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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제자 훈련-4과 종말론적 삶(2) -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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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과 종말론적 삶(2) - 기쁨    본문/행 2:43-47


<생각을 위한 질문>


* 예수를 믿어 기쁘다는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어떤 종류의 기쁨인지 서로 말해 보십시오.


<본문이해>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나서 그 교회가 가졌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냐고 할 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무상통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추적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추적하는 일, 그것이 일차적인 특징이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더 살펴보려고 하는 특징은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신앙과 대조하면서 점검해봐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삼천명이 회개를 하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나누어 필요한 자에게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주를 찬양하고 전도하고 칭찬을 받고 합니다. 분명히 초대교회를 형성한 신자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기쁨, 감격 그리고 생명감, 활동력이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어떤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기쁘냐는 것입니다. 기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상식적인 기쁨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부분이 오해되면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슬픈 일이 있을 수 없고 절망이 있을 수 없고 아플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좀먹는, 기독교 진리를 방해하는 모든 이단들의 가르침은 그 기쁨과 감격을 세상적인 성취로 슬쩍 바꿔 놓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얘기하는 기쁨이나 감격은 세상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쁨이 세상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십시다. 사도들이 다시 잡혀서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는 공갈과 협박과 그리고 매를 맞고 풀려나는 장면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0-42절)


 그들이 지금 매 맞고 협박과 공갈 속에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으로 모이든 공개적으로 모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전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과 아픔과 핍박과 환난을 저들이 기쁨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어떤 기쁨입니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은 것을 기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졌던 감격과 기쁨과 힘은 세상적인 일에서의 형통함과 성취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사도행전이 스스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과 감격, 그들이 증언하는 일에 대하여 그 사회와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찬성하지 않습니다. 반대하며 위협하며 협박하며 그들을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신자의 기쁨에 관한 이해입니다. 신자가 갖는 기쁨은 결단코 세상적 차원에서의 난관이 없어지거나 환경이 개선되거나 누구나 우리를 환영하는 것으로서의 기쁨과 감사가 아닙니다. 그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신앙생활이 고달플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소개하는 바울의 기쁨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사도 바울의 기쁨도 이것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하면 내게 더 많이 머물며 나로 인하여 주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아는 것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주를 위한 열심과 주를 위한 봉사 정신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건강을 구하는 것은 주의 복음을 더 많이 전하기 위하여, 주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답하시기를 '네가 약할 때 오히려 내가 너와 더 많이 함께 할 수 있고 너를 통하여 나를 더 많이 나타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기뻐합니다. '내가 약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더 많이 하시사 내가 모자라고 연약한 것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며 오히려 쓸 것이 있다'하는 이것이 그의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면 구체적으로 한 사건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2-18절).


 이 기쁨의 근거를 잘 보십시오. 지금 사도 바울은 주를 전하는 일 때문에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좋아하는 것은 이 일로 인하여 감옥에 있는 모든 간수들, 지키고 있는 군사들이 자기의 잡힘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무슨 문제가 생겼느냐 하면 사도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의 일에 너무 많이 쓰이고 사람들한테 칭찬 받는 것이 배가 아파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잡힌 것입니다. 얼마나 핑계거리가 좋습니까? '하나님이 만일 그의 일을 실제로 맡길 사람을 골랐다면 왜 일하지 못하게 잡아 가두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의 일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했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갇히자 더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봐라, 실제로 하나님이 인도할 종은 우리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시니까 그를 일 못하도록 감옥에 가둔 것이다. 우리가 진짜니까 우리에게 자유도 주고 건강도 주셔서 마음껏 주를 전하게 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또 사도 바울은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갇힘으로 시기하는 사람들이 날뛰니까 '그렇지 않다. 우리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라도 마저 하자'고 해서 나서서 했습니다. 그래서 두 파로 나뉘어서 주의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집니다. '아무러면 어떠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도 있는 시험거리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봉사하다가 제일 크게 당하는 일이 뭡니까?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한 마땅한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의 봉사가 어려운 점은 언제나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일에 대한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람이 뮈라고 그러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느냐, 그가 하시고 싶은 일을 이루셨느냐로 기뻐해야 됩니다.


 이것을 조금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기독교인의 신앙, 그리고 기독교인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모든 일이 그리스도를 위하려는 관심과 열심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기쁨, 기독교인의 신앙, 기독교인의 생활, 인생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으로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일하려는 관심, 그를 향한 열심으로만 지배받고 제어되며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나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기를 기뻐하시는가. 이것이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고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느냐, 또 하나님이 그가 하시고 싶어하는 일을 실제로 하고 계시는가에만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만일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의 기쁨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곧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하라고 한 일을 했는데 돌아온 것이 뭡니까? 신앙을 지키고 정직하고 양심대로 살아온 것에 대해 받을 보답이 뭡니까?'라고 묻기 시작하면 틀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살이를 하면서 가장 크게 당하는 신앙적인 좌절이 뭡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는 살 수가 없다고 느낄 때가 아닙니까? 세상에서 정확하게 양심대로 살아서 이익을 본 것이 무엇입니까? 없지요? 이익 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에게 정당하게 살라는 것을 먼저 가르쳐야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의 자녀가 이 세상의 자녀보다 더 성공한다는 보장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문득 이런 시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주님, 제 자식은 주일에 공부시키지 않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컨닝하면 안되다고 했습니다. 공부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신앙적으로 살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는데 왜 아프게 하십니까? 왜 학교에 떨어지게 하십니까?" 그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과 그의 생명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에 우리를 좋은 모습으로도 부르시고 나쁜 모습으로도 부른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얘기는 뒤에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빌립보서 1장을 봅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9-21절)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이유, 지금 이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의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언행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는 일이 있다는 보람과 책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신자가 살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 이웃에게도 역사와 시대 앞에서도 우리가 하려는 일은 나와 내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어야 됩니다. '내가 살아서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로 부름을 받는다면 살 것이요 나를 죽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신다면 죽음을 불사하겠나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기쁨이요 소원이어야 됩니다.


 초대교회 모든 신자들이 이런 시각과 원리와 목표에서 그들의 기쁨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삶의 생명력을 활동력으로 확신으로 담대함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인하여 고난과 오해와 조롱을 받는 자리에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주께서 친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오해요 외면이요 경멸이요 핍박이요 환난인 것을 몸소 보이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이를 갈거나 창을 겨누기 위하여 모이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우리도 예전에는 그 무리 속에 있었던 것을 인정하고 우리를 불러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에게 알게 하신 영원한 소망과 생명을 저들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를 증언하기 위하여,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람같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소망을 더욱 든든히 하고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통하여 그의 일을 이루시고 그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사실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내가 약한 것으로 실망하지 않는 것은 약한 것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쓰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그 좌절이 나의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시고 좌절시키사 거기서 영원한 것을 증명하실 일이 있어 부른 부름 때문입니다. 게으름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요 연약함과 무지함을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싸움에서 질 이유가 없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적인 것을 목표로 하여 싸우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준비하며 증거하며 그것을 위하여 주 앞에 쓰인 바 되는 것을 인하여 오늘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 늘 순종하여 그가 나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일 때문에 기뻐하며 자랑하며 힘내며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께서 모으신 백성들이 모여 신앙을 고백하며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신앙고백 속에 이 고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지금 분명히 이 목표를 새롭게 해야 됩니다. 우리는 영원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 것과 너무나 구별되는 것입니다. 타협할 수 없습니다. 양 다리를 걸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분명한 두 가지 특징입니다. 영원한 것, 진리되는 것, 그것을 깨우치고 바라보고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세상의 위협과 유혹에 타협하지 않았던 그들의 선명한 노선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초대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진 자들의 기쁨, 그것이 오늘날 우리 모든 신자들의 기쁨이어야 됩니다. 그것 없는 다른 것의 기쁨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이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틀림없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을 기쁘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예수를 믿는 자의 기쁨이 오해될 경우 어떤 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까?


2. 바울이 감옥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다음 각 각의 성경본문에서 사도들이 무엇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고후 12:7-10;행전 5:40-42)


4.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의 유일한 이유이면서 또한 신자들의 마땅한 기쁨이며 소원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 사도들의 기쁨과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기쁨이 차이점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이유를 말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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