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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하나님 (고후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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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하나님/고린도후서1:3-7




우리의 삶은 한 권의 책을 쓰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대필해주지 않고 스스로 저자가 되어 엮는 한 권의 책을 누구든 쓰게 됩니다. 지난 페이지에 비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지 못했어도 돌아보기조차 아프고 힘든 페이지이었다 해도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아직 책에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새 페이지에 아름다운 것과 행복한 것으로 쓰면 됩니다. 골이 깊어야 산이 높은 것이니 과정에 힘겨워하지 마십시오. 결론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인생에 마지막 페이지는 ‘후회함이 없다’고 썼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루었다’ 쓰셨습니다. 그러나 험난한 과정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난 페이지가 힘들고 고단했던 것은 이 새로운 페이지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싶습니다. 급반전시켜 내용을 감동스럽게 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지요.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가 앞에 놓였다 합시다. 우리 손에 있는 펜이 아름다운 수식어로 가득하고 실속 있는 내용을 열거 낼 것입니다. 과거는 다시 쓸 수 없으나 미래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오늘부터 멋진 책을 완성하기 위해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갑시다. 언젠가 책장을 덮는 날이 오겠지요. 오늘 나태하면 미완성의 작품이 되고 무분별하게 살면 추한 작품이 될 것이니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의 노력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



쇠는 뜨겁게 달구어질수록 단단해집니다. 우수한 쇠일수록 그 만큼 더 오랜 시간을 불속에서 달구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서 인생을 돌아보며 새롭게 깨달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의 증거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고난 속에서도 동력을 잃지 않는 하나님의 위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선포하는 것은 고난과 고통의 길을 반드시 걸어갑니다. 삶의 현장에서 다양하게 겪는 고난을 하나님의 위로로 극복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환난이 있습니다


본문 3-4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에서 9번이나 사용한 환난의 헬라어 “들맆세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요16:3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고 위로하시는 중요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위로 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하셨습니다. 고난과 환난의 목적은 우리를 온전하고 굳건하고 강하고 견고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이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시119:71).



서울 외곽에서 만두집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가게의 단골손님 가운데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두집에 오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먼저 오실 때도 있었고 할머니가 먼저 오실 때도 있었습니다. 만두집 주인이 보니 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습니다. 들어와서 식탁에 앉으면 할아버지는 반가워서 할머니의 손을 만지작거립니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음식을 다 먹고 나갈 때는 두 분이 아쉬운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나갑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가게 주인은 이분들의 관계가 궁금했습니다. 이분들은 부부인가? 아니면 못 이룬 첫사랑인가? 아니면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던 어느 수요일 날입니다. 할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힘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드시질 못합니다. 할아버지가 애처로이 울었습니다. 이 두 분은 얼마동안 있다가 나가시는데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부축하여 나가셨습니다. 그 날 이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더 이상 이 가게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게 주인은 궁금했습니다. 왜 안 오실까? 몇 달이 지난 후에 할아버지가 혼자 오셨습니다. 그런데 슬픈 표정이었고 너무나 초췌해 보였습니다. 가게 주인이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합니다. “안 와요, 아니 못 와요. 죽었어요.”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두 분은 부부입니다.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 집에서 살았고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작은 아들 집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노인들 모시는 문제로 가족회의가 열렸지요. 큰 아들 부부와 작은 아들 부부와 우리 부부가 모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다 같은 며느리인데 저 혼자만 시부모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아이들이 결정을 했습니다. 나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 집으로 가고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작은 아들 집으로 가기로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같이 있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우리들을 생이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견우직녀처럼 매주 수요일 날 여기서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 달 전 할머니는 천국에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이런 말로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요. 그러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우리는 천국에서 함께 살 수 있거든요.”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환난과 고난과 고통이 많습니다. 질병, 경제, 자녀, 가족, 의식주 문제, 노후 문제 등......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까닭없이 옥에 가두고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바울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1:8-9)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안일함과 편안함과 형통함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환난에도 넘어지고 포기하고 주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위로가 있습니다


본문 5-6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우리를 위로하시는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육신으로 받으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십니다. 주의 제자는 주의 받으신 고난의 잔을 받아야하고 주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됩니다(롬8:17).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우며(골1:24) 주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갈2:20). 오늘 본문에 환난과 고난은 6회가 나오지만 위로는 9번이나 나옵니다. 환난과 고난보다 하나님의 위로가 더 많고 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인 것이었듯이 바울도 의식하였고 그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목격하고 위로를 받으며 지혜롭게 처신해 나감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바울이 받은 환난이나 위로가 모두 교회의 위로를 위하였고 그 위로가 환난을 받을 때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하였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해석자의 집에 이르렀을 때 해석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로 그를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서는 한 남자가 벽난로 옆에 서서 불을 끄려고 끊임없이 물을 끼얹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길은 더욱 뜨겁고 세차게 타오릅니다. 신비롭게도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불길은 더욱 세차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해석자에게 이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습니다. 해석자는 크리스천을 벽난로 뒤쪽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는 손에 기름통을 든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은밀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불에 기름을 붓고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묻습니다. “이는 또 무슨 뜻입니까?” 해석자가 말합니다. “이분은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지속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은혜의 기름을 붓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미귀가 아무리 방해해도 하나님 백성에게는 언제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잘 안보이는 벽 뒤에 서 계신 것도 보셨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넘친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마귀가 아무리 방해해도 주님은 끊임없이 은혜의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그 주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견고한 확신 속에 영원한 피난처이신 주님 은혜를 누리십시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해서 전진하십시오.



하나님의 위로는 순간적인 진통제가 아닙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환난과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하는 힘이며 능력이며 소망입니다. 그 위로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마치 우는 어린아이를 품에 감싸는 어머니 같으며(사66:13) 용기와 힘을 주는 아버지 같은 것입니다. 단순히 부드러운 위안에 그치지 않고 강한 도움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고 지금도 환난을 당한 우리 개인 개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으로 모든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마귀와 세상이 주는 환난과 고난보다 더 큰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위로자가 됩시다


본문 7절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고난과 위로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 그들의 구원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참여하는 자의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바울 서신에 13회 나옵니다. 교제, 협력, 동정, 헌금으로 번역됩니다. 성도의 교제의 구체적인 방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요소입니다. 교회란 위로 하나님과의 교제와 옆으로 사람과의 교제가 건전하고 신성할 때 있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으로 만드신 것은(창2:27) 사람과의 교제를 가지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 교제가 단절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속죄의 사역은 이 교제를 회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신성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 거룩한 교회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교제와 성도와 성도와의 두 가지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인생을 긴 야간열차에 비유를 했습니다. 그 속에는 지금 막 태어난 갓난아기로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색의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기 나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정해진 정거장에 내려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첫 번째 사람은 열차 안에서 부지런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에게도 어느 날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리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외쳤습니다. "이 돈 보따리를 다 줄 테니 내리지 않을 수 없느냐?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빈 몸으로 쓸쓸하게 홀로 열차에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승객은 사상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그도 어쩔 수 없이 열차에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남긴 글을 통해서 오랫동안 그를 기억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열차 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열심으로 도왔습니다. 결국은 과로로 쓰러져서 젊은 나이로 열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 그가 하던 일을 계속해서 행하기도 했습니다. 네 번째 승객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호소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이 열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지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확신에 찬 그의 음성은 사람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습니다. 지금도 인생의 야간열차는 계속 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많은 환난과 고난을 겪었고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나누어 주고 섬기는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자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더 많은 위로를 부어 주십니다. 상처 입은 위로자입니다. 우리를 흔드는 세상과 원수와 사탄의 세력이 강합니다. 바람이 아닌 뿌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어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는 하나님의 위로자로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위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평생 동안 환난과 고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가 더 크고 많고 강하고 영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 받은 하나님의 위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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