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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자들이니 (시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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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자들이니 시16:1-5, 벧전2:5-10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비유 중에 탕자의 비유를 잘 아시죠?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아도 죽일 놈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것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고 창기와 함께 놀아나다가 탕진을 했습니다. 남의 집 돼지 키우는 일을 하다가 몸도 망가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폐인처럼 되어 스스로 자신을 보아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보아도 용서가 되지 않아서 "이제라도 염치는 없지만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가서 감히 아들이 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일꾼 중의 하나로 여겨 밥이나 먹여 달라고 하자"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방탕한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진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뛰어 나가서 얼싸 않고 맞아들입니다. 그리고는 소를 잡으라, 목욕을 시키고 가락지를 끼우라, 잔치를 베풀라 하고 아버지는 탕자를 여전히 완전한 아들로 영접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관점과 아버지가 나를 보는 관점이 극과 극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면서 자신을 비하하고, 경하게 여기고, 비굴하게 생각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보시고 여전히 천하보다도 더 값이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16;3)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은혜입니까? 그래서 칼 발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다 두개의 얼굴을 보게 된다. 하나는 십자가를 볼 때 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오죽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면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 시키시면서 까지 나를 대속해야만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숙연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는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값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면서 까지 나를 살리려 하셨겠는가!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다 죄송한 마음과 기쁨의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된다."고 고백 했습니다. 두 분문을 중심으로 “존귀한 자들이니”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성도의 존귀는 그 뿌리가 성 삼위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귀한 사역을 살펴보면 성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는 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셨고, 예수께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실 때 위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고,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임하심으로 공식적인 복음 사역의 시작이 열리게 됩니다.


성도는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진리를 알고 믿게 하여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죄에서 해방 됩니다. 성도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성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도라는 귀한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성도란 성 베드로, 성 누가, 성 요한이라고 부르듯이 성자에게 부르는 이름, 아름답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예수를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로 못난 짓을 하고 우리의 인격이 모자라도 성도라는 존귀한 칭호가 붙여집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그리고 그 삶속에 구원 안에는 놀라운 비밀, 영광스럽고 신령한 축복이 그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신약 본문 벧전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의 신분을 *첫째, 택하신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15:16에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다. 엡1:4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부터 우리를 구별하여 택하셨습니다. 이 영광은 일류 대학에 뽑히고, 일류 회사에 뽑히고, 운동선수들이 국가 대표로 뽑히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여러 가지 특권이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10:19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해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으로 천사도 흠모할 너무도 귀한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거룩한 나라입니다. 마12:28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심령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각국 대사관을 살펴보면 각각 자기들 나라의 깃발이 높이 달려있고, 그 대사관 관내는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고, 자기가 속한 나라의 주권과 그 나라의 통치를 받도록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는 신자들은 비록 이 죄악의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세상의 권세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아래 주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 물건의 소유주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앉던 의자는 일반 의자와 다를바 없지만 그 가치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시므로, 그 가치가 엄청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떠난 나는 생명도, 구원도, 천국도,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성도의 존귀함의 뿌리는 성 삼위 하나님께 있음을 명심합시다.


2.존귀한 성도에게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첫째로 ‘나의 주시라’는 고백입니다. 본문 시16::2에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했습니다. 여기 나의 주님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도나이입니다. 영역에서는 'Lord' 로 번역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합니다.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자, 나의 구주, 나의 왕, 나의 반석이십니다. 성도는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능력의 체험은 예수님을 나의 주로 모실 때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셔 들이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다윗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여 존귀한 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는 고백입니다. 본문 2절에 "주밖에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복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과의 정직한 관계가 바로 복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다윗은 결코 물질이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평성대가 복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가 복입니다. 그로부터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안에는 온갖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각양 좋은 것들은 위로부터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디서도 복이 없습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믿었던 요압도, 아들도, 아내도 큰 실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복으로 믿었습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을 복으로 삼고 담대히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나의 즐거움이라’는 고백입니다. 본문 3절에 "나의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윗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당하는 아픔이 크더라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가 되기를 언제나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는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시16:11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기쁨도 없다고 고백하며, 돈을 사랑하는 것, 명예를 사랑하는 것,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 아니라 주님만이 자신의 즐거움이라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즐거움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이라고 찬양하는 다윗이 사랑스러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그 자체가 기쁨과 즐거움이라 선언하는 다윗의 고백을 받아주신 하나님은 그를 존귀한 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을 하는 성도로 삽시다.


3.존귀한 성도에게는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 시16:5-6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복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복이고 다음은 천국이 기업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늘과 이 땅의 온갖 아름다운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복이시고 예수 안에서 온갖 아름다운 것을 주셨다는 것을 믿고 날마다 기뻐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 앞에 기적이 있고 이 복음적인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십니다.


시16:7-8에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 구절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밤이고 낮이고 하나님의 훈계와 교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모습입니다. 왜 발전하지 못하고 교만합니까? 목표가 축복과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목표한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 교만으로 가는 길밖에는 더 없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학생들이 공부 잘해도 세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대학입학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도 그렇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히12:1-3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했습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이 땅에서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존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의 믿음 가지고, 날마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보물 삼고 날마다 해와 같이 기뻐하며, 매일매일 십자가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존귀하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두 분문을 중심으로 “존귀한 자들이니”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도의 존귀는 그 뿌리가 성 삼위 하나님께 있습니다.


◉.존귀한 성도에게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존귀한 성도에게는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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