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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학교 4강 교회 사회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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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교회 사회 가정


A. 교회


Ⅰ.교회의 정의 ;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곧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했다.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교회를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도 혹은 조직체와 직접적으로 일치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엔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것은 20세기 교회론 속에 강하게 나타난 익명의 교회 개념이다. 죌레(D.Solle)에 의하면 가난한 형제들이 영접함을 받고 형제간에 사랑이 있고 선한 일을 행하는 곳에는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지만 익명의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녀는 명시적 교회밖에 익명의 교회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익명의 교회 개념이 정당성을 지니면 교회에 대한 정의는 매우 광범위하게 확대되어야 하고 어쩌면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조합도 익명의 교회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신약성서가 교회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를 생각했지 그리스도를 모르는 교회란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지 결코 교회는 아니다. 교회 개념을 무분별하게, 광범위하게 확대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받들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Ⅱ. 구약의 교회

 “교회”에 대한 개념을 기독교인의 모임, 만남 이라고 정의할 때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임, 만남을 의미하는 단어는 ‘카할’(להק)이다. 카할의 기본의미는 ‘모임, 모여든 다수의 인간단체’를 의미한다.

 구약에 나타난 교회의 모체는 카할 명사 혹은 동사의 사용과 함게 일컬어진 회중이란 말과 관계한다. 이스라엘 회중은 시내산에서 법 의지의 하나님께 십계명과 명령, 율례를 받아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법적 공동체로서 여호와의 회중이요 여호와만 섬기는 예배 공동체가 되었다.(신9;10, 10;4)

 카할 명사와 동사에서 교회모임의 두가지 성격이 밝혀진다. 명사 카할이 주는 교회의 모임은 자발적으로 형성된 자원하는 심령의 모임을 암시해 주며 카할 동사가 일개워 주는 교회의 모임은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제의적인 면에서 자신을 성결케 하고 말씀을 들으러 온 무리였으며 번제를 드리며 소원과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Ⅲ. 신약의 교회

 바울은 서신서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기초로 하느냐, 그만을 주님으로 인정하느냐에 따라 서거나 넘어진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모임이라는 이해를 펼친다.

 그런데 골로새서와 에배소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교회론을 보여준다.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골1;18, 24; 엡1;22)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통합과 종속의 관계가 있다(엡5;24-25). 교회는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5;27)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알려진다.(3;10)

 이외에도 교회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들이 나타나는데 벧전은 ‘신령한 집’(2;5), ‘선택된 족속’(2;9) ‘하나님의 백성’과 같은 표현들을 제공한다.


 Ⅳ.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한국 장로교회가 신조로 사용하고 있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제 25조에는 교회론에 관한 매우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불가견적이다. 이 교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모이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고백 속에서 불가견적 교회 즉 보이지 않는 교회가 언급되어 있다. 이 고백에 의하면 우주적인 참 교회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만이 아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종교개혁과 더불어 본격화 되었다. 종교개혁 이전 까지는 교회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그 단하나의 교회였고 누구나가 인정하는 참 교회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카톨릭의 부패로 참된 교회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있었고 새로 등장한 개신교회도 하나의 참 교회가 되지 못하고 수 많은 종파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가 하는 것은 당시의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바로 이런 상황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옛날 초대교회의 신앙의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보이지 않는 교회개념을 발전시켜 보이는 현실적 교회와 구별되는 참 교회로서의 보이지 않는 교회 개념을 확립시키고 신학화 했다. 즉 참 교회는 보이는 기관이나 조직체로서의 현실적 교회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보이지 않는영적인 모임인데, 지상의 인간으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지상과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택된 무리라는 것이다. 보이는 교회 속에는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가 혼재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참 교회에는 거짓 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별은 매우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구별이 갖는 장점과 단점을 살펴보면, 먼저 장점으로는

 첫째, 이 구별은 제도적 교회의 활동을 신성화시키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둘째, 이 구별은 제도적 교회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용기를 갖고 계속하도록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는 그곳에 참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단점으로는

 첫째,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성서적이라기 보다는 플라톤 적이다.

 둘째, 신약성서 속의 교회는 어떤 추상적인 이념이나 추상적인 모임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보이는 역사적 실체였다.

 셋째, 보이지 않는 교회란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세상 속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는 관점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임과 활동은 가견적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두 개의 교회라기보다는 동일한 하나의 교회의 두 양태로 이해해야 한다. 즉 보이는 교회는 현존하는 구체적 교회를 의미하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이상적 모습 혹은 완성된 교회의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럴 때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개념은 보이는 구체적 교회의 개혁의 동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Ⅴ. 교회의 거룩성

 381년에 제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의하면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신조에 의하면 교회는 거룩하다고 언급되어 있다. 역사와 현실을 살펴볼 때 교회가 거룩하지 않는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왜 교회를 거룩하다고 하는가?

첫 번째 이유는 교회의 현실적인 도덕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의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라고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를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도덕적으로 정말로 거룩한 무리인가? 그렇지 않았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열해서 싸우고 있었고, 성적으로도 상당히 타락한 교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를 거룩한 무리라고 부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되고 부름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원래 거룩이라는 단어의 성서적 의미는 구별되었다라는 뜻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구별했을 때 그 대상이 되는 사물에 거룩이라는 형용사가 붙었다. 고린도 교회를 거룩한 무리라고 사도 바울이부른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 사업을 위해 특별히 선택되어 부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거룩하다고 규정하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고린도 전서 1장 2절에 규정되어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진 무리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속죄와 칭의가 그 중심에 들어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도들의 공동체는 사실상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고 있는 죄인들의 공동체이다.그러므로 자신의 거룩성에 대한 오만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교회는 왜 거룩한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무리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동시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무리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 이 두 개의 관점은 교회의 거룩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교회라고 할 때 교회의 현실적 도덕적인 수준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거룩성을 위해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 앞에 도달해 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가는 공동체이다. 교회의 거룩성을 언급할 때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만 언급하면 아직 부족하다. 교회의 영인 ‘성령이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 성화되고 있다. 물론 교회의 역사 속에 부패와 죄악의 역사가 무시할 수 없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기는 해도 전체로서의 교회의 역사는 세상의 빛이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변화시켜서 거룩한 일을 하도록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언급할 때 빼놓아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점이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교부 칼 바르트는 교회의 거룩성의 핵심은 교회가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반사하는 데 있다고 정의했다. 교회는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반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주를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 교회는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반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직접적으로 나누어 맡고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Ⅵ. 교회의 보편성

 교회는 만민의 교회이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라는 말은 교회는 계급, 인종, 지역의 차이가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교회를 찾을 수 있고 누구나 교회에서 기도할 수 있고 누구나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다.

 주후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 노플 신조는 “우리는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에서 보편적이라는 말의 뜻은 만민의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이어야 하는 이유는 우선 구원의 보편성에 근가하고 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3;16). 여기에서 보면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다. 구원에서 제외되는 인종은 없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 보셨기”(히2;9) 때문이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이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만민을 향한 선교의 요청 때문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가”(막16;1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이상의 성구 속에서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잘 읽을 수 있다.

교회가 만민의 교회여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교회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형제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리스도 안에서는 지위, 인종, 지역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만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이다.


B. 사회


Ⅰ. 사회 (socity)

우리는 사회속에서 살고 있다. 고기가 물을 떠나사 살 수 없는 것 처럼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러기에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동물(social animal)이라고 했다.

1) 정의

서로 협력하며 공동생활을 하는 인류의 집단,또는 온갖 형태의 인간의 집단적 생활 . 원어는 결합. 교제. 모임. 동료. 사교 등의 뜻을 지니며, 공동 집회장에서의 여러 개인 상호간의 교류라는 집합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이 집합행위가 일군의 사람들 사이에서 되풀이 되어 안정적으로 고정되어 가면 상류사회 또는 지역이나 각 직업 범위에서의 사람들의 관계, 사회관계, 또는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라는 말은 일군의 사람들이 어떤 공통목적을 위하여 서로 자유로운 주체로서 대등한 입장에서 모여 공동행위에 참가한다는(단결,결사) 사태를 뜻하였다.

 

 이 사회는 가족사회, 학교사회, 직장사회, 도시사회등 여러 가지로 쓰인다. 그러나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인간이 모여서 사회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의 주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태도나 양식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으며 규제를 받게 된다. 그러기에 사람이 있는 곳에 사회가 있고 사회가 있는 곳에 서로의 질서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도덕, 윤리가 생기고 관습과 법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의 욕망, 능력, 기술은 다양하다. 이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다른 사람, 다른 사회와 접촉하고 교환하면서 살아야 하며 그러한 것을 위한 수단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급자족하던 사회로부터 서로 교환하고 매매하는 상품사회로 사회를 발전시켰다. 이 같이 인간은 서로의 공동생활을 위한 질서와 향상된 생활수준을 누리기 위해 진보가 필요했다. 사회는 한편으로는 질서를,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를 이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대중사회를 만들어 냈다.

 2) 사회와 인간

 인간은 그 문화의 정도와는 관계없이 다른 인간, 사회, 문화와의 관련속에서 살고 있다. 이 같이 인간은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행동을 되풀이 함으로써 관습을 만들며 문화를 이룩한다. 그러한 관습과 문화는 또한 인간의 성격, 능력, 욕구등 개별적 특성을 갖춘 이른바 개개인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게된다. 이 인격형성이 동일환경에서 공동의 성격을 갖도록 할 때 그것이 곧 사회적 성격이 되는 것이다. 국민성이니 계급성이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교섭을 통하여 서로 의존하거나 또는 제약하면서 사회를 형성한다. 따라서 인간의 상호의존과 상호구속이 없는 곳에는 본질적으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란 정태적으로 볼 때 일체의 인간사이의 관계의 총체를 말하며 동태적로는 인간의 상호작용의 전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사회의 본질

 사회를 본질적으로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그 시대와 장소에 따라 틀리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기딩스(F.H.Giddings)는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 자기와 동류라는 동류의식이 사회의 본질적 요소라고 했다. 그리고 동유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회는 사회생성(social composition)과 사회조성(social constitution)으로 나눈다.

 전자는 고립. 분산된 생활을 하던 개인이나 집단이 보다 큰 집단이나 사회로 확대되어감을 말하며 후자는 사회집단이 상호의존적인 계급이나 소규모의 기은집단 또는 소집단ㅇ로 복잡하게 분화되어감을 말한다. 따라서 사회란 한편으로는 생성의 과정을 통한 동류화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성의 과정을 통해 이질화를 거듭하게 되었다.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인간이며, 그 인간의 사회행위의 본질은 모방심리에 있다고 한 사람은 프랑스의 타르드(J.G. Tarde)이다. 인간은 타인이나 다른 사회나 문화를 본따서 그것에 동일화 하고 동질화 하려는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이같은 모방을 통하여 체제. 질서. 조직. 제도등을 동일화 또는 유사화 해가는 것이다.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또는 의지)이며 이러한 의지나 사유의 포섭에 관계에 의해 하나는 공동사회이고, 도 다른 하나는 이익사회라는 퇴니스의 이론도 있다. 전자는 농촌이나 가종에서 볼 수 있는 인정과 이해와 협동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이며, 후자는 대도시나 주식회사와 같은 합리적이고 타산적인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이다. 그리고 혈연이나 지연으로 결합의 유대가 자연발생적으로 성립된 사회 즉 공동사회로부터 어떤 목적아래 계획저깅고 인위적인 사회인 이익사회로 발전해 간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의 구조나 기능을 생물유기체와 유사한 것으로 보고 이를 유추적으로 설명하려는 영국의 사회학자 스펜서의 개념이 있다. 그는 사회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있다고 보고 그 전체는 균형과 진보라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요소인 개인이 자유로은 경쟁을 통해 기술과 능력을 개발하게 됨은 결국 그것은 개인의 발전을 가져오며, 개인의 발전은 사회의 진보를 가졍ㄴ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존경쟁을위해서는 그 조건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 기능주의 이론 - 분석의 대상이 되는 사회현상의 전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은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고 통합적 전체 즉 체계를 이루고 있다.

 

4) 현대사회의 특질

 정신적으로는 문예부흥, 종교적으로는 종교개혁,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 정치적으로는 프랑스혁명을 통해 물심 양면에서 과거의 전통적인 사회와 대비되는 현대 사회의 특질을 현대인은 여러모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회는 무한대로 넓어지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끝없이 분화되어 가고 있다. 자연적인 공동체를 벗어나 초 국가, 초 민족적인 영역으로 까지 인간의 생활영역은 넓혀지고 있는데 반하여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완전히 이질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각자는 스스로의 욕망과 능력에 따라 기능화하고 있으며 전문화 되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가문이나 혈통, 신분, 연련에 따라 특권이나 이익을 누릴 수 있었으나 오늘날 사회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거주, 혼인, 교육, 종교, 직업의 기회와 혜택을받을 수 있으며 능력과 노력에 따라 이익과 소등를 얻을 수 있는 개방성화 되었다. 그리하여 과거의 전통성을 깨고 합리적인 사고와 생활을 영위하면서 개인주의사상에 의한 사유재산제가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우리는 수 많은 군중 속에서도 자기와 똑간은 사상과 관심과 생활태도와 행위양식을 가진 사람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군중속의 고독’을 느껴야 하는 이질화되고 개별화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여건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분화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인격의 분열이 생기고 이러한 분열을 스스로의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무력하고 소외된 인간은 어떤 권위나 절대자에 스스로를 맡기려 들며 그러한 대상을 가족이나 민족에서 찾으려 한다. 거대한 사회의 메커니즘에 압도되어 환멸을 느끼는 나머지 대중적집합에 의하여 자유로부터 도피를 꿈꾸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개인의 자주성을 살려가면서 계획에 의한 자유의 확립이 현대사회를 보다 큰 질서와 진보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만하임은 <자유를 위한 계획>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C가정


1. 정의

히브리어로 가정은 바이트(תיב)이다. 한 집에 소속된 사람들, 혹은 한 가족, 후손을 포함한집안의 전 구성원을 일컫는다. 아버지가 집안의 최고 책임자로서 가부장적 공동체이다.

 우리는 다윗의 가정 이야기 속에서 한 사람의 의인, 특히 가장이요 집안의 총 피더자인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되면 그 가정 전체가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다윗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족장이야기 속에서도 일치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범죄로서 또한 많은 범죄와 엄청난 고통의 일등이 야기된다는 사실에도 주목이 간다. 히브리어에서 “바이트”, 가정이 단순히 한 일가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족속, 지파, 혈족, 왕조, 더 나아가 국가로 그 의미가 확산된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가정의 호주요 가장인 리더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금 인식케 한다.


2. 창조질서 속에서의 가정

 1) 가정과 결혼

 가정은 결혼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결혼은 가정을 그 목표로 한다. 오늘날 결혼 자체와 결혼한 당사자의 인격적 관계가 점증적으로 가정의 핵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개인은 거의 전적으로 가족속에 흡수되었고, 자녀들은 성장과 도움을 이러한 인격적 관계에 의지한다.

 2) 가족과 공동체

 가정은 공동체 삶의 기본 단위이다. 가정은 남녀를 결합할 뿐만아니라 세대들을 묶어준다. 그리젊은이들을 공동체 생활속으로 안내한다. 가정은 그 성원들을 전체적으로 포괄하고 사랑하는데서 그들을 함께 결속 시키므로 놀라운 정도로 다양한 관계들을 세부적 단위로 존재하게 한다.

 3) 교류로서의 가정

 이러한 관계들은 다음 사항을 포함한다.

①성관계 및 혈연관계

 남편과 아내 사이의 친말한 관계는 생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양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별히 정액과 호르몬의 교환을 통하여, 또한 관능의 삶을 통하여 아내에게 영향을 미친다. 유전의 법칙은 자녀들이 생리적으로, 따라서 그들의 기본적 기질에 있어서 부모 양편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부모는 그들의 생명을 자녀들에게 전달하고 그들 가운데서 그들 자신의 생명의 열매와 연속을 대한다.

② 일차적 경제 공동체

 가정에서 우리는 상업이 아니라 사상을 기초로 한 심도높은 재화와 섬김의 교류를 실현한다. 즉 완전한 공산주의가 구현된 공동체가 가정이다. 이 “사랑의 공산주의”는 비이기심, 자기를 내어줌, 기꺼운 희생의 자세, 극기에 대한 절실한 호소, 진지한 요구를 수행한다.

③ 정신과 영혼의 공동체

 사랑, 신뢰, 존경, 결의를 기초로 한 매일의 삶 가운데는 또한 우리가 다른 어느 집단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사상, 확신, 가치와 태도의 교환, 기쁨과 슬픔의 경험을 함께 나눔, 성공과 시련을 함께 나눔이 있다. 인간 삶의 신비는 아주 초창기로부터 가정을 종교적 제의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기독교의 예배도 그 근원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가운데 두고 있기 때문에 가정은 그 가운데서 종교적 감정들과 확신들이 공통적으로 함양되고, 오는 세대에 전수되고 무엇보다도 일상적 삶의 현실로 옮겨지는 거룩한 장소로 남는다.

④ 교육적 단위

 현대 심리학과 교육학도 인간의 결정적 형성은 그의 지성이 비평적 분별을 행할 수 있기 훨씬 전, 아주 초년기들어 이루어 진다는 전통적 입장을 확증해 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이 단계에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며, 둘째로는 사실들과 태도들이 가장친밀하고 인격적 방법으로 , 즉 사랑으로 그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마음의 경로에 의하여 그에게 전달되는 것을 최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가정과 가정의 삶이 건강하고 성숙하고 책임적인 종교적 분위기에 의하여 형성되고 둘러싸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⑤ 세대들의 만남

 가장 근본적인 세대간의 만남은 출생과 함께 나누는 삶을 통하여 실현된다. 그렇지만 동적인 사회에서는 연령이 그것이 초기에 지녔떤 명령적 위치를 ㅡ소유하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유년세대들의 지식과 경험이 단순히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학교를 통하여 또한 조직, 서적, 도서관, 신문 라디오를 통하여 전수된다. 노년세대는 물질 문제에 있어서 젊은 세대의 도움으로부터 더욱 독립하게 되었다. 저축, 생명보험, 병원, 양로원이 많은 경우에 전에는 자녀들에 의하여 제공된 섬김을 떠맡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세대들의 만남은 특히 정신과 영혼의 영역에 중요성을 보유한다.

 

결론) 이상에서 대략 교회, 사회, 가정에 대해 개론적으로 살펴보았다. 위에서 살펴본 교회와 사회, 가정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기초적인 단위의 교회로서 가정과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요소로서 가정, 그리고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사회안에서 존재하는 교회등 이 세 조직은 각각 독립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동시에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오늘의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와 사회, 그리고, 가정을 하나로 엮는 중요한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 사상이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는 모든 곳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모든 곳, 그곳이 서울, 한국과 같은 구체적인 장소일 수 도 있고, 마음과 같은 추상적인 장소를 말 할 수 도 있다. 때문에 하나님이 다스림이 미치는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고 그 나라는 계속해서 그 범위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림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곳이요,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된 곳이라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이 땅위에 이루어 지는데 있어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도구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바로 땅 끝 까지 이르러 제자 삼으라는 말씀이었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모든 사람, 땅 끝까지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학의 교수 하비 콕스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전위대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전위대라는 말은 교회가 세상속에 존재하는 사탄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통치를땅위에 수립하는 싸움의 제일선에 서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바로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 즉 사람들이 모여 이룬 사회가 바로 그 구체적인 장소이다. 그리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는 바로 가정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는 하나님나라 사상의 관점에서 우리는 교회와 사회, 그리고 가정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역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머리인 예수그리스도에 바로 붙어 있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조직으로서 머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아직도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지 못한 이 땅의 가정과 그 가정이 모여 이룬 사회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 역할을 성취해야 한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하나님, 교회에 속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계, 모든 이들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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