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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왕하5:1-27)

본문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왕하5:1-27절)




1. 자기 옷을 찢으며


오늘 이야기는 주일학교 시절에 수도 없이 들었을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치유 받은 이야기입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야기 속에 담겨진 의미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그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시대에 얼마나 높아졌는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왕에게 신뢰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 사가는 그가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큰 용사였던 나아만에게도 아픔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문둥병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둥병과는 다른 병이겠습니다만 아무튼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여자 아이 하나를 사로잡아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나아만의 아내를 수종 드는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이의 입술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이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하는 말이 “우리 주인, 즉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벼랑 끝에 있는 나아만에게는 복음 중의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자초지종을 고합니다. 그랬더니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써 주면서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하사했습니다. 은 십 달란트는 약 340kg의 은을 말합니다. 금 육천 개는 약 68kg입니다. 제 몸무게에 가까운 금인 것입니다.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가 되는지에는 너무 관심을 갖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일단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나아만이 이스라엘 왕에게 간 것입니다.


이 경우 번지가 잘못되었습니다. 아이가 말한 사람은 요단의 선지자 엘리사인데 나아만은 왕에게 찾아갔으니 황당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더구나 여호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자기 옷을 찢으면서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라혀 함인줄 알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이스라엘 왕은 뭔가 핑계를 만들어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행한 것도 해석자가 비틀어져 있으면 비틀어진 해석을 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부분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이 사는 법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사가 사람을 보내어 그 사람을 내게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이야기는 나아만과 엘리사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거들먹거리면서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나아만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입니까? 아람 나라에서 존귀한 자입니다. 왕이 그렇게 극진히 위해 줄 정도로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일개 촌구석의 선지자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영접할 것이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찾아간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크기와 재물의 크기...


그러나 나아만의 예상은 형편없이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엘리사는 문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으며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여기서 본문이 던지는 첫 번째 메시지가 있습니다. 복음 앞에는 다른 것을 가지고 나오면 안 됩니다. 엘리사는 지금 많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에게 잘 보여서 그가 가져온 물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엘리야의 뒤를 좇아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그의 신분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분과 재물로 나온 나아만을 홀대한 엘리사의 태도는 복음 앞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타산지석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앞에 다른 자존심을 가지고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돈과 신분으로 구원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이런 모습은 목회자로서 마음에 담아야할 자세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나아만이 만난 종교인들이 다 자기에게 굽실거리고 버선발로 나와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3. 치료를 향한 걸음


나아만의 축복은 주변에 좋은 신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축복은 나아만이 그런 신하의 말을 들을 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종들이 대노해서 돌아가려는 나아만을 말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물 보다 깨끗했습니다. 거기서 몸을 씻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나아만은 엘리사의 처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나아만은 뭔가 손을 얹고 기도를 한다든지 초자연적인 어떤 치료 행위를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가는 길입니다. 그런 나아만에게 종들이 말합니다. 이 보다 더 심한 일을 하라고 했으면 어떻게 했겠느냐? 하물며 씻어 깨끗하게 하라는데 그것을 못하면 되겠느냐고 충언을 한 것입니다.


사실 나아만은 대안이 없습니다. 쉽게 고칠 수 있는 질병이었다면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계집종으로 잡혀온 아이의 말을 듣고 움직여야 할 만큼 나아만의 병은 고통스러웠고 대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이 믿음이 있어서라든지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노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냥 하라고 하니까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요? 이 나아만의 치유 사건을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인용하십니다.



눅4:27절입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가버나움 회당에서 첫 설교를 하셨을 때에 아주 은혜로운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눅4:22절을 보면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운 말을 은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기이히 여기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나아만 이야기는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을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사렙다 과부 이야기와 함께 하셨는데, 이 사렙다 과부도 이방인이고, 나아만도 이방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고,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아무도 고쳐주지 않고, 오직 나아만 한 사람만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아만 사건의 숨겨진 또 하나의 진실은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행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아만을 고쳐주시고,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 나아만의 입을 통해서 그 불신앙이 팽배하던 시대를 향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4. 나아만이 사는 법


자, 마지막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깨끗하게 나은 나아만은 그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재물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처음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던 사람 나아만은 어디로 가버리고 하나님을 만난 새로운 사람 나아만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는 이 치유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치유는 단순한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나아만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엘리사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나아만이 가져온 그 엄청난 예물을 거절하는 엘리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더구나 이 재물 때문에 그의 사환이었던 게하시는 엄청난 시험에 빠져서 뒤 쫓아가 재물을 얻었다가 평생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하시는 자신이 처해져 있는 현실이 힘들었고 또한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즉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너무 자주 세상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게하시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입니다. 가난할 수 있지만 믿음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기를 꿈꾸지 못하고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믿음에 걸치고 살아가는 게하시는 어쩌면 우리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하지만 복음은 판매용이 될 수 없다는 분명한 원칙을 지켜가는 엘리사에게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이 치유는 엘리사가 한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받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지만 그것을 엘리사가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런 엘리사가 참 좋습니다.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제게도 재물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팔아서 재물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치유를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사가 이 재물을 받았더라면 나아만의 감동은 절반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정당한 재물을 구해야 합니다. 재물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여기서 나아만의 반응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는 아람 나라의 중요한 장수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흙을 두 수레 가지고 돌아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해를 구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왕이 림몬의 신당에 들어갈 때 자기를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도 함께 몸을 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햇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초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 대단한 신앙입니다. 이 나아만의 모습은 성도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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