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은 기회다 (약1:1-5)
본문
시험은 기회다 / 약1:1~5
삶은 시험의 연속입니다. 시험이 없으면 좋겠는데..
시험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험은 불청객입니다. 원하지 않는데 계속 우리 삶에 찾아오는 불청객!
오늘 본문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약1:2
여기서 ‘시험’은 temptation(유혹)이 아니고 trail (시련)입니다.
즉 시련,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거든..’ 이란 뜻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디아스포라)에게 *약1:1
그 초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핍박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난관을 예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시험(시련)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같이 기독교인들이 점점 희소해져가는 젊은이들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학교, 직장, 각종 모임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쉽고
여러 손해를 볼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은 그 본질이 광야길입니다.
광야는 시련 투성이입니다. 위기가 늘 다가오고, 광야는 살기가 까다로운 곳입니다.
거칠고 하루를 버텨내기 어려운 곳이 광야입니다. 우리 인생이 광야와 같습니다.
약1:2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각양각색의 시험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색깔이 다양한 것처럼, 우리가 당하는 시련의 형태도 가지각색입니다.
▲성경은 시험을 없애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시험(시련을 의미)이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똑같은 시험이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볼 것은, 시험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2
시련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은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온전히’라는 말은 ‘기뻐하려고 애를 쓰는 척하는’ 정도가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시련을 기쁘게 여길 수 있을까요?
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시험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주어질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4
축약하면 ‘시련을 이겨내면 우리로 성화에 이르게 한다’입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상태는,
다시 말하면 ‘시련을 통과해서 성화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성숙 mature’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 ‘온전’의 헬라어 teleios가 온전 perfect, 성숙 mature 이란 의미를 모두 가집니다.)
이것이 성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영적으로 성화에 이르면, 우리의 삶에 많은 (자기 미숙함과 범죄의 결과로서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느냐면
어떤 영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를 시련 가운데로 몰아넣느냐?
성화의 삶이 시련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냥 편안하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생하는 많은 일들은
이 성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그렇습니다.
육체적으로 어리니까 늘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그럽니다.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고 난 다음에는 잘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기들은 쌀쌀한 날씨에 바깥에 내놓으면 금방 감기에 걸립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화를 온전히 이루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떤 문제도 녹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화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바울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초월적 삶을 살았습니다.
빌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어떤 경제적 형편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 모든 형편과 상황을 이겨내는 힘을 가집니다.’ 빌4:11~13
이것이 성숙한 성화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일어납니다.
물질의 어려움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미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세계를 초월해내는 초월적 삶이 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속에 주어지는 수많은 시련을 통하여,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내 믿음이 정금같이 빚어지면서, 점점 더 성화에 이르러
영적인 깊은 고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일례로, 올챙이가 일평생 올챙이로만 있으면 물에서 헤엄치는 자기 세계 밖에 모를 것입니다.
자기가 개구리가 되어서 높이 점프해서 뛰어다니는 그 세계가 있는 줄 알아야 되는데요..
올챙이는 지금은 물속을 헤엄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높이 점프하는 개구리가 되는 것을 꿈꾸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 힘들더라도, 꿈꾸고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약1:4)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 성숙의 마지막 목표 goal 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 수준에 도달하는 길은.. 바로 고난이라는 거죠.
그래서 너희는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지만 온전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 성화와 온전의 단계에 도달하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시련이 없으면 좋겠는데,
시련이 없으면 우리는 성화의 과정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마치 땅 위를 기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 오르는 것 같은..
여러분, 땅바닥에서 기어다닐 때는 막 흙이나 돌에 부딪히지만
비행기가 하늘을 날듯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면 걸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 구름 위로 비행기가 날아오르면 전봇대도 없고 신호등도 없습니다.
이 땅 위로 다니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성화와 영적 성숙의 단계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들고 이런 시련, 저련 시련이 끊이지 않는 것은
아직도 내가 상황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가 내게 한 마디 툭 던지면, 집에 와서 막 앓아 눕고, 잠이 안 오고...
그게 뭐에요? 아직도 내가 환경과 상황에 지배를 받고,
주위 사람에 지배를 받고, 말에 휘둘린다는 뜻입니다.
또 이 시대의 문화에 지배를 받아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가치관에 지배를 받아서 (안 받아도 될)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 문화, 생각을 하고 살아가니까
기독교인으로서의 그 신앙적 갈등과 시련을 이겨낼 길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직 바닥에서 기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어렵게 만드는 일은
우리가 아직도 날아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신비한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그 신비함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성숙의 길로 가는 길에 시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거죠.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라 consider, count’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 어원(헤게오마이)은 ‘주도하다’입니다.
우리가 잘 쓰는 헤게모니(주도권) 라는 단어가 나왔죠.
행렬이 막 이어져 갈 때, 가장 앞에서 이끄는 사람을 일컬을 때
‘헤게모니를 가졌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의 뜻은 :2
그 기쁨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주장하고, 이끌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행위 이전에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온전히 기뻐하는 그) 생각이 우리를 주도하고 이끌어가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의 중요한 키워드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중요한데 이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생각(사고)의 변화가 진짜 변화입니다.
교회는 10~20년 다녔는데, 생각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계속 우리는 세상의 낮은 차원에서 영향을 받고, 세속적인 영향 안에서 머물러 있게 됩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먼저 생각(가치, 믿음)이 변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내 삶을 주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일례로 ‘시련을 당해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기쁨이 내 삶을 이끌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힘든 게 뭐냐면, 생각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겠는데, 생각(신앙적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왜 잘 바뀌지 않는가 하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 가치관들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50대라면, 50년 동안 형성된 견고한 세상 문화와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건 아주 강력한 진지와 같습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 생각이 더욱 견고하게 굳어진 철옹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 삶도, 자세히 보면 어제까지의 내 생각, 가치관의 결과입니다.
이게 헤게모니입니다. 내 생각이 내 삶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내 행동을 끌고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어떤 학력, 능력, 조건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생각’입니다.
생각이 신앙적 가치관으로 바뀌면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일어난 문제, 여건, 환경보다
사실 우리 삶을 더욱 더 큰 능력으로 지배하는 것은 내 생각(믿음의 생각)입니다.
내 (믿음의) 생각에 따라 사건이나 문제를 전혀 다르게 펼쳐지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즘 보면, 우리가 육체적 장애도 불편하지만
어떤 면에서 육체적 장애보다 정신적인 장애가 훨씬 더 자기 삶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생각의 힘이 중요한데!
믿음 생활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신앙적 생각의 힘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하는 모든 행위 속에
우리 생각 안에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 생각 안에 믿음이 작동되고,
이 생각은 우리의 관점과도 연관됩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는 거거든요.
생각의 전환을 해야,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변화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평범한 사람들과의 차이는, 딴 게 아니라 생각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소 엉뚱하게, 허황되고,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믿음의 생각을 가져서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관점으로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한 신자들은 전부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 밤에 잠도 안 자고 와서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안 보이는 거죠.
아니면 ‘철야하면 교회에서 뭐 주나?’ 이렇게 물어봅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 믿었던 사람들은 그 시대의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그런 판단이 나오는 거죠.
▲여러분, 믿음으로 생각이 변한다는 것은.. 시련을 만나도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은 여기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신앙 훈련을 해야 됩니다.
우리 안에는 세속적, 부정적인 사고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굉장히 부정적, 비관적 생각들이 굉장히 많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음을 얘기해도, 내 안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폐쇄적이고 부정적이고 시니컬하고...
링컨의 어머니가 그랬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 그들은 병균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주는 치명적인 영향을 그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마다 생각의 틀이 잡혀져 있습니다.
틀 frame 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게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병2어 때 수많은 무리들이 운집해서 말씀을 듣고 난 후에
해가 질 때 배가 고픈 저녁 시간입니다.
그때 빌립이 본 것은 ‘아무 것도 먹을 게 없다’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함을 확신하기 위해서 그는 계산에 충실했습니다.
계산해보니 2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야 되는데, 현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 안드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왔지만 ‘이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두 제자 모두 비관적, 절망적, 부정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절망적인 생각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절망적인게 아니고, 절망적인 생각이 절망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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