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과 피 터지는 싸움을 싸워 봐요 (출17:8-16)
본문
죄악과 피 터지는 싸움을 싸워 봐요/ 출애굽기17;8-16
행복을 나누는 지혜로운 삶
어느 강사님께서 세미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풍선을 나누어 준 뒤에, 그 풍선에 자기 이름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모든 풍선을 방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강사님은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이 쓰인 풍선을 5분 안에 찾으라고 했습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정신없이 자신의 풍선을 찾느라 서로 부딪히고 밀리고 방안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5분이 흘렀지만 단 한 명도 자신의 풍선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무 풍선이나 집어서 거기에 적힌 이름을 보고 그 사람에게 찾아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풍선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강사님은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방금 실시한 풍선 찾기는 우리들의 삶과 똑같습니다.
모두 필사적으로 행복한 삶을 찾아다니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풍선을 나누어 주듯, 행복을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행복은 자신만을 생각할 때는 전혀 행복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먼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챙겨줄 때, 비로소 우리들의 행복도 찾게 됩니다.
부모님은 자식들의 행복을 먼저 챙겨줍니다.
목사님은 성도님들의 행복을 먼저 챙겨줍니다.
지도자는 따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먼저 챙겨줍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먼저 챙겨주며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의 행복보다는 가족들의 행복, 이웃들의 행복, 동려들의 행복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P4.
신앙인의 삶이란 언제 어디서든 주변에서 집요하게 여러 종류의 공격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삶이다.
신앙인들을 주변에서 환영하고 좋아하고 같이 공존하기를 기뻐하는 경우도 많지만, 도리어 신앙인들을 배척하고 증오하고 핍박하고 심지어는 신앙인의 생명까지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경우들이 아주 많다.
어떻게 보면 삶 자체가 치열하게 치러야 할 전쟁이 아닐까?
어느 유명한 종교개혁자는 지상교회를 전쟁하는 교회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천상교회는 전쟁에서 승리한 교회라고 한다면 지상교회는 승리한 교회로 가기 전에 치열하게 치러야 할 전쟁하는 교회하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은 승리하는 교회로 가기 위해서 지상에서는 늘 언제나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할 아말렉 족속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신앙인과 그 신앙인들을 주변에서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고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들과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아말렉 족속들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악연을 맺고 서로 죽이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는 관계가 된 것일까?
아말렉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관계일까?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일까?
D4.
① 호전적인 에서의 후손으로 아말렉을 보내시는 하나님.
어느 부족과 민족과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든지 지구촌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와 주권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다.
그 부족과 민족과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태어나고 보니 그 부족과 민족과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저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한씨 가문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선택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다.
저도 태어나고 보니 대한민국 국민이고, 한씨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라는 점이다.
생명의 주인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부족과 민족과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도록 역사해 주셨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생명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라고 평가하셨지만, 그 가룟 유다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이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아말렉을 이 땅에 보내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야곱의 형 에서의 가문을 통해서 보내주신다.
창세기 36장에서 보면 에서의 자손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에서는 세 아내 가운데 아다에게서 엘리바스를 낳게 된다.
엘리바스는 첩 딤나에게서 아말렉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36:12에서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에서 ⇨ 엘리바스 ⇨ 아말렉, 이런 가계도를 따라서 아말렉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이다.
아말렉은 할아버지 에서를 닮아서 아주 호전적인 손자로 성장하게 된다.
아말렉의 후손들로 형성된 아말렉 족속들은 호전적인 민족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에서의 후손들, 아말렉의 후손들이라고 해서 모든 후손들이 다 호전적인 후손으로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민족이 가진 칼라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한민족을 한(恨)이 많은 민족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우리 한민족의 정서는 대체적으로 한(恨)이란 정서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토속신앙이든 우리 한민족이 지닌 문화 자체가 한(恨)이라는 정서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 것처럼 늘 들사람으로 사냥과 전쟁을 즐기며 살았던 에서의 특색을 따라서 에돔 족속이든, 아말렉 족속이든 호전적인 특색을 그대로 지니면서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어져 가는 것이다.
호전적인 특색이 에서의 후손들이 지닌 공통적인 칼라라는 것이다.
에서의 후손들, 특히 아말렉이 호전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특색, 칼라를 가지고 있을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누구에게서,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지닌 신앙의 칼라나 특색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향이 많다.
신앙은 자기가 처음 시작한 그 교회문화에서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분쟁과 다툼이 많이 일어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쟁과 다툼의 중심에 서는 경우가 많다.
어디서든 괜히 시비를 걸고 의견 다툼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존중해 주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나 의견만 옳은 것이라는 외고집, 똥고집, 고집불통의 신앙인으로 자라는 경향이 많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순종하고 섬기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신앙인으로 세워지는 교회에서 자란 신앙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인정해주고 존중해 주려는 경향이 많다.
누구에게서 어떤 영향을 입었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좋은 영향을 받으면서 살았으면 좋겠고, 또한 누군가에게라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좋은 성도가 되어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고, 좋은 교회가 되어야 좋은 영향을 끼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너’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곧 나는 괜찮고 좋은 사람인데, 당신이, 너가, 그대가, 그들이 좋지 않아서 자기 자신도 좋지 않은 사람으로 도매급으로 넘어간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주변에서 좋지 않은 인격과 신앙과 습관을 지닌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올바른 사상과 인격과 가치관과 신앙과 습관으로 살아간다면 주변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으로 새워져 갈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괜히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냉혹하리만치 냉정하게 판단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넉넉하리만치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추고 살아야 한다.
너가 아니라 내가 먼저 좋은 성도가 되고, 신앙인이 되면 틀림없이 좋은 영향력을 가진 좋은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②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말렉 족속은 호전적인 특색을 지닌 민족인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노예살이하면서 노동만 하면서 살았던 민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사훈련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인구가 200만 명이면 결코 작은 민족이 아니다.
현대 지구촌에는 다양한 민족들과 나라들이 펼쳐져 있는데, 불과 몇천 명, 몇만 명도 안 되는 나라와 민족들이 수두룩하다.
불과 몇천 명, 몇만 명도 안 되는 나라와 민족들이 수두룩한데 비하여, 200만 명이 넘는 히브리민족은 거대한 나라와 민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노동력을 제공할 뿐, 나라다운 나라도 세우지 못했고, 나라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한 군사도 세울 수 없었다.
그런데 아말렉 족속은 호전적인 민족이기 때문에 군사들도 거느리고 있고, 주변 민족을 공격하여 전리품들을 노략질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호전적인 민족의 특색은 주변국이나 민족을 공격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리품들을 강탈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호전적인 특색을 지닌 아말렉 족속이기 때문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탈하고 노략질하기에 식은 밥을 먹듯이 너무나 좋은 대상인 것이다.
아말렉 족속들은 자신들이 노략질하기에 만만해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에서 공격해 오는 것이다.
아말렉 족속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족속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아말렉 족속들은 무기다운 무기 하나 없고 군사훈련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고, 오합지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기에 너무나 쉽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뭔가를 갖추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430년 동안 애굽에서 2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형성하면서도 군사를 세우지도 못하고, 군사훈련도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제는 자기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군사력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군사를 세우지 않으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더라도 주변국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임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나라건, 민족이건 자기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가족들과 민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군사력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 나라와 민족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군사력이 확보되어야 하는 안보는 어느 민족이나 나라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서 군사력이 필요함을 절감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호전적인 아말렉 족속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략 1000여 대의 병거를 몰고 애굽의 바로가 추격해 올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사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었다.
그때는 군사력을 생각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군사력을 지녀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레위 지파를 빼고 12지파에서 병역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을 조직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된다.
사람이란 존재는 자신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면 다른 일에 도전하지 않고 지금 삶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언가가 꼭 필요하다는 필요성이 절감하게 되면 좀 무리가 되더라도 그 필요성을 채워놓기 위해서 준비한다.
아말렉 족속의 공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시내산에서 12지파를 중심으로 군사 대열을 세우게 된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제안으로 각 지파에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이라는 군사제도가 세워지게 된다.
시내산을 출발하여 행진할 때부터 이 군사 대열을 따라서 행진하게 된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질서가 없는 무질서 가운데 행진했지만, 시내산 이후부터는 질서정연하게 군사 대열을 맞추면서 행진하게 되는 것이다.
③ 협력하는 기도의 힘으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아말렉 족속이 공격해 오자 모세는 젊은 여호수아에게 젊은 청년들을 데리고 나가서 싸우라고 한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라고 하면서 전쟁터로 내보낸다.
여호수아는 비교적 싸울만한 젊은 청년들을 뽑아서 데리고 나가서 아말렉 족속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싸울만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보냈지만, 이들은 젊기도 하고, 힘도 쓸 것 같기도 했지만, 군사훈련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기 때문에 잘 훈련된 아말렉 족속들과 맞장을 떠서 싸우더라도 패배당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당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하여 아말렉 족속을 맞아서 싸운다.
이 때에 모세와 아론과 훌은 호렙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너무 피곤해서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해괴망측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모세 한 사람이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모세가 손을 내리면 기도하지 않는 것인가? 손을 내리고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모세의 손이 마법을 일으키는 것인지 모세의 손에 의해서 승패가 달라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옆에 돌을 쌓아 올리고는 그 돌 위에 모세의 양손을 올려놓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손을 붙잡는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고 돌로 제단을 쌓아서 제사를 드리면서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세는 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다고 하면서 “여호와 닛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호와 닛시(Jehovah-Nissi)는 “The LORD is my Banner”이다.
곧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이라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다는 의미에서 여호와는 승리의 깃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고민해 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모세가 양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두 손이 너무 피곤하여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이상한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모세가 두 손이 너무 피곤하여 내렸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
모세가 피곤해서 두 손을 내리더라도 기도는 계속하는 것이다.
손을 내려도 기도는 계속하는데 이상하게 이스라엘이 지고,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돌을 쌓아 올려서 양손을 붙잡고 있을 때,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나님은 기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동역자들과 함께 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특히 전쟁과 같은 큰 문제를 앞에 놓고 기도할 때는 더욱더 옆에서 함께 동역하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을 이용하는 것이다.
기도와 협력으로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소망과 희망과 꿈을 꾸게 된다.
자신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울 때 주변에서 많은 공격을 당하겠지만, 이제는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마음과 생각을 주시려고 아말렉 족속과 전쟁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지만, 항상 종으로, 노예로만 살았었지 한번도 전쟁에 나아가서 싸우는 전사로 훈련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주변에서 군사들이 공격해 온다고 하면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주눅 드는 삶을 살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 어쩌면 출애굽하고 처음으로 만난 전쟁에서 하나님께 모든 백성들이 협력하면서 기도하면 승리하고, 협력하지 못하면 기도하더라도 패배를 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전쟁은 모두가 함께 두 손을 모아서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의지할 때만이 승리할 수 있구나. 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가는 것이다.
L4 & B4.
출애굽기13;17에 보면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라고 소개하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이 일어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까 봐서 가나안 땅으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홍해를 건너도록 하면서 먼 길로 돌아가도록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음을 모르고 계셨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이미 하나님께서 알고 있음에도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에서는 피하도록 하시고,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에서는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말렉 족속이 지닌 의미와 상징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대적하고 싸워서 승리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임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말렉 족속이 공격해 옴으로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말렉이라는 족속은 성경에서 찾아보면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었던 적이 없는 민족이다.
에서의 손자로 태어난 아말렉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고, 해가 되는 민족으로 성경에서는 등장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사건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때마다 어디에선가 아말렉 족속이 나타나서 고통을 준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민족이다.
신명기25:17-19에 보면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도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무엘상 15;2-3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면서 아말렉 족속의 모든 것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신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아말렉 족속과 연관되는 것은 씨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의 모든 것들을 죽임으로서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아각 왕을 즉시 죽이지 않음으로써 아각 왕의 후손이 목숨을 건지고 아각 족속을 만들어낸다.
이 아각의 후손이 에스더서에서 등장하는 하만이란 사람이다.
하만으로 인하여 페르시야 왕국에서 유대인들이 큰 곤경을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성경에서는 아말렉 족속이 등장하는 본문에서 긍정적으로 기록한 부분이 단 한 곳에도 없다.
거의 다 부정적인 이미지로 아말렉 족속을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말렉 족속은 대표적인 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죄는 반드시 진멸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바로 아말렉 족속을 상징하는 것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교만과 마음과 생각과 습관과 관습과 전통문화와 토속신앙들과 어둠의 세력들, 악의 영들, 모든 것들이 아말렉의 범주에 들어가는 죄의 카테고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들만의 교만하고 거만한 바벨탑을 쌓고, 자기들만의 의로움을 쫓아가고, 인본주의로 달려가는 죄악들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권과 영력을 지닌 신앙인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온통 세상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로 꽉 차 있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하늘 아버지를 대적하는 무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심지어는 거룩한 교회에도 하늘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늘 아버지를 대적하는 무리들이 가득 차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자기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아말렉 족속과 같은 죄악 덩어리들과 피 터지게 싸워서 반드시 이겨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① 자기 자신이 누군가 하는 자아정체성이 명확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선 자기 자신이 누군가 하는 자아정체성이 없거나 약해지면 어떤 일이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선 자기 자신이 누군가 하는 자아정체성이 강하고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라야 어떤 일이든 자신감을 가지고 매사에 지혜와 믿음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종이요 주님의 일꾼이라는 자아정체성을 명확하게 가진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사랑하는 우리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세상으로 내려와서 가장 고통스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한 방울의 피도 물도 남기지 않으시고 다 쏟아주시면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이다.
자아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자긍심과 자신감이 강해지고 확신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파워를 지니게 된다.
② 기도의 조력자들,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전도서 4:9-12의 말씀에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곧 독불장군처럼 하지 말고 옆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힘을 합쳐서 하라는 말씀이다.
은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에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혼자서 기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 기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면서 함께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특히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하는 기도에는 더욱더 주변에 있는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한목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큰 힘과 용기와 위로와 격려가 된다.
모세 혼자 기도할 때에는 피곤하여 손이 내려오기도 했지만, 아론과 훌이 옆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었을 때, 더욱더 힘찬 기도를 할 수 있었고,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면, 우리들도 주변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과 합심하여 기도하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 수 있다.
③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기도할 때 기본적인 자세가 바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전화위복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가 아니라 +가 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신뢰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마는 우리들 신앙인들이 기도해야만 하는 분명한 목적과 의도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시고 치료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믿음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들 앞에 펼쳐져서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아말렉 족속과 같은 수많은 죄악 덩어리들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반드시 아말렉과 같은 죄악 덩어리들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승리하여 승리의 깃발,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올려드릴 수 있는 신앙인의 길,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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