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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 (마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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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라사대! (마 5:1-2)


오늘은 40일 작정 특별 기도회를 시작하는 첫째 날을 맞이하여 마5:1,2절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이번 40일 작정 특별 기도회의 주제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주제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수훈 말씀을 강해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번 작정 특별 기도회에 우리가 참여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부족한 종을 통해서 말씀을 준비시키면서 놀라운 말씀의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말씀의 풍성한 복을 반드시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첫째 날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 산상수훈의 본론에 대한 말씀보다는 서론적인 말씀으로 증거 하게 되겠습니다.


첫째,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1)


1.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어록이 많습니다. 성자들, 성인들, 철학자들 혹은 문학자들 혹 어떤 사람들은 인생 행복론자들 등등 유명한 명인들의 좋은 글귀들이 이 땅에는 많이 있지만 오늘부터 우리가 40일 동안 듣게 될 이 말씀은 세상 어떤 누구의 유명한 어록을 읽어 나가는 그런 시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듣게 됐다고 하는 점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주의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한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이 전부 다 진주처럼 귀하기 짝이 없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우리가 이번 기회에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역사적으로 볼 때 산상수훈의 말씀 이전까지는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의 말씀을 하시다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 400년의 기간은 암흑시대로서 어느 누구도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는 막막하기 짝이 없는 유대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예수님께서 오시어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신 후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하신 후에 주님께서 바로 마태복음 5장을 산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40일 동안 말씀을 듣게 되어질 때에 40일 기도 후에 당했던 시험에서 승리했던 주님의 승리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재함으로 말미암아 이 험한 세상을 그 어떤 시험과, 환란과, 역경 속에서도 능히 승리할 수 있는 이런 귀한 능력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생활이 날마다 날마다 승리로 와질 수 있는 복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 말씀은 많은 신앙(지도)자의 필독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신앙자들 혹은 세상적인 지도자들에게도 필독서로 익혀 왔던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월남 이상재 선생은 사실은 유교 사상이 짙은 사람이었지만 일제 때에 그가 일본을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독방에 갇혀서 정말 혼자서 외롭게 쓸쓸한 때에 어느 날 그 감옥 안의 마루 바닥의 마루 틈 사이를 우연히 보았는데 마루 바닥의 틈 사이에 왠 쪽지 하나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도 심심하던 차에 그 쪽지를 꺼내서 읽어보니까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이 적혀 있는 쪽지가 몇 장 구겨진 채 끼어 있더란 것입니다. 읽어보았더니, 오른 편을 때리거든 왼 편을 돌려 대라,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5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가도록 해라. 읽어보니까 너무도 허무 맹랑한 소리 같았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비웃으면서 그 쪽지를 다시 있던 그대로 구겨서 마루 틈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독방에 혼자 있다 보니 심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너무도 심심하다 보니 마루 틈사이에 끼워 뒀던 쪽지를 안 꺼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꺼내 보고 또 꺼내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방에 갇혀 있을 때에 하도 심심해서 자기 몸의 이를 잡아서 이끼리 싸움을 붙이는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우스꽝스런 이야기들도 있는데 이를 싸움시킬 정도로 심심한 독방 신세에서 종이 쪽지 하나가 있는 것이 큰 보화를 얻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재 선생은 계속 그 쪽지를 읽고는 비웃고, 다시 읽고는 또 비웃고 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그 말씀을 읽고 또 읽는 사이에, 그 말씀에 감화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 백번 그 말씀을 읽고 난 다음에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이미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가 기독교계의 빛나는 지도자로서 우리 한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로 꼽히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의 간디라고 하는 사람은 2000명의 제자가 그를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도를 서방 강대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독립 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산상수훈 책을 들고서 무저항주의로 대항했기 때문에 나라를 건질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책을 읽으며 항상 가지고 다니라고 함으로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간디와 그의 제자 2000명은 언제든지 산상수훈의 책을 들고 다녔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듀잇트라는 사람은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전 교훈의 요약’이라고 말했으며, 도루크라고 하는 사람은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대헌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의 지도자들이나 훌륭한 민족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산상수훈을 필독하면서 그들이 거기에서 얻은 진리를 통하여 삶을 슬기롭게 하였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를 건져낼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는 사


실에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은총 중의 은총인가를 우리가 바로 알고서 이 말씀의 귀기울이는 복된 귀가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3. 그래서 산상수(보)훈이라고 합니다.(마5장-7장)

이렇게 귀한 말씀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도 하고 혹은 산상보훈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 산상수훈이라는 말은 드릴 ‘수’(垂) 자를 써서 정말로 우리에게 교훈의 중요한 말씀이요,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하는 것은 보배‘보’(寶) 자를 써서 보배와 같이 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40일 기도회 기간동안 산상수훈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으로 알고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산상보훈이 여러분들에게 가장 값지고 값진 보배의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알고 이 보배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간직하면서, 세상의 썩을 물질을 보배처럼 간직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되지 말고 썩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영원토록 간직할 수 있는 복이며, 최고의 보배가 되는 이 말씀을 늘 간직할 수 있는 믿음이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산에 올라 앉으셔서 하신 말씀입니다.(1절)


이 말씀은 산에 올라 앉으셔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이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께서 이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설교한 그 장소는 갈릴리 바다에서 볼 때는 산으로 보이지만 육지에서 볼 때는 마치 시골 고향 동네의 어린아이들이 놀기에 알맞은 뒷동산과 같이 정답게 느껴지는 곳에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증거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에 좋은 잔디밭이 있었으며 그 장소엔, 지금 팔복 교회라고 하는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원칙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장소가 아름답기 때문에 유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현장 교육을 할 대 그 장소에 데리고 가서 글짓기를 한다든지, 그림을 그리게 한다든지 하는 것을 심심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장소는 참 좋은, 그야말로 장소로 볼 때에도 능히 이 보배와 같은 말씀이 술술 나올 수 있을 만큼 경치 좋은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어쨌든 바로 그 아름다운 동산에 앉으셔서 하신 이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1. 기독교는 산의 종교입니다.(창2~3장,8:4, 22장, 출3장, 19장)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를 산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별명이 많습니다. 음악의 종교다, 혹은 웅변의 종교다, 혹은 생명의 종교다.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만 특별히 기독교는 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산의 종교하고 해도 조금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산과 대단히 관계가 깊습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시작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부터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어진 이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물로 심판을 받고 인류가 다시 시작하게 되어질 때도 노아의 8식구가 머물렀던 방주도 아라랏산에(창8:4) 머물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조상으로 시험에 합격한 아브라함(창22장)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림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종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기 위해서(출3:1~5)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를 선택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산에 올라오라고 명함으로 십계명을 받게 되었음이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열왕기상18장:20~40에 보면 바알, 아세라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엘리야 참 선지자 한 사람이 850:1로 겨루어서 참 하나님(신)이 누구냐 하는 것을 겨루었던 장소도 갈멜산 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산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엘리야가 이들과 싸우기 위해서 산에 올랐을 때를 생각해 볼 때 정말로 엘리야가 힘들고 어려운 결단을 했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엘리야의 하나님이 내게도 응답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마다 기독교의 산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가 시작된 복의 산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121:1~2에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서다”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 산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응답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17:1~13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변화하셨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 준 것으로서 산에서 이런 기적의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마24:3이하에 보면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마지막 징조에 대한 말세의 원본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을 강론하시기도 했습니다. 눅22:44, 마26:36~46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사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던 기도의 동산도 바로 산이었습니다.

이 겟세마네 동산은 바로 감람산에 있는 지역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던 이 장소가 지금은 기념 교회로 세워져 있고 예수님이 기도했던 바윗돌이 그 교회 안에 기념으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 실패를 해서 그야말로 희망을 잃고 좌절하기 직전 그곳에서 기도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하곤 합니다.

마27:1~46에 골고다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인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골고다는 산입니다. 그곳도 역시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산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보면 지금은 시장 바닥이 되었습니다만 그 지형 자체가 계속 언덕인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곳은 그 때 당시에도 어김없이 산이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마27:57~62은 예수님께서 그 산에서 장사되었으니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된 그 장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그래서 그 기념 교회는 동일한 건물 안에 있습니다.

행1:1~11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서 천국 복음을 외치시다가 마지막 하늘로 승천하실 때도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으며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산에서 오실 확률도 있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어린 양 예수께서 144000명과 함께 강림하실 때에 시온산에서 강림한다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인생의 출발부터 산에서 시작해서 모든 역사가 산으로부터 맥을 이으며 연결되어져 내려오며 최후에 주님이 오실 때에도 시온산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온산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러므로 이 시온성은 피를 흘리고, 어떤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지키기 위해서 싸운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시온성 문을 바라보면 성한 곳이 한 부분도 없이 탄흔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산의 종교라 해서 오늘부터 보따리를 싸서 산으로 가지는 마십시오. 40일 동안 대덕교회가 하나님이 역사 하는 말씀의, 기도의 동산인 줄로 믿습니다.


2. 기독교는 올라가는 종교입니다.(눅2:41~51, 24:13~33)

기독교는 올라가는 종교입니다. 내려가는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눅2:41~51에 예루살렘에서 내려갈 때에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을 나중에 깨닫고서 세상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으나 다시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거기서 예수님을 찾을 줄로 믿습니다.

눅24:13~33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슬픔과 탄식 속에 있었지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는, 예수님을 발견한 제자들이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모습을 우리는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눅10:30에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죽을 정도로 위험을 당했던 사실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리고로 내려간다는 것은, 예루살렘은 해발 800에 해당하는 곳이고 여리고라는 하는 곳은 해저 350m에 해당하는 곳이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는 35km로 요사이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자치 독립 국가를 설립하는 장소가 바로 여리고라고 하는 신문 보도에 나오는 장소가 바로 이곳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는 그 표고 차이가 1050m나 차이가 나며, 35km의 길이 계속 내리막길로 이어진 특이한 지형인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는 완전히 허허 벌판에 사막과 같은 돌산들로 이루어진 황야이며 여리고만이 사막에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로서 그곳에는 과일이 풍성하고 농작물이 풍성한 우리 나라의 면 소재지 정도의 동네입니다. 어쨌든 내려갈 때에는 주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올라갈 때에는 주님을 찾을 줄로 믿습니다. 올라갈 때는 기쁨과 즐거움의 역사가 그들에게 함께 된 줄로 믿습니다.

강도를 만났던 사람이 죽음의 생명을 건지게 된 후로는 다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올라가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독수리처럼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피곤치 아니하고 계속 줄달음치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려가는 자는 망합니다. 우리는 이번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의 지난날의 나태했던 신앙, 내려갔던 신앙을 다시 올려놓는, 상승시키는, 성장해 가는 믿음의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3. 앉으셔서 하신 말씀입니다.(마26:55, 23:2)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 산에 오르셔서 서서 하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앉으셔서 말씀을 했다고 하는 점이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주님께서 일상적인 습관으로 이 말씀을 외칠 때는 언제나 앉으셔서 했던 모습들을 마26:55과 23:2을 볼 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마26:55에서는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마23:2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율법을 전하는 자들로서 그들은 최고의 권위의 자리인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전할 때에 서서 하신 것이 아니라 앉으셔서 했다는 것이니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보통 그냥 한 말씀이 아니라 권위 있는 자리에서 마치 왕의 보좌에 앉으신 재판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서 이 말씀을 외치게 되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들을 이 말씀은 가벼운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을 이 말씀은 아무나 했던 말씀이 아니라 왕적인 권위를 가지고서 온 세상을 재판할 재판관으로서의 권위의 자리에 앉으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기에, 이 말씀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이 말씀 앞에 재판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손색이 없이 부끄러움이 없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계1:1~3에 보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할 때에 말씀의 잣대를 가지고 심판한다고 말씀했으니 오늘 재판장의 권위를 가지시고 말씀하신 이 말씀이 어쩌면 우리를 심판할 말씀의 잣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들을 재판하고 여러분 자신들을 잣대로 재 볼 수 있는 이런 믿음의 좋은 잣대가 되어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말씀 안에 완전히 거할 수 있는 이런 복된 삶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입을 열어 가르치신 말씀입니다.(2절)


우리가 생각할 것은 2절 말씀에 주님이 바로 이 산에 오르시사 앉으셔서 “입을 열어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마4:23~25, 요1:35~51)

이 말씀을 받을 대상자들은 무리와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직접 선택했던 12제자들이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본격적으로 증거 되지 않았던 때였지만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을 외치기 시작해서부터 그 말씀을 들었던 상당한 많은 무리들이 거기에 모였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남들 잠자리에 들기 전 이 저녁에 여기에 나와 앉아 있어야만 합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러 나왔던 무리들, 제자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여기에 와 앉아 있는 무리들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대덕교회40일 작정 특별 기도회 한다니까 어디 한 번 가 보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무리들과 제자들처럼 우리가 이 저녁에 이 말씀을 듣는 무리로서,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로서 모여질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어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기도 생활을 안하다가 오늘부터 시작한 사람들은 무척 피곤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무리들 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서 40일 특별 기도회 동안 피곤과 괴로움을 이기며 승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입을 열어 하신 말씀입니다.(히1:1~2, 요1:14, 1~2, 전3:7)

주님께서 입을 열어 말씀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제한되는 곳이 없이 어느 곳이건간에 전파되어지기 시작을 했으니 주님이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입을 열어 말씀을 하셨다는 그 원문의 희랍어의 내용을 보면 동작 하나 하나의 모습을 상세하게 표현해 준 문장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정확한 언어는 희랍어입니다. 우리 한글도 정확하기 때문에 종이 소리도 ‘사글사글’ ‘바스락 바스락’ ‘소골 소골’ 이렇게 감상적인 면까지 표현 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많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희랍어인 것입니다. 그 희랍어로 이 성경이 기록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의 가장 정확한 하나님께서 뜻을 상세하게 증거키 위해서 언어를 택할 때도 가장 정확한 언어인 희랍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 문장에 예수님이 입을 열어 말씀했다는 이 말씀은 마치 권위 있는 대통령이 국가의 중대한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모습으로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마치 정전을 발표하는 것과 같은 정중한 모습으로 입을 여셨다고 하는 모습으로 원문은 표현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볍게 들을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외칠 때에 그야말로 대통령이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는것 이상으로 권위 있게 심혈을 기울여 정중하게 우리에게 말씀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비록 주님이 직접 말씀한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저에게 이 말씀의 영감을 주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증거할 때에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권위 있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귀하게 듣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3. 가르치신 말씀입니다.(마4:23,9:35,13:54, 28:20, 딤전4:16)

뿐만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은 입을 열어 가르치시기 위한 말씀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냥 듣고 흘러 버려라’가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번 40일 동안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증거해 주신 말씀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어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라고 말씀했으며, 이 말씀은 우리를 온전케하는 것이라고 말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서 가르침을 받게 되어질 때에 의로와질 수 있고 이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살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이 온전해 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가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3대 사업은 선교(복음 전파), 교육(가르침), 치유(병든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2번째가 교육(가르침)의 사업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 산상수훈을 40일 동안 우리들에게 저녁마다 나와서 이 말씀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 즉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믿음의 유치원생이 초등 학생으로, 초등 학생이 중학생으로, 중학생으로, 고등학생으로, 고등학생이 대학생으로 이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복된 역사가 이번 기도회 때마다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여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녁 우리는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오늘부터


시작되어진 이 40일 작정 특별 기도회에 끝가지 참석하기를 원하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삶의 은혜를 이 40일 동안 우리에게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겸손히 잘 받아서 순종하며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능력이, 힘의 역사가 함께 할 수 있는 귀한 은혜가 함께 하기를 원하면서 기도하는 좋은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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