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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마음 운동부터 시작합시다.(마 5:3)

본문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희생도 하고 봉사도 하고 십자가도 져야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복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화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복을 받는 것은 기복 종교라고 해서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초를 하신 설교는 산상설교로써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고 그 중의 첫 번째로 “마음(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는 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같이 기독교는 복을 받는 종교입니다. 행복하게 되는 종교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복을 어떻게 받느냐? 무엇이 복이냐? 하는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많은 소유를 가졌을 때에, 좋은 지위를 얻었을 때에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를 잘 믿으면 많은 소유도 얻게 되고 지위도 향상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격의 변화, 우리의 삶의 질적인 변화에 따라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소유나 지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기독교의 행복의 개념입니다.

우리의 의식주가 잘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이 행복해질 것 같으면 현대인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생활 환경은 분명히 향상되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의식주의 환경 변화를 이룬 만큼 우리가 행복을 누리느냐?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겐 과거보다 불행한 사람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정신병자가 많아지고 자살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생활 환경이 향상되었으면 모든 문제가 없어져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행복은 물질적인 소유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풍요하게 살고 있는 한 여자에게 “당신은 행복합니까?”하고 물으니까 그 여자는 “이 세상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하며 “이렇게 문제 투성이지요, 어려움 투성이 속에서 사는데 무슨 행복이 있습니까?“하고 반문하였다고 합니다.

문제가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고통이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문제가 없기 때문에 고통이 없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와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히4:15), 예수님께서도 오늘의 우리가 가진 문제와 고통을 똑같이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와 고통을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복된 삶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뉴욕의 어느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연구에 의하면 18살에서 34살까지의 연령층에서 가장 행복을 느낀다는 통계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 비교해 보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보다 6배나 더 행복하다는 통계입니다.

오늘 우리는 실용주의적인 인생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편리하고 복이 되고 행복이 되면 우리가 취하고,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오고 효용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것이 실용주의적인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을 갖지 아니한 사람보다 6배나 행복하다면 신앙을 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또한 성경적이요, 과학적인 행복된 삶의 조건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열심히 찾아 하나를 구했다고 합시다. 그는 그것을 얻는 순간 마음에 허탈감이 찾아 올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 인격의 변화에 있지 다이아몬드와 같은 수단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거기에 처하는 삶의 자세에 따라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40일 작정 특별 기도회 둘째 날을 맞이해서 「새 마음 운동부터 시작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마5;3을 중심 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이 기독교의 복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우리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결코 가난하기 때문에 복받는다는 말이 아니며 돈이 많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가난함으로 남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될 것이며, 남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풍성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난한 자’는 심령의 문제요, 마음이 가난함으로 복을 받는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첫째, 마음으로부터 종교는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앉으셔서 제자들이 나아 올 때에 입을 열어 가라사대 그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함으로 우리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도 하는 말 중에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말을 합니다. 마음부터 고쳐먹으라든지, 마음을 잘 써야 된다든지, 이와 같이 우리들은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잘 시작될 때만이 결과 또한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모든 종교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행16:14, 계3;20)

그래서 인간의 최고의 윤리 도덕을 강조하고 있는 모든 종교는 한결같이 마음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종교가 많습니다만 특별히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유교 가운데서는 인간이 도를 아는데는 사서삼경을 알아야 하고, 그 도는 적어도 허, 영, 지, 각, 진, 명의 수양이 이루어져야 객기의 사람이 아니요, 정기의 사람이 되어 견물치지하여 영대가 태연하고 표리통철해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 유교에서도 역시 마음으로부터 우리 인간의 모든 수양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가아, 가짜 자기를 버리고 무념무아에 들어가 진아, 진짜 자기를 발견해야 비로소 팔정도를 가지고 생불에 이르게 된다고 함에 역시 불교도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바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또한 두 말할 나위 없이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전지 전능하시지만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은 우리가 마음을 열 때에만 하나님의 역사도 우리 속에서 역사 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3;20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함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문을 내가 열고 들어가겠다가 아니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주어야만 내가 들어가서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문을 닫고 있을 것이 아니라 마음 문을 열어 놔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오늘 저녁 여러분의 마음의 문이 열려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여기에 천사가 와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 문을 열지 않고 꽉 닫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들어와서 역사 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계3;20에서 말하고 있는 이 마음 문이라고 하는 문은 보통 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 가정에 있는 문들이 안에서도 잠글 수도 있고, 밖에서도 잠글 수도 있고, 안에서도 열 수가 있고, 밖에서도 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문은 안에서만 잠그는 문이고, 안에서 열어 주어야 하는 문입니다. 소위 차임벨이라고 말합니다. 안에서 잠그면 밖에서는 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반 가정의 문과는 전혀 다른 문입니다.

옛날 임금이 왕후와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산책을 하는 곳이 비원인데 그 문은 밖에서는 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왕과 왕후가 산책을 하기 위해서 비원 문을 안에서 잠가 놓으면 밖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비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왕과 왕후는 비밀스러운 서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에서 열어 주지 아니하면 밖에서는 열 수 없는 문, 우리가 마음 문을 열지 아니하면 주님이 우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열지 아니하면 주님이 그 속에 들어가 역사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우리 기독교도 마음의 문을 열면서부터 시작되어지는 마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늘 항상 우리가 언제 어느 때 하나님 앞에 설 때라도 항상 마음 문을 활짝 열고서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아멘 하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행16:14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했다고 말함으로 빌립보 교회의 창설 멤버였던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바울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게 됨으로 자신이 은혜를 받게 되고, 또 온 가족이 은혜를 얻게 되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복을 얻게 되었으니 그 집으로부터 빌립보 교회가 탄생케 되는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진리의 말씀들이 있지만 특별히 이 빌립보서에 기록되어져 있는 말씀은 기뻐하라고 하는 말들을 수차래 말함으로 일명 빌립보서를 기쁨의 복음서라고 말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성경 진리 가운데 최고의 진리인 하나님께서 천하기 짝이 없는 이 지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에 대한 도성인신하신 기독교의 최고의 진리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여인이 마음 문을 열면서 시작되어진 교회가 최고의 진리, 도성인신의 진리를 얻을 수 있었던 복된 교회로 탄생되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역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만약 우리가 마음 문을 열게 된다면 여러분을 하나님이 붙잡으셔서 큰 진리의 역사로, 큰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눅24:45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고백한 말 가운데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역시 32절에는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고백함으로 우리의 마음 문이 열려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되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심령이 냉냉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 있습니까? 일단은 마음 문이 열려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가 만약 마음 문을 열게 되어지면 하나님은 그 열려진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 말씀을 깨달은 자의 심령을 뜨겁게 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문 열고 들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말씀으로 달아오르고, 말씀으로 뜨거워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욥33:16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라고 하면서 우리의 마음 뿐아니라 귀도 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119:18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함으로 역시 눈도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귀도 뚫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복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복된 귀를 가진 자는 들을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눈도 열려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은 밝아서 별의 것을 다 볼 수는 있어도 영의 눈이 어두워서 바로 보지 못하는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종교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한 이 심령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진실한 신앙이 되어야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2. 마음은 4가지 밭과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 인간의 마음을 4가지 종류의 밭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13:3-23에서 우리 인간의 마음의 밭은 첫째로 길가의 밭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길가의 밭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되어서 반들반들 하기 짝이 없음으로 거기에 씨앗이 떨어져 봤자 씨가 흙에 묻혀지지 않아 뿌리를 내릴 수가 없고 싹을 틔울 수가 없기 때문에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쪼아먹기 일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마음과 양심이 화인 맞은 심령, 마음이 굳어서 반들반들한 사람을 가르쳐서 말합니다.

둘째는 돌짝 밭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겉은 부드러운 흙이 있기는 있지만 그 흙이 두껍지 아니하고 얇은 흙 밑에는 돌들이 가득차 있어서 쉽게 싸기 나고 뿌리가 내려지지만 밑이 돌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함으로 햇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말라서 시들어져 버리고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왜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을 돌짝밭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가서 돌짝밭을 보게 되면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갈멜산을 올라가다 보면 좌우에 돌짝밭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돌짝밭은 우리 강원도에 있는 돌짝밭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돌을 치우고 치워도 한도 끝도 없이 돌이 자꾸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누구를 가리켜서 말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은혜를 쉬게 빨리 받는 사람, 그런데 뿌리가 깊이 내려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소위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소위 순간적으로 은혜를 받기는 받지만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냄비 신자라 비유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려면 가마솥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지 냄비와 같은 신앙 자가 되서는 안됩니다. 냄비는 물을 올려놓고 끓이면 요란한 소리를 내고 금방 끓습니다만 불에서 내려놓으면 금방 식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가마솥의 물은 금방 끓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지만 한번 끓은 물은 쉽게 식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방 아멘, 금방 주여, 금방 믿습니다 해 놓고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느냐 하는 냄비 신앙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인스턴트 인간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 밭이 가마솥과 같이 되어서 부글부글 소리는 요란하지 않더라도 쉽게 식어지지 아니하는 뜨거운 심령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는 가시밭과 같은 사람입니다. 유대 땅에서는 가시 떨기 밭이 가장 기름진 땅입니다. 가시 떨기 밑의 땅은 가시 떨기가 자라난 다음 그 잎이 떨어져 썩어 거름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가시 떨기 밑의 땅이 최고의 기름진 땅인 것입니다. 이 땅에 씨앗이 떨어지면 기름진 땅이기 때문에 다른 밭의 씨앗보다 더 빨리 자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시 떨기 때문에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고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말하는가? 사람은 좋습니다. 밭은 기름집니다. 그래서 가능성은 많고 남들보다도 마음만 바로 먹으면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인데 너무 복잡한 세상살이를 합니다. 사람이 좀 똑똑하다 보니까 여기 저기 단체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세상살이에 가시 엉겅퀴가 너무 많아 이리저리 엉키고 설켜서 그만 열매를 맺을 기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늘에서 자란 식물이 쉽게 시들어 버리고 열매가 바로 맺히지 않는 것은 이것을 가리킴입니다. 세상 재리의 염려, 세상 걱정, 근심, 세상의 이리저리 얽혀진 줄, 연줄들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서 가시밭과 같은 심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마음의 밭은 좋은 땅, 소위 옥토의 밭이라고 하는 밭입니다. 이 땅에는 씨앗이 심겨지게 될 때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옥토 밭은 최소한 30배”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과연 하나님 앞에 아직까지 1배도 열매를 거두지 못한 적은 없습니까? 아니 씨앗 값도 하지 못한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진짜 믿음의 사람, 옥토 밭을 가진 사람은 최소한 30배의 결실을 거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 충만히 줌으로 여러분의 삶 전체에 최소한 30배 이상의 은총으로 넘쳐 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혹자들은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30배, 60배 다음에 구구단의 논리에 의하면 90배라고 해야지 100배라고 했느냐. 예수님은 무식해서 구구단도 몰랐단 말이냐. 수학 원리도 몰랐단 말인가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만 그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30배, 60배 다음에 90배가 인간의 수치의 원리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원리의 법칙은 100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자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완전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숫자의 원리대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숫자의 원리대로 만족하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인줄로 믿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투자하면 이렇게 이익이 넘을 것이라고 하는 숫자의 원리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너희의 생각하는 숫자 원리를 지나서 너희가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완전케 채워 주시는 복의 원리로 30배, 60배, 다음에 100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하면 이렇게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우리의 삶에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진 그 숫자의 원리를 넘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숫자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복의 개념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복을 주시기를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시 떨기 엉거퀴를 모두 철거해 버리고 옥토의 밭으로서 우리가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새 마음은 성령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빌1:6, 롬8:9-14, 엡2:1)

새 마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변화되어질 수 있는 역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 중의 최고의 종교인데, 심령이 가난한 자인 이 새 마음의 역사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 함으로 새로운 마음의 변화가 우리에게 오게 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빌1:6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즉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8:9-14의 말씀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영에 관해 말합니다. “만일 너의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의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만이 우리의 모든 심령이 변화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수 차례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영적인 영의 모습은 살전 5:23에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의 영의 구조가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져 있듯이 영이 잘 되어지고 그 다음에 우리의 혼, 그리고 몸으로 연결되어질 때에 참된 영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되어지지 못한 삐뚤어진 영, 타락한 영은 히4:12-14에 보면 영이 먼저가 아니라 혼이 먼저 앞장을 서서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계획, 자기의 논리가 먼저 앞장섭니다. 영적인 생각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혼과 영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내 생각, 내 계획, 내 뜻대로 혼이 먼저이고 영이 다음이었던 삐뚤어졌던 우리의 영의 상태였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우리가 영이 먼저, 그리고 혼 그리고 몸으로서 정상적인 우리의 영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이런 복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엡2:1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함으로 원칙적으로 우리가 사실상 아담 이후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고 말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 속에는 별의별 악한 것들이 많이 있으니 막7:21-23에서도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13가지의 더러움의 악한 것들이 가득 차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1:29-32에서는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21가지의 더럽고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4:23-30에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우리가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을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으로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늘 항상 분을 내어도 해가 질 때까지 품지 말고 마귀로 하여금 우리의 삶 곳에 틈을 주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될 것이고, 우리의 손으로 수고하여 선하여 열심히 함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속에 들어와서 역사 하심으로 우리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되어질 수 있는 복된 삶을 영위하자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고후7:1에 바울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이 시간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21가지 혹은 13가지의 더럽고 추한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몰아내어 주시고, 새 마음으로 복을 주시는 귀한 은혜가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렘2:19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없을 때에 이것이 가장 추악하기 짝이 없는 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의해서 지배되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변화되어지고, 성령에 의해서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성령의 삶의 생활이 우리의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육에 속한 삶이 아니라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기 심령이 가난한 자, 이것은 우리 보통 가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때 예수께서 가난한 자가 복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혁명적인 말인 것입니다. 유대 나라는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가난한 것은 가장 저주스러운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몇몇 되지 않는 지도급의 사람들만 이 자만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은 얼마나 깜짝 놀랄 만한 혁명적인 말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심령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심령이 가난한 자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돈이 없고, 빈약한 것을 가난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이 가난이라고 하는 말은 〈프코코스〉라고 하는 희랍어를 썼는데 이 말은 매일 노동을 해도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없을 정도의 빈약한 가난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옛날 우리도 한 시절 그런 때가 있었지만 요사이 그런 걱정은 안하는 것같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육신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노동을 해도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하는 상태로서 우리의 심령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가지 아니하면 아니될 그런 상태로 되어 가는 것이고, 우리의 심령이 늘, 항상, 매일 노동을 해도 양식을 얻질 못하는 아주 빈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심령의 가난한 자가 되어질 때에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복된 삶이 되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1. 자신의 가난을 자각하는 사람입니다.(삿16:20, 마11:5, 시40:17)

첫째는 자기 자신의 마음의 가난을 자각하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삼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렉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던 삼손은 삿16:20에서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난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가장 큰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력을 얻는 길은 나는 아무 힘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길은 자기의 패배를 승인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른 사람이 되는 길은 우리의 부족과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어야만 됩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기의 속에서 힘이 떠난 줄을 모르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비극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 지를 자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을 때 첫째로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이 병이 든 것을 인정하고 있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병을 고칠 방법과 장소를 찾게 될 터인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깨닫지도 못하면서 깨달은 척, 죽을병을 앓으면서도 죽을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헬라 대 철인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함으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했으니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탕자가 가난해진 후에 자기의 가난해진 것을 깨닫고 내가 이러다가는 여기서 굶주려 죽겠구나 하고서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하고서 아버지에게 돌아감으로 그는 아버지의 복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난,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래서 왁슨이라고 하는 사람은 “가난은 신앙의 근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난은 천국 문전에 설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첫 걸음은 여러분 마음이 가난한 것을 깨닫는 겸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부르짖는 이런 심령으로 나 자신이 가난한 자인 것을 자각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입니다.(시34:6, 35:10, 눅15:11)

시34:6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을 때에, 시35:10에 “여호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번 기도회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하신 주제와 같이 우리가 구하는 자가 얻고, 찾는 자에게 찾아지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려지는 귀한 은총의 역사가 반드시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께 항복하는 사람입니다.(마16:24, 19:16-30, 계3:18,20)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마16:24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분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를 더불어 먹으리라”하신 계3:18,20의 말씀처럼 우리가 부요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벗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바로 발견하고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내 심령 속에 역사 하셔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심령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직도 하나님께 항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은 시간의 여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오늘 이 시간에 천부여 의지하옵소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손들어 버리는 이런 항복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의 주인입니다.

심령이 가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여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질 수 있는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금세의 천국이 있습니다.(눅17:21, 히8:5)

누가복음 17:21에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해서 마음의 천국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금세 세상에서 내 마음과 천국을 이루고 살아야만 합니다. 히8:5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땅위에서의 천국의 지점과 같은 장소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위에서 마음의 천국도 이루어야 되고 교회를 다니는 이 성전을 드나들면서 이 성전 생활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이 천국 생활을 이루어 나가길 바랍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찌뿌듯하고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교회에 대해서 불평이 있고 불만이 있는 사람은 이 땅위에서의 금세 천국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지점의 생활도 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본점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지점에서 근무를 잘 해야지만 그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되어질 때 본점으로 스카웃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생활은 천국의 지점 생활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지점 생활을 열심히 잘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본점에 이를 수 있는 복의 주인공이 되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 내세의 천국이 있습니다.(눅23:40, 계20:1-6, 21:1-4)

그리고 내세의 천국이 있습니다. 눅23:43에 낙원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죽으면 바로 그 낙원 천국에 갑니다. 계20:1-6에 천년 왕국의 천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21:1이하에는 영원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 천국의 주인공도 되어야겠지만 금세 천국의 주인공도 되어야만 합니다. 금세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야지만 내세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질 수 있는 길로 들어가게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3. 천국이 가까웠습니다.(마4:17, 3:1, 10:7, 눅10:11)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복음을 외칠 때 그 첫 번째 음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4:17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곳곳에서 주님께서 혹은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많은 사도들도 한결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내 심령이 완전히 추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던 모든 것들을 완전히 비워 버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질 때만이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는 말의 문장은 대단히 중요한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문에서는 "The King of heaven is at your hand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 천국이 그냥 보통 천국이 아니라 손이 닿는 바로 여기에 와 있다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앞에 가난한 심령이 되어질 때에 천국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손이 닿는 ‘At your hand’ 여기에 천국이 바로 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 속에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을 옥토와 같이 하사 성령의 충만함을 주소서. 나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항복하는 심령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금세의 천국 생활로 내세의 천국 생활의 복을 얻을 수 있는 천국을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주인이 되어질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귀한 사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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