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교부들의 금언집 을 펼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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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토스카니를 지나가면서 오래된 수도원에 들어간 일이 있습니다. 바람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새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수도원, 사람의 흔적조차 느낄 수 없었던 수도원 뜰을 밟으면서 고요한 적막을 뚫고 수백 년 지나도록 들려오는 수도사들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은 4세기에 꽃피웠던 수도원의 영성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사막교부란 주로 이집트 북부에서 생활했던 교부들을 가리킵니다. 사막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곳이고, 처절한 고독의 수련장이지만 성령님과의 일체감을 누렸던 지성소였습니다. 이 사막에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만나 영성을 키웠고, 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모든 것과 단절된 사막이지만 하늘로부터 사다리가 내려온 곳이 사막이었습니다.
그들이 드린 기도는 소박한 언어였지만 진실했고, 매일 따로 드린 기도 시간이 있었지만 삶 자체가 기도의 연장이었습니다. 소박한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는 세상을 가져도 누릴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사막교부들은 인류를 위해 고통스럽게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았고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를 교과서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느꼈던 삶의 불편함과 하늘과 마주하며 느꼈던 처절한 외로움은 수치와 멸시를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가는 통로였습니다.
“어느 수사가 모세 교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자기 이웃을 위해 죽는게 됩니까?” 원로는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무덤 속에 있은 지 이미 3년이 되었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깊이 하지 않는 사람은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걸세.” 살아있는 몸을 가지고 3년을 죽은 것처럼 살아낼 수 있다면 욕망도 분노도 실망도 미움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살고자 달려가는 세상에서 사막 교부는 죽으라, 다시 죽으라고 외칩니다. 그 가르침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의 뒤를 따라간 수 많은 제자가 모두 보여준 삶입니다.
막막한 사막에서 오랜 세월 하늘과 땅을 마주했던 교부들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은 채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만족이 아니라면 우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 무엇인가를 통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방을 채우러 달려갈 것입니다. 토스카니 수도원, 그 적막한 뜰을 거닐면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그 때 하늘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잠시라도 세상을 뒤로 하고 하나님만을 그려보는 눈으로 다가오는 주님의 새로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주님이 허락하시는 그 깊은 영성의 샘물을 마시기 위해 우리도 자신의 광야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류응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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