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교훈 바른 교훈 (딤전1:3-11)
본문
다른교훈 바른 교훈(디모데전서 1:3-11절)
1. 어느 시대에나
성경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당시나 신약시대에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지난 두 달 동안 묵상했던 신명기의 계속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교훈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풍요의 시대가 시작되면 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신명기를 묵상하면서 그렇게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탐욕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공부한 히브리서의 주제 역시 흘러 떠내려가는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로 인해서 혼란스러워하는 교회의 모습을 다룹니다. 거기서도 역시 다른 교훈을 가진 사람들, 즉 율법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왜? 도대체 왜 사람들은 바른 복음을 버리고 이렇게 유사복음, 거짓 복음을 따라가는 것일까요?
저는 지난 두 달 동안 묵상했던 신명기 말씀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30:11~14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이게 핵심입니다. 순종할 마음이 있으면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면서 다른 교훈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60절입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그럽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앞에서 주님은 영생에 대해서 생명의 떡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렵도다’ 그러면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어렵도다라고 한 말을 이렇게 해석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걸림이 된다는 것은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하면서 떠나갑니다. 즉 순종할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다른 교훈을 따라갑니까? 말씀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합니까? 자꾸 하늘에 올라가서 말씀을 받으려고 합니다. 바다에 내려가서 특별한 것을 받아오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에베소 교회의 문제도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에 후메내오라는 사람은 출교를 시켰어도 불순종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딤전 1:20절에도 나오지만 딤후 2:17절에도 등장합니다. 그들의 말이 악성 종양처럼 퍼져나간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 사이에서 바른 교훈을 가르치라고 디모데를 에베소의 사역자로 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말씀을 살피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즉 바른 교훈의 특징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입니다. 즉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바른 교훈을 따릅니다. 그래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열매로 맺힙니다.
그러나 다른 교훈은 그 열매도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3절의 다른 교훈, 10절의 바른 교훈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다른 교훈과 바른 교훈이 가는 길이 어떻게 다른지에 주목해 볼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다른 교훈을 따르는가? 왜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교훈에 열광하는가? 왜 바른 교훈은 그렇게 인기가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먼저 다른 교훈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다른 교훈1 - 신화와 족보
우선 우리는 마게도냐에서 시작해 봅니다.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그럽니다. '마게도냐'(Macedo-cia)는 발칸 반도의 중동부에 있는 아가야(Achaia) 북부지방으로 B.C.7세기 초에 페르딕카스 1세가 그곳의 원주민들을 내쫓고 마게도냐 왕국을 건설한 곳입니다. 이 마게도냐 왕국과 관련하여 세계 역사상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이 곧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마게도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을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알렉산더 사후(死後), B.C.276년경에는 안티고누스 2세가 이곳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B.C.168년에 로마에 정복당하고, B.C.148년에 로마의 한 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처음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가 놓인 뒤에(A.D.63년경) 바울과 디모데가 같이 에베소에 머물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나고 디모데는 계속 에베소에 머물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마게도냐로 같이 가서 그와 함께 일하며 그의 시중을 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를 간신히 설득하여 에베소에 계속 머물게 한 것입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 당시 소아시아의 로마 관할 지역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가진 자유 무역 항구 도시였습니다. 저희가 에베소를 가보았을 때는 항구 도시라는 흔적을 찾기를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경제 규모가 큰 무역 항구 도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3차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선교했습니다(행 19:1~20). 그런데 바울이 이곳을 떠나 마게도냐로 가고자 했을 때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에 계속 머물게 한 이유는 에베소가 소아시아 지역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계 2~3장), 그리고 이 지방에 영지주의(Gnosticism)가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 교회에 머물러 바른 교훈을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가르치는 다른 교훈은 무엇입니까?
다른 교훈은 헤터로디다스칼레오(eJterodidaskalevw)라는 다소 긴 단어입니다. 이 말은 다른 이라는 의미를 가진 헤테로스(e{tero")와 선생, 혹은 교사를 지칭하는 디다스칼로스(didavskalo")의 합성어입니다. 잘못된 것을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즉 거짓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 다른 교훈이 뭡니까? 신화와 족보입니다. 이런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면서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착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른 교훈이 아니라 다른 교훈에 몰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신화와 족보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복음이 아닌 다른 것에 열광하는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아마 에베소에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했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신화”란, 뮈도스(mu'qo") 즉, 신비하게 창작된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원래 넓은 의미에서 '말'(word, speech)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 개념이 한정되어 결국 만든 이야기, 즉 꾸며진 이야기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영지주의의 창조설이나 아니면 헬라, 로마신화의 영향을 받아 어떤 가문(家門)이나 도시의 기원을 어떤 신에게까지 소급시켜 이야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신이 세상에 내려와서 어떤 성을 세웠다느니, 흑은 신이 어떤 집 여자와 혼인 하여 한 가문을 세웠다는 허황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적 기사에 필적하는 당시 헬라, 로마인들의 각종 신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허황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끝없는 족보는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자랑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강조하던 유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자신의 족보를 유명한 조상들에게까지 억지로 연결시키던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경향은 유대인들에게서 극심했지만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은 신들의 계보를 줄줄이 외우면서 신들과 교류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가 신들과 영웅들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족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었습니다. 종교적 허영이 낳은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신화와 끝없는 족보는 몇몇 그릇된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구약의 유명 인물들에 대한 가상적이고도 허황된 족보가 만들어져 성경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혼란을 초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노력은 영지주의와 만났을 때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신비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신비한 이야기들은 온 우주 만물에 신, 즉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들과 교제하는 신비체험을 강조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여기 몰두한다는 말은 옛날 성경에는 ‘착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프로세코(prosevcw)라는 이 말은 온통 마음을 빼앗겨 다른 것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종교적 허영 때문입니다. 잘못된 만족과 탐욕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까.
무엇에 몰두할 것입니까? 바른 교훈입니까? 다른 교훈입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복음이 아닌 것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변론을 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경륜이라는 말은 오이코노미아(oijkonomiva)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 즉 하나님의 교회를 잘 관리하고 세우기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열정을 가지고 올바른 복음을 삼기라도 하려는 듯이 열심히 전도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 왔던 신천지는 주일 예배 시간인데 우리 교회를 찾아와 소란을 떨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잘못된 다른 교훈의 부작용입니다.
교회는 각자 자기의 견해를 내세워서 논쟁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기준은 사회의 요구가 아니라 성경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바른 교훈를 따르고 있는가? 건강한 신앙이 있는가를 어떻게 점검합니까? 바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변론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바른 교훈에 착념하게 합니다. 사람을 세우고 사랑하게 합니다. 섬기고 봉사하게 만듭니다. 복음은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 안에 변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명령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성경 묵상을 매우 중요시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성경 묵상이 변론이 된다면 그것만큼 해로운 것이 없습니다. 성경 묵상은 말씀을 보고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학적인 지식 자랑이나 무익한 변론으로 치닫게 된다면 가장 나쁘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신앙생활은 변론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다른 교훈 2 – 율법주의자들
두 번째 다른 교훈은 율법주의입니다.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는 늘 교회 안에 자생하면서 교회를 어렵게 하는 주범들입니다. 5절과 11절은 바른 교훈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른 교훈에 대한 문맥에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6절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그럽니다. 여기 사람들은 3절에서의 어떤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익명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은 삶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후메네오 같은 사람은 아마도 회심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벗어났다는 말 아스토케오(ajstocevw)는 표적에 '빗나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상징적으로 진리에서 '비뚤게 나가다'라는 의미입니다. 바른 교훈에서 빗나간 것입니다. 이 말은 이들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외면하고 다만 쓸데없고 허풍스러운 말만 늘어놓다가 방황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헛된 말은 신화와 족보에 대응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공허한 이야기', '허탄한 지껄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허탄한 지껄임에 빠지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른 교훈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하는 말, 확증하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여기 율법의 선생이라는 말은 당시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써 구원에 이르는 줄로 착각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힘써 준행하기 위해서나 모세 율법에 대한 진리탐구에서가 아니라 대중 앞에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그릇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주의와 영지주의가 혼합된 기막힌 교리로 무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잘못된 확신도 확신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거짓 교사들이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확증하는 것이라는 말은 딛 3:8절과 이곳에만 나타나는 말로 '굳세게 말하다', '강력히 주장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말은 거짓 교사들이 율법에 대하여 말하였으면서도 그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허무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올바르게 이해되고 사용될 때 선한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선하신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생활 규범으로서의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마5: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비록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나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롬 7:7),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하는 기능을 지닌 것입니다(갈 3:24).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蒙學先生)이 되어'라고 말씀했습니다(갈 3:24). 또한 '율법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선포한 거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어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율법의 기능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율법을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율법의 종이 되도록 인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9-10절에서 율법을 설명합니다. 십계명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이 내용 들은 옳은 사람, 즉 의로운 사람을 대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9-10절“~~아니요. 오직 ~~~~위함이니”라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불법한 자, 복종치 아니하는 자, 경건치 아니한 자, 죄인, 거룩하지 아니한 자, 망령된 자, 아비를 치는 자, 어미를 치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사람을 탈취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율법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죄를 지적하고, 자기가 지은 죄를 죄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죄라는 것을 지적해서 알게 해 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꾸 이것을 가지고 의를 세우려고 하고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가장 최악의 조합은 이것이 영지주의와 만나 영지주의적 율법주의가 되었을 때입니다. 이럴 때는 온갖 신앙생활의 해로운 것들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바른 교훈(5, 11절)
그렇다면 바른 교훈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일단 바른 교훈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입니다. 바른 복음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변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5절에 “교훈”이라는 말은 파랑겔리아(paraggeliva) 로 옛날 성경에는 경계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명령, 혹은 선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의 목적은 뭡니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변론이 아닙니다. 앞에 있는 말들은 사랑을 수식하기 위한 단어들입니다. 청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중요한 초점입니다.
청결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허탄한 욕심이나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나뉘지 않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는 마음입니다. 선한 양심은 다른 곳에서 악한 양심도 있고 화인 맞은 양심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 역시 나뉘지 않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양심이라는 말은 ~와 함께 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은 그 말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복음은 결국 사랑으로 열매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마음이 청결하고 선한 양심을 가진 거짓이 없는 믿음에 기초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교훈은 11절에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은 신화와 족보를 통한 변론과 율법주의를 통한 자기 의를 꿈꿉니다. 그러나 바른 교훈, 즉 올바른 복음은 사랑을 꿈꿉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딤후 4:3~4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사도 바울이 가장 마지막에 쓴 편지인 디모데 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른 교훈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성경은 신기하고 새로운 해석을 따르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바른 교훈, 진리의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지엽적이고 주관적인 해석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변론이냐 사랑이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를 세우고 사람을 세우는 사랑이냐 아니면 공동체를 해치고 무익한 별론과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느냐가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의 유혹은 지금도 거세기만 합니다. 모양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시대의 다른 복음도 여전히 이 편지가 쓰여질 때와 흡사합니다.
얼마 전 이단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윤ㅇ윤ㅇㅇ 실장이라는 분이 한 말입니다. 모든 이단들의 수뇌부들은 자신들이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왜 다른 교훈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그렇게 열심을 냅니까? 그런 모든 이단의 배후에는 더러운 탐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그런 더러운 사기에 휩쓸려간 어리석은 성도들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바른 복음, 바른 신앙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른 교훈이 가는 길입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하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 바른 복음을 어렵도다 하면서 자꾸 하늘에서 직통 계시를 받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버리셔야 합니다. 힘들여서 말씀을 공부하고 배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더해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순종할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대할 때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7월 첫 주 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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