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난 후의 미소를 아십니까? (마 5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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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난 후의 미소를 아십니까? (마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 수훈의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따를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슬픔을 싫어하며 슬픔을 피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이 슬픔과 고통과 번뇌의 세상을 피하여 산중에 깊숙이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슬픔을 도피해서 사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슬픔의 한가운데서 슬픔을 체험하며 그 속에서 복을 받는 것이 기독교가 전하는 역리적인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슬픔의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슬픔의 렌즈를 통해서 보게 될 때에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깊이를 알 수가 있고 ‘이것이 인생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을 같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상처 없이 위대하게 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로역정(天路歷程)’을 쓴 저자 죤 번연(John Bunyan)은 젊었을 때 군대에 나가 보초를 서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친구에게 부탁하여 대신 서 있게 하고 마을에 나가 일을 보고 돌아오니 그 친구가 그만 적의 저격을 받아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에 번연은 자기 대신 죽은 친구의 죽음 앞에서 비통하게 울면서 떠올랐던 작품을 썼는데 그것이 성서 다음으로 읽혀지는 천로역정입니다.
최근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친구들이 쓰러져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 실존주의적인 새로운 신학을 수립했습니다.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선생은 일찍이 남의 첩이 된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는 폐를 앓았습니다. 그리고 고베의 빈민굴 속에 들어가 수많은 한숨과 눈물 속에 지내면서 그의 삶이 성숙해졌습니다. 우리는 그의 자서전 ‘사선(死線)을 넘어서’를 보면서 슬픔과 비애 속에서 위대한 삶을 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슬픔을 도피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안고 그리스도 앞에 나아 와 그 슬픔 속에서 위대한 복을 받게 합니다.
우리가 자칫 슬픔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모 형제를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원망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슬픔을 통하여 새로운 복을 약속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40일 기도회 셋째 날로서 마태복음 5장 4절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서울 하늘이 굉장히 공해로 말미암아 맑지를 못합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다가 보면은 판교에서 서울로 넘어 오는 언덕에서부터 서울 하늘이 뿌여게 안개 낀 것처럼 낀 것을 볼 수 있고 남산 타워에 올라가서 서울을 보면 내가 저렇게 공해가 많은 곳에 살고 있나 하는 것을 깜짝 놀랄 만큼 느낍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온후 서울의 모습은 아주 맑은 먼지를 닦아 버린 유리창처럼 깨끗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도 공해가 가득차 있을 때에 하늘이 흘린 눈물이 모든 공해를 다 씻으면 맑게 되듯이 우리가 오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우리의 삶 속에 참 눈물과 애통이 있는 사람은 그 울고 난 후에 아름다운 은혜의 미소를 얻게 되어질 줄 믿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은혜, 우리의 삶 속에 마치 비오기 전의 때로 가득찬 우리의 삶이라 할지라도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비오고 개인 맑음과 같이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좋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줄로 믿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 애통이라는 말에 대해서 첫 번째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애통의 원어적 뜻은 이렇습니다.
애통의 원어적 뜻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애통이란 말을 희랍어로 펜데오네테스(πένθούνέτές)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슬픔 중에 가장 강한 고통스러운 슬픔입니다.(창37:34-35, 눅7:13)
가령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거나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에 가슴이 찢어지며, 숨이 막히며 온 마음과 온 몸이 떨리며 뼈까지 쑤시며 고통을 느끼는 슬픔을 당할 때에 가리켜서 애통이라 하는 πένθούνέτές라는 희랍어를 쓰게 됩니다.
이런 장면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가 있는데 창37장 34절에서 35절까지 보면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야곱이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사실 형제들 간에 미움을 통해서 요셉이 팔려 갔는데 그 형제들이 아비에게 와서 보고하기를 짐승이 물어 죽였다고 보고하게 되었을 때에 아들을 잃은 아비 야곱의 슬픈 광경을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아픔의 슬픔을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그는 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애통이라는 말은 가장 고통스러운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에 나인성 과부가 사랑하는 자기의 독자 아들이 죽었을 때에 슬피 울며 애통하는 광경을 주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그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죽은 자의 관에 손을 얹고 그 청년을 죽은 자리에서 일으켜 주었던 말씀을 읽어 본 것과 같이 그러한 슬픔을 가리켜서 애통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슬픔 속에서도 부모가 자기 앞에 자식을 먼저 세상을 떠나게 하는 고통스러운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과연 더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우리가 해 볼 때에 그러한 슬픔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개 부모 앞에 자식이 먼저 가게 될 때에 이것을 부모 앞에 숨기게 되는 이러한 광경까지 보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되며, 또한 자식 앞에 충격을 받아서 부모도 쓰러지는 그러한 광경을 우리가 많이 보게 됩니다.
바로 여기 애통이란 말은 그런 강한 고통스러움의 슬픔을 가리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 애통스런 슬픔의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자는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2. 자발적인 의식 있는 행위의 슬픔입니다.(약4:9-10)
다음으로 애통이라는 원어의 두 번째 뜻은 자발적인 의식 있는 행위의 슬픔을 가리켜서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 스스로 슬퍼하는 의식을 가리킵니다. 슬픔을 당하는 것이 외부적인 슬픈 일 그런것 때문에 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슬픔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고통을 느껴야 하는 시간에 고통이 없고 마음의 아픔이 있는 사람이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할 때 그런 심령은 심판 받아야 마땅한 심령이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은 자발적이며 의식이 있는 분명한 행위로서 스스로 슬퍼하며 스스로 애통할 줄 아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이 있을 때에 참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기자는 야고보서 4장 9절에서 10절에 말하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주 앞에서 낯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떤 외부의 슬픔 때문에 슬퍼하는 이러한 슬픔보다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질 때에 정말로 나 자신 속에서 잘못된 사람이었구나, 나의 실체를 볼 때에 나는 과거에 이렇게 더러운 인간인 줄을 몰랐는데 나의 실체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서 나 자신을 바로 발견하게 될 때에 누가 강압적으로 말함에 있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볼 때에 자발적인 의식에서 이 죄인, 이 못된 인간, 이 죽을 자식이라 하고서 자신을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그야말로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발견하고서 슬퍼할 줄 아는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자신의 모습을 언젠가 한번은 보고서 거기에 대한 자신을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본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직까지 우리의 실체를 정확하게 발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들이 전과 같이 살고 있다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한다고 한다면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의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잘 바라보고서 우리가 정말 자발적인 의식에서부터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 자백할 수 있는 이런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자가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3. 심령이 가난 후 오는 성도의 두 번째 경험입니다.(시51:17, 롬7:24)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심령이 가난의 한계를 지닌 사람들에게 오는 성도들로서 두 번째 경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심령 가난은 우리가 자범죄를 비우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면 여기 애통이라는 말은 우리가 원죄를 비운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심령 가난은 물세례를 받는다는 것에 상태라고 한다면 애통이라 하는 것은 성령 세례를 받는 상태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죄가운데 살던 자범죄를 비운 것은 심령 가난으로 비우고 그리고 우리의 원 뿌리 속에 있는 원죄는 애통으로 말미암아 저 깊은 뿌리 속까지 뽑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슬픔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슬픔이 저절로 납니까? 깊은 우물 속에서 물을 길어 내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 깊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눈물이요 슬픔이요 애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발적인 의식에서부터 나타나는 슬픔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외부적인 충격에서 나오는 슬픔은 어떻게 생각하면 건수라고 말한다면 자발적인 의식에서 나오는 눈물은 깊은 생수에서 나오는 이런 샘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통은 우리의 원죄를 비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51편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우리가 정말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멸시치 아니하시고 그 눈물을 보시고 그 애통을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서 바울 사도와 같은 사람도 자기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어질 때에 그야말로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스러움의 모습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가 죽을 몸과 같은 사람이 되었노라, 나를 누가 건질 것이냐 하고 애통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진정 우리가 자범죄를 비우는 심령 가난 후에는 반드시 성도는 두 번째 경험인 원죄를 비우는 애통의 경험까지 우리의 믿음 생활 속에 그 단계를 거쳐야지만 참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 되어질 줄 믿습니다.
애통하는 심령, 내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생수를 파헤쳐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눈물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애통의 의미를 3가지 차원에서 생각합시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애통의 의미를 크게 3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일반적인 의미의 애통이 있습니다.(시6:6, 42:3) 〈육체적〉
이 말은 다른 말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현대인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일반적인 의미의 고통은 우리들에게 좋은 일들을 가져다주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시편 6편6절에서 “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하고 말하고 있으며, 시편42편 3절에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순간 순간 하나님 앞에 절망스러운 그러한 상황에서 또한 죄가운데 거했던 그가 늘 항상 눈물로서 자기의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음을 그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반적인 의미의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자신을 더욱 진실하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리게 되었던 본질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며 밝은 눈으로 자신을 보며 밝은 총명으로 생각하게 되어질 수 있는 겸손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질 때 얻어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애통해 보지 아니한 사람은 자신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슬픔을 당해 보지 아니해 본 사람은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애통은 친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웃을 때 나를 찾아오는 친구와 애통할 때 나를 만나 주는 친구가 다른 것입니다. 누가 참으로 나의 친구인가? 슬퍼하는 시간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애통을 이해하는 자, 내가 슬퍼할 때 그 슬픔에 동참해 주는 친구, 그러한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참으로 좋은 친구를 영접하게 되어진다는 것이 바로 슬퍼할 때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좋을 때에는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많이 오지만 슬픔을 당할 때에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찾아옵니다. 슬픔을 당할 때에 진정한 친구가 얻게 되어지는 은혜도 우리에게 있게 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일반적인 애통을 통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얻게 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울어 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것을 울게 되어질 때에 비로소 알게 되어지니 정말로 우리가 슬퍼하고 애통하는 경험을 한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발견 할 수 있는 이런 좋은 은혜를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한 간증들을 들어봅니다. 사업이 잘 때에는 자기 교만 가운데 있다가 사업이 실패할 때에 슬픔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는 경우라든지, 건강할 때에는 세상적인 쾌락에 살다가 몸이 아플 때 비로소 애통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는 이런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애통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접하는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정말로 어떤 슬픔과 애통을 당할 때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진실성을 발견할 수가 있고, 누가 나의 참 친구인가를 바로 발견 할 수 있게 되어지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복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 자기 자신에 대한 애통이 있습니다.(눅7:38, 15:18) 〈회개〉
이것은 회개의 애통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학자 가운데 부르너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잘못 탄 기차 안에서의 선행은 무효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서 그 속에서 웃고 즐기고 향락하며 그 어떤 선행을 행한들 그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왕복 거리가 필요한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 해 놓고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왕복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철저히 가려서 잘못하여 갔던 그곳을 다시 돌아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회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에 대한 잘못된 것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간 길, 잘못 탄 기차 속에서 웃으며 살았던 인생의 길들을 철저하게 애통하여 회개하는 이런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7장 38절에 한 죄인 된 여인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았음을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처럼, 또한 누가복음 15장 18절에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하는 이런 슬퍼하며 애통하는 진실된 회개의 역사가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세상을 향한 애통이 있습니다.(렘4:19, 롬9:2,12:15)〈사랑〉
이것은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때까지 어떤 일반적인 애통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애통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 볼 때에 그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망해 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우는 것을 가리켜서 세상을 향한 애통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4장 19절에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고 말함과 같이 그야말로 민족을 향해서 슬피 우는 슬픔의 눈물의 선지자라 별명을 얻기까지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던 것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말한 것과 같이 바울 역시 로마서를 통해서 거치지 않는 고통 속에 있었음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는 자기 자신 때문에 아니라 자기의 그 어떤 육체의 가시 때문도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너무나도 안타깝기 때문에 그들을 향한 사랑의 눈물, 사랑의 고통을 그는 당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바라 볼 때에 정말 슬퍼할 수 있는 아름다운 애통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어야만 될 줄로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 오면서 슬피 울게 되어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뒤를 돌아보면서 여인을 향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가족과 너희 민족을 위하여 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에 내 이웃, 내 가족 그리고 이 나라 이 백성들이 멸망할 죄악 가운데 거하여 사는 것을 볼 때에 얼마나 우리가 애통해야 할 일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세상을 향해 사랑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이런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셨을 때 3번 눈물을 흘리신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는데, 사랑하는 자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그 무덤 앞에 오셔서 슬피 울어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흔히들 우리가 생각하기를 이 사랑의 눈물이라고 하면 청춘 남녀의 사랑인 에로스의 눈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랑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전적인 무조건의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으로서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애통할 수 있는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습니다.
진심으로 이와 같이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위로하시는 은총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1. 넓은 의미에서 애통 자체가 복입니다.(고후7:10-11)
울고 난 후의 미소를 비가 온 후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곳처럼 정말 우리에게 눈물 없이는 인생의 가장 귀한 가치성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눈물의 노력이 있어야만 성공의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흔한 말 가운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속담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눈물이 없이 어떤 것도 배울 수가 없고, 세상에서 눈물이 없이 최고의 성공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이 애통 자체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목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는 닭이 울 때마다 그의 평생 하나님께 새로운 다짐의 기도를 올려서 그래서 그는 성공적인 생을 마쳤다는 이런 기록을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가 세 번 예수님을 배신할 때에 닭이 운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는 그 때 그 실수, 그로 인해 그 통곡함이 자기의 일생을 좌우하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뼈아픈 고통스러움의 슬픔을 진짜 눈물로 애통해 본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 전체가 복된 길로 들어갈 수 있는 이런 은혜가 있게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그 어떤 고통과 슬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된 길에서 이탈되지 않고 인내하여 승리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슬픔을 당한 이것은 때로는 우리의 인생의 향로를 바꿀 수 있는 은총의 역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같은 사람은 그의 친구가 갑자기 죽었을 때에 충격 받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유명한 사람이 되게 되었습니다. 성자 프렌시스같은 사람도 심한 중병에 걸려서 거의 죽음을 맞게 되어질 때에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성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 이런 복된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사실상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치고 애통하며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애통하는 것이 때론 큰 복된 길임을 기억하면서 고통과 슬픔이 올 때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고 승리하여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경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11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세상 근심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우리를 구원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 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누가복음 6장 21절에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로 18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베드로전서 1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편 126편 5절로 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현재 고통과 눈물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받는 사람들로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2. 위로를 받습니다. (갈1:1, 고전15:9-10, 엡3:8, 딤후1;15, 시51:3)
위로라는 말은 희랍어로 파라카리오라는 동사로 쓰였습니다. 이 파라카리오라는 말음 ‘곁으로 부른다’ 즉 애통하는 자는 곁으로 부른다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곁에 우리를 갔다 놓으신다는 말입니다. 자기 옆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큰 위로와 큰 은총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라카리오’ 자기 곁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삶이 되기를 원하며 우리가 어떤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낙심 절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가 삶 속에 늘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1장 1절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위로의 은총을 허락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절로 10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곳곳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위로와 은총을 허락하시는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3. 최후의 위로가 있습니다.(눅16:25, 요2:10)
슬픔과 한 숨이 사라지는 최고의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되어집니다. 누가복음 16장 25절에 우리가 잘 아는 부자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그가 하늘을 쳐다보니 자기 집에서 얻어먹던 거지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여기 거지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았다는데 우리가 그 당시 유대의 관습을 알고 보면 부자와 거지의 차이가 얼마나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먼지가 많이 나기 때문에 손님들이 오면 집에서 물이나 향유로 손과 발을 씻게 하는데 물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그렇지는 못하고 그래서 식사를 할 때 주로 주식이 빵이기 때문에 먼저 빵을 먹기 전에 빵의 껍질을 뜯어서 손에 있는 때를 씻고 버린 것을 부스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나사로가 그 부스러기를 주어 먹었다는 것입니다. 부자의 손 때 그것을 닦아 낸 빵 조각을 먹고살았던 거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손때를 빵으로 닦고 먹었던 그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그 때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겨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여 이 불타는 곳에서 나를 구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고통스러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최후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2장 10절에 우리가 잘 알 듯이 가장 좋은 포도주는 잔치 끝날 무렵인 나중에 나오게 되었던 것처럼 최후의 위로는 우리가 이 땅에서의 위로보다는 하나님께서 최고의 위로를 최후에 우리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애통하는 심령으로 철저히 자신을 회개하며, 세상을 향해 사랑의 애통을 하는 은혜의 심령들이 되어서 승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며, 애통으로 최후의 위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는 이와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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