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너희는 누구냐 (행19:14-20)

본문

너희는 누구냐(사도행전19:14-20)




인디언들은 사냥이나 이동을 할 때에 계속해서 열심히 뛰어가다가도 갑자기 말에서 내려서 한참을 가만히 서있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달려서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돌아온 그 길을 보며 영혼을 기다리는 거라고 합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생각도 안날 때가 있습니다. 바빠서 일수도 있지만 때론 무언가에 홀려서 정신을 빼놓고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러다보면 하루하루가 재미도 없고 내 삶에 정작 나 자신은 빠진 것 같다고 합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일상에 따라오는 나의 영혼을 위해 잠깐 기다려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열심히 달리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어떻게 사는 건지 아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우리는 의미도 모르고 달리는 것보다 한번 씩 쉬어가며 나의 영혼을 기다리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고 병자를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파송 받은 열두 제자들이 행했던 사역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복음 사역 과정에서 훼방꾼으로 나타나 복음의 참 의미를 왜곡시키는 자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많고 다양하고 강합니다. 마술하는 유대인들과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러합니다. 시대와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 사람들의 판단력을 떨어뜨리고 신앙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이 근본적으로 넘어지고 현혹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교회와 성도를 바로 세우는 신령한 능력이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두려움 충만


본문 14-16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사도 바울의 능력은 절정에 달하여 직접 안수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붙은 천으로도 병이 나았습니다.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12절). 베드로와 바울이 부른 주 예수의 이름은 신앙의 표시이지 주문은 아니었습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제사장의 권위와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간교한 술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행동들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들이 지금까지 행하던 악한 일들을 계속해서 하고자 하였습니다. 악귀도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악귀에게서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악귀도 하나님의 진정한 사역자와 인간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가짜 사역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악귀가 들린 사람은 초인간적 힘이 있습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악귀를 쫓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능욕을 당함으로 허위성이 폭로되었습니다. 사탄은 사탄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두 아들만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전혀 없이 사악한 동기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사탄의 세력이 징벌의 도구가 됩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마귀에게 봉변당했다는 소식이 퍼져나감으로써 이들의 권위와 이름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며 반면에 바울의 권위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이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셨다고 말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십자가 곁에 섰던 이들에게는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고난이 무의미하게만 보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일말의 유익도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가장 위대한 역사를 목격한 것입니다. 고난은 인간을 완전한 어둠으로 내몰곤 합니다. 대개 우리는 자신이 고난받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무의미해 보였던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부당하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아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 관해 하나님께 아무런 계획도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이 버림받고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 버리시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천한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보다 더 확실히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제 당신이 누군지는 상관없습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장벽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누구든 예수님을 통해 용서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귀신에게 묶여 있거나 조종을 받는 사람은 불행하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귀신과 마귀는 사람을 분열시키고 두려움과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물과 불로 뛰어 들어가고 무덤 사이에서 살게 합니다. 귀신과 죄의 종은 불행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귀신과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평안과 희락과 기쁨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면 악귀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십자가의 능력과 믿음이 없어서 마귀에게 조종을 당하고 벗은 몸으로 집에서 도망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십자가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모든 악귀와 두려움을 몰아내어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회개 충만


본문 17-19절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주 예수의 이름을 남용하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망신당한 것을 보고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같이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두려워하며 주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두려움은 바른 신앙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의 대상을 발견할 때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복하게 되며 용서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귀신이 쫓겨나고 마술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마술사들이 오히려 귀신들에게 쫓기는 그 원인을 몰랐습니다. 단지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모든 귀신들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에베소 주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신비한 능력 앞에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은밀하게 범하던 잘못들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과거의 생활 습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미신과 주술을 따랐던 자들이 크게 회개하였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행동을 회개하고 마술과 관련된 책들을 불태웠습니다. 공개적으로 책을 불태우는 것은 공식적으로 배격하는 선언입니다. 책값이 은 오만이었습니다. 거액이 되는 책을 불태운 일에서 에베소 성도들의 결단을 볼 수 있습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도 다 불태우는 공개적인 결단이었습니다. 후회가 변화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한 교수가 젊어지는 비결 72 가지에 대한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 내용들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매일 양치질을 열심히 하면 6년 더 젊어진다고 합니다. 외출했다가 들어와서 손 씻기와 양치질 하는 일만 열심히 실천하면 평균적으로 겪는 질병의 절반은 예방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 날마다 한 차례씩 크게 웃으면 8년이나 더 젊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옛 말에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란 말도 있듯이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과 가정에 평화와 장수의 복이 임하게 됨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생활에 매여 살아가느라고 웃는 일에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웃기는커녕 온갖 스트레스에 짓눌려 화난 얼굴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평소의 얼굴 모습이 이미 각종 질병을 불러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셋째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고를 지니고 살면 7년이나 더 젊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헛된 욕심을 떨쳐 버린 채로 감사할 줄 알고 사는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우리들 주위에는 이외로 부정적인 사고를 품은채로 자신과 공동체에 대하여 비관적인 생각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일은 자기가 끈질기게 생각하는 쪽으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부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매사를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안 되는 쪽으로 진행되어질 것은 당연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하고 사탄을 이기는 신앙생활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교회와 말씀과 사명 중심으로 살면 됩니다.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꽉 붙잡고 살면 됩니다. 우리의 이익이나 유익을 위하여 예수님과 교회와 성도를 이용하는 삶이 아닌 헌신과 사랑의 삶을 살게 되면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모든 마귀와 귀신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동안의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성령의 불로 태우고 복음과 십자가로 충만해져서 마귀와 사탄을 넉넉히 이기는 건강하고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말씀 충만


본문 20절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거짓 것이 크게 무너지고 참 것이 크게 흥왕했습니다. 바울은 생애 최고의 활동을 했고 생애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헬라어 본문에서 본 구절의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되어있어 주의 말씀이 에베소에서 지속적으로 흥황하여 모든 거짓되고 미신적인 마술들을 물리치며 많은 사람을 회개시켰음을 나타냅니다. 토속 신앙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도 점쟁이나 무당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하여 성도와 교회에는 아직도 신비주의 적이고 무속적인 습성과 내용이 있습니다.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기준이고 표준입니다.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하도록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병적인 현상이 아닌 진정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 충만해야 합니다. 물질이나 사람이나 미신적인 영향력에서 오직 말씀만이 흥왕하실 수 있도록 회개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태우고 부수고 다시 건설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미국에 경제대공황(1929년 10월)이 찾아왔을 때 정말로 많은 회사와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은행들도 빌려줄 돈이 없어 문을 닫았으며 심지어 학교까지 문을 닫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비관론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래코스는 실업자가 많고 물가가 싸진 대공황 때가 초고층 빌딩을 짓기에 적기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렇게 약 3년에 걸쳐 완공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층빌딩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래코스는 투자비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수익을 얻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존 템플턴이라는 투자가도 돈을 빌려 거의 망해버린 100개의 회사의 주식을 구입했습니다. 사람들은 미련한 짓이라고 손가락질 했고 실제로 그 중 34개의 회사가 상장폐지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회사의 주식은 급격히 상승해 3년이 지났을 때에 존 템플턴은 5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으며 그 수익을 기반으로 자신의 투자회사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어렵고 환경이 아무리 척박해도 기회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지혜인 성경을 통해 길을 찾고 전능한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어려운 상황과 위기 속에서도 주님으로 인해 담대하십시오. 말씀 충만이 살 길이고 지혜이고 능력입니다. 말씀 속에 모든 지식과 지혜가 있습니다(골2:3). 말씀으로 돌아가고 충만하면 길을 열어 주시고 반드시 형통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와 삶 속에 더욱 흥왕하는 축복이 계속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날 미신과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미혹을 당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너희는 누구냐”라는 조롱 속에 교회와 성도들이 살고 있지만 이제 우리 모두 두려움과 회개와 말씀 충만으로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열어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