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도 구원받았다 (행8: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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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도 구원받았다!(행8:14-17)
최근에 남북한의 대화와 북미간의 대화가 진행되면서 한반도에 비핵화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평화적인 통일의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기대가 생겼습니다.
아직은 시작단계이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째든 시간은 걸릴지라도 잘 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갖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반도의 변화와 기대에 대해 여전히 비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저것은 다 꼼수고 남한의 무장을 흩트려놓으려는 수작이고 저들이 하는 일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드셔서 6.25사변이나 북한의 만행을 기억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북한의 행태를 전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남한을 무너트리기 위한 거짓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면서 북한의 거짓 기만술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분들의 주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북한에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깨졌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줄 압니다.
이러한 분들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북한에 대한 신뢰가 깨어져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유대 사람들의 신뢰도 거의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무너져있었던 것이 신약시대의 현실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를 넘어서 거의 멸시하는 수준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수가 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말입니다.
여인은 물을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 반문을 합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고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피하고 말을 걸지 않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유대인 같은데 예수님이 말을 거니까 너무 이상하게 보인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사마리아’라는 지역을 꼭 집어서 말씀하셨지만 예루살렘 교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박해로 인하여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곳은 유대 땅이 아닌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었지만 그곳에서조차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행11:19)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들에게만 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만큼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심하였고 그들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계기로 큰 박해가 일어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데 7집사중 하나인 빌립이 사마리아에 이르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 빌립은 본토에서 난 유대인이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본토 유대인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약해서 그랬는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귀신들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고침 받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들이 예수를 믿을 때와 똑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소문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전해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놀라운 충격을 받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거의 사람취급도 안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는데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들이 일어난다고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기들에서 일어났던 현상들이 똑같이 일어났다고 하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가면서도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마리아 성도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위하여 안수하고 기도했더니 성령을 받게 됩니다.
이 본문은 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입니다.
첫 번째는,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따로 일어나는 것이냐? 하는 논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는 것이지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성령 받는 것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냐? 하는 논란입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동시에 성령을 받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결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고 진정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동시에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예수를 믿고 물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것이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하며 성령을 받기위하여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 믿는 것 하고 성령을 받는 것하고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유명한 목회자나 능력 있는 분들이 안수를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의 역사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가 너무 강해서 그것을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베드로와 요한을 오게 하시고 그들이 기도할 때 성령 받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도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 되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생생히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이었고 이들의 사고도 너무 민족주의에 고착되어 있어서 그것을 깨트리시기 위해 일부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초청을 받아 가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대단히 꺼려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도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생각과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전도 대상이 안 되었고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드로를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보냅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 모여 있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과 동시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사마리아 지역과 다른 현상이 나타나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건을 경험하면서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방인에게도 전해야 된다고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들만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다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험을 두루 시켰느냐 하면 사도행전 15장에서 이 문제에 대한 회의가 열립니다.
이 예루살렘회의는 베드로의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공식적으로 확립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까지 오게 하시고 그들이 기도함으로 성령을 내려주시게 됩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성령을 내려주심으로 사마리아 사람들도 구원의 대상이 되고 성령을 받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오래 동안 가졌던 민족주의와 차별주의 율법주의를 뛰어넘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좁은 편견으로 복음을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도 나를 지배하고 나를 사로잡고 있는 잘못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을 축소시키는 잘못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장의 말씀을 보면 빌립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를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이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표현이 아주 간단하게 나왔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딱한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들 표현대로 말해보면 뭔가 복 받자고 잘 되자고 예수를 믿었는데 결국 예수 믿다가 쫄딱 망해서 이렇게 도망 다녀야하는 신세가 된 사람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도망으로 뭐 하나 제대로 가지고 나온 것이 있었겠습니까?
거의 빈털터리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빌립을 비롯한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뿐 아니라 영원한 삶과 상관이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어디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행복한 영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마귀 사탄과 함께 지옥에서 고통스러운 영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형편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실패했다고, 일이 잘 안된다고, 되는 일이 없다고 신앙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더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떠하든지 예수를 잘 믿어야 하고 영생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복음전파의 대상을 내가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의 민족주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잘못된 생각을 깨트리시기 위해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역사를 체험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절대 구원의 대상을 내가 축소하거나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마리아도 이방인들도 일본 땅도 북한 땅에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이슬람 문명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사마리아 지역은 어디이며 여러분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호감과 비 호감을 떠나서 그것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어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 교회를 위해 지체 없이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두 사도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능력자입니다.
대제사장, 관원, 율법학자들이 둘러싸서 심문할 때도 기탄없이 말해서 그들을 놀래 켰던 사람들입니다.
관원들이 다시는 예수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하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담대히 대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기둥과 같은 사람들을 당시에 제대로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서 파송했다고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권위나 세우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기둥과 같은 사람을 파송하고 겸손히 섬기며 사마리아 사람들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소문을 듣기만 한 것인데 예루살렘 교회는 지체 없이 이들을 파송하였습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위해서 이러한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라고 모 교회라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적은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권위를 내 세우거나 서열을 따지고 위세를 부리는 모습에서 내려와서 어렵고 힘들고 고통 받는 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의 귀족적인 모습을 버리고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 주님과 같이 섬기는 모습을 보일 때 구원의 역사는 활발하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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