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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과 그리스도인 (행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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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과 그리스도인(행2:5-13절)


Ⅰ. 들어가는 말


\ 경험되지 못한 일에 대한 반응에 나타난 시각의 차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분명 동일한 상황을 같이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견해를 표명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각자 살아온 삶 속에서 경험되어진 것일 때는 그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시각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경험되지 못한 일에 대한 반응은 크게 긍정적인 경우와 부정적인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긍정적인 경우 -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그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합니다. 삶을 호기심 천국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뭐든지 재미가 있습니다.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배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이해하려는 편에 서려고 애씁니다. 아직 그것에 대한 확고한 견해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탐구정신을 가지고 도전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확고한 판단이 서면 그때는 단호하게 지적하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상당히 있다고 판단되면 긍정적인 쪽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긍정적인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는 것에 대해서 늘 관심이 있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도 이런 유연성을 잃지 않도록 늘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연성이 굳어진 사람은 젊은이들의 회피대상 1호가됩니다.



2. 부정적인 경우 - 어떤 사람은 무조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를 종종 만납니다. 무관심합니다. 내가 아는 것으로 모르는 영역을 진단하려고 하다보니까 상당한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은 곧 비 진리처럼 몰아붙이기도 합니다. 또 자신 없어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이나 상황이 관심거리요 발전의 기회이기보다는 부담이요 싫은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대부분은 관계의 손상을 입거나 기회가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이런 상황 앞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직 내가 경험한 것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는 부분보다는 모르는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필연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만을 알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은 참으로 대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전문가를 전문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도전정신이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사람만이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좀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일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야하는 이야기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경이적인 눈으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사람들과 새 술에 취했다는 비난을 퍼부은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중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Ⅱ. 본문 관찰


1. 유대인들의 세계이해와 천하에서 모여든 경건한 유대인들


우선 본문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그랬습니다. 그 때는 오순 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에 천하 각국에 흩어져 있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정복이래 팔레스타인 밖으로 많이 노예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당시 전쟁포로는 다 노예입니다. 그래서 바빌로니아 정복이래 유대인들은, 메대 파사제국을 거쳐서 헬라제국인 알렉산더를 거치게 되고,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가 득세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유대인들은 계속되는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방대한 지중해 세계 연안에 흩어지게됩니다. BC 586년, 7년 바빌로니아의 정복에 의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었는데, 그 중에 일부만 팔레스타인에 귀환을 해 가지고 다시 성전을 짓고 유대 민족공동체를 다시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다수는 바빌로니아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까지도 바빌로니아에 아주 중요한 유대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예수 당시, 예수 이후까지도 이 탈무드는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더 큽니다. 바빌로니아 유대인들 간에 성경연구를 모아놓은 것이 탈무드인데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예루살렘 탈무드보다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훨씬 방대합니다.


또 알렉산더에 의해서 정복되고, 나중에는 시리아, 안디옥에 근거를 두었던 셀류키드 왕조에 의해서 정복되고 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포로, 곧 노예로 붙들려 감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굉장히 큰 유대 공동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가 당시 로마 다음 제일 큰 도시였고 다섯 행정구로 나누었는데 그 중에 두 구가 완전히 유대 구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돈버는데 재주가 있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또 당시나 지금이나 유대교의 특성상 이웃과 어울릴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왜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형상 없는 신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볼 때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또 자기들끼리 할례라는 것을 행하는데 이 할례가 또 당시 이방인들에 의해서 많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며 살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않고 식사도 같이 않고 스스로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왜요? 다 불결한 것으로 보았으니까. 그래서 이 아주 배타적인 공동체를 이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다가 돈을 잘 벌고 재주는 많고 하니 반 유대주의 소위 anti-Semitic(반 셈족주의)이 당시 로마세계에서 아주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반 유대주의는 헬라나 중세 기독교에 의해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고 로마시대 이전부터 아주 고대 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AD 30년, 오순절 잔치에 로마제국 각처에서 온 유대인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그걸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만큼 흩어졌나 알 수 있습니다. 이 로마제국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본토 유대교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반 세겔 성전 세(성인 남자는 일년에 반세겔 씩 다 내야 되는 성전세)를 통해서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그 가족들은 성전의 제사의 덕을 본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여러 순례 절기 때는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가끔 순회 랍비를 파견해서 헬라세계 여러 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일정기간 가르치게 하는 일 등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으로서 세상의 중심이었으며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곳이었기에, 그렇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언젠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 거기서 살다가 예루살렘 거룩한 도성에서, 되도록 이면 성전에 가까운 곳에서 살다가 죽고 거기에 묻히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시 유대교회에 가면 세상을 10개의 동심원으로 나눴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중심으로 한 거룩의 도에 관한 10개의 동심원으로 나누어서 지성소에서 멀리 갈수록, 멀리 퍼질 수록 거룩의 도가 적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 사이에 사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개, 돼지에 불과한 이방인, 더러운 자들과 같이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돈을 많이 벌면 성전 가까이서 거룩한 성전 가까이 살다가 죽는 것을 큰 꿈으로 생각했습니다.



자, 이런 배경을 가지고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모여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인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서 나름대로 값을 지불하고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을 보면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편의상 용어를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종교인이란 사상적이고 관념적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형식적인 종교입니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그들이 믿는 종교가 삶을 변화시킨다든지, 그들이 믿는 종교 때문에 어떤 결정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란 없습니다. 그저 종교란 마음의 위로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실제의 생활은 그들이 믿는 종교와는 전혀 별개로 개인의 성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불행합니다.


신앙인 이란 종교인과는 반대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삶이 신앙의 영역이 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별개의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결정이 신앙적인 틀 안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2. 두 부류의 사람들


소위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표현된 천하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일단 경이와 함께 긍정적으로 보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보는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들이 본 현상이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때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본문 6절이 말하고 있는 상황에 그들은 함께 있었고 함께 보았습니다. 큰 무리가 모여서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게된 그 때입니다. 제자들이 동시에 각기 다른 나라말로 방언을 하기 시작하자 그 반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모여들었을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보면서 사람들은 소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자신들이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보도 듣지도 못한 일들이 지금 자신들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출신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평판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지방 출신의 사람들은 후음을 발음하는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 할 때는 발음을 우물거리는 습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시골티가 줄줄이 흐르는 사람들을 얕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자신들 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일단 상황을 환기합니다. 자신들의 출신지이며 상황을 종합합니다. 그러면서 호기심과 경이감이 어우러진 채 어떻게된 일인가를 서로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할 것은 이들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습, 다만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7절과 12절의 다 놀라 기이히 여김과 놀라며 의혹한 것은 원문에는 계속 그렇게 여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놀라고 있는 중이며 자신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상황가운데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렵지 않게 뒤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에 3000명이 회심한 것을 통해서 이들은 이 상황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기심과 기이함 의혹이 어우러진 상황이었지만 최소한 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이 일에 대해서 무조건 적의를 표명하거나 아직 알지 못하는 경험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긍정적으로 보고 결과를 주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상황을 일단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롱하면서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합니다. 조롱했다는 말은 이들이 이 상황을 진지하게 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입술을 삐죽이면서 “저 사람들 미친 것 아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새 술이라는 말은 이제 막 발효되기 시작한 당도 높은 포도주를 말합니다. 이 포도주는 취기를 더하게 하는 술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들이 보기에는 성령 강림으로 각기 다른 방언을 말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술취한 사람의 주정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이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고 그들은 계속해서 놀라고 당혹해 하면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의 사람들은 이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서 조롱하면서 새 술에 취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들의 비틀려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임에 분명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이들은 사고의 손상을 입은 것입니다. 이들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에 전혀 감화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저는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종교인은 신앙과 생활이 별로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도 주관적이고 폭이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감히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불린 이들 가운데 오순절 성령 강림을 바라보며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할 수밖에 없는 천박한 영성의 사람들이 종교인들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물론 한 사건 한 상황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단순히 반응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사건들과의 연장선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적대적인 세력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기로였습니다. 저는 정상적인 신앙인 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새 술에 취했다는 조롱보다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편에 섰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이 이들의 반응은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삶이 신앙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삶이 신앙과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들을 통해서 이들의 경건 이라는 것이 이기적이고 편협한 것이라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기이히 여기며 의혹 했던 사람들은 최소한 신앙인 다운 신중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이런 원리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적대적인 생활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지나치게 비판적인 모습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과 평강의 원리와는 대단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느 편에 더 가까운 사람들입니까? 우리에게 동일한 상황이 펼쳐졌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시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는 다변(多變)을 뛰어 넘어 급변(急變)하는 시대입니다. 세상은 순간 순간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문화라는 이름과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변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다양한 충격들 앞에 우리는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움츠러들어 있습니다. 그저 내가 아는 수준에 머무르고 싶고 새로운 충격들을 경험하는 것에 별로 달가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세대들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경험합니다. 구세대와 신세대라는 말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냥 내가 아는 세계에 안주하면서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싫든 좋든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오늘 본문과 같은 상황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이럴 때 다른 반응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소위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불렸던 사람들 가운데 두 부류의 뚜렷한 반응을 보면서 이들을 종교인과 신앙인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째는 상황에 반응하는 개인의 모습은 신앙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은 사변적이고 관념적이며 종교적인 것을 전혀 지지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주님을 따라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고 싶어 합니다. 교통질서를 안 지키는 것과 신앙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내 아내와 부부싸움을 하는 것과 신앙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강변합니다. 세상이 다 그런데 좀 적당히 속이면서 사업하는 것이 정상이지 그것과 신앙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도가 아닙니다. 구별된 사람이 아닙니다. 종교인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은 신앙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를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모든 삶의 영역을 다루는 전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모든 삶의 영역을 다루는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를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며 삶에 대해서는 전혀 무기력한 분으로 만드셔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이런 원리가 정리된 후의 열매에 관한 것입니다.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신앙의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의 두 부류의 사람들의 반응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는 진리에 관한 것이 문제가 될 때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것들이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해서 반응할 때 신앙의 성숙도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우선 자신이 성품 적으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도 아주 미숙하다는 겸손한 생각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신중하고 겸손하게 대처하려고 애쓰게 마련입니다. 가능하다면 이해하는 측면에 서기를 원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려고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 앞에서 깨어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식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성급한 비판과 조롱을 가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경험한 것들은 아주 작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세상은 넓고 다양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것들로 세상을 한정지으려 할 때 우리는 조롱하는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이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세상을 조롱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볼품없는 무지와 사고방식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포함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좀더 긍정적이며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찾아보면 어떤 악한 것에서도 배울 점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우지 않겠다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은 가장 우리를 멍울지게하고 정체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한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가 배우고 알아야할 영역은 많습니다. 진정한 신앙인, 성도의 모습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인은 아직도 지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연세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아직도 배워야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경이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이런 경이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아는 영역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감격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성품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소망 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며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순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모든 것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부정적으로 대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악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요, 진지한 신앙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종교인의 영역에서 머무르지 마십시오. 마음의 위로를 얻는 수준으로 기독교를 비하시키지 마십시오. 삶 전체,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 사고방식까지도 바꾸는 진정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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