는 다섯 개, 두 개를 주면서 나에게는 달랑 한 개만 주었단 말인가? 나를 믿지 못해서 달랑 한 개만 주었지. 그러면 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 나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하면서 한 달란트를 땅에 파묻었다가 도로 가져온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신 주인님은 각각 갑절을 남긴 종들에게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칭찬해주고 인정해 주신다.


하지만 한 개를 받았다고 불평하면서 땅에 파묻고는 그대로 가져온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책망하고 징계하면서 쫓아내고 만다.


사실 한 달란트도 절대로 작은 분량이 아니다.


다섯 개, 두 개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한 달란트가 작은 분량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 달란트는 32kg이나 되는 무거운 분량이다.


한 달란트를 들어보려고 하면 그야말로 끙끙 거리면서 들어야 겨우겨우 들 수 있을 만큼 무거운 분량이다.


그러니 인간들의 식견으로 ‘이것은 작은 거야. 이것은 하찮은 것이야. 이런 것은 별 볼 일 없는 거야.’라고 판단되어지는 일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하찮은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별 볼 일 없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 다 위대하고 크고 놀라운 것들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2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대단한 일, 위대한 일, 큰 업적이나 어록을 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면 하찮은 일로 치부해 버리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7-8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에게 요한계시록2;10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주님의 몸된 교회인 로마교회의 마리아 여인은 작은 일이라 여겨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한 여인이다.


그랬을 때 성삼위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님이 된다.


더 나아가 로마교회 성도님들뿐만 아니라 사도바울까지도 인정하는 성도님이 되고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받는 여성도님이 된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마리아 여인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흠모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로마교회의 권찰님, 집사님, 권사님, 명예권사님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도 우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맡겨주시든, 어떤 일을 하라고 감동을 주시든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면서 수고하면 인정받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성삼위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인이 될 때, 교회와 가정과 주변 사람들에게서 작은 예수처럼, 진짜 예수쟁이처럼 보인다고 인정받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그럴 때에 우리들은 목사님들도 부러워하는 신앙인, 목사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자랑하면서 다닐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우리들은 목사님께 인정받을 때 사랑받고 은혜 받고 축복받은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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