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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제자 훈련-3과 종말론적 삶(1) - 유무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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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종말론적 삶(1) - 유무상통    본문/행 2:43-47


<생각을 위한 질문>


* 교회에서 빈부의 문제로 시험을 당하시거나 어려움을 스스로 느꼈던 경험이 있습니까?


<본문이해>


우리가 본 본문 내용에는 초대교회의 특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와 그로 인한 삼천 명의 회개, 그리고 시작된 초대교회 모습의 특징을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 교회의 처음 설립의 특징, 첫 교회의 특징을 유무상통과 빈자구제 쪽으로 몰고 갔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성을 왜 하필이면 이 물질문제로 묘사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의 신앙이 종말론적이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합시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같이 교회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내세 신앙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 믿어서 천국을 가겠다고 하는, 말하자면 복을 원하고 나중 상급을 원하는 차원에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곳으로부터 어느 곳인가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방향성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여기서 가치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곳을 향하여 가고 있고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이라는 말은 끝이라는 뜻인데 이 세상의 가치와 체계가 끝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 이 세상에서 즐기고 있는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영원한 것, 진정한 가치, 진리, 생명을 준비하며 그곳을 목표하고 있는 자이며 그곳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과 그 목표를 향하여 지금 어떻게 달려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증거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않고 바로 이 기록들 다음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만 인하여 삼천 명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신앙인들의 자세와 삶의 모습과 원리와 목표로도 매일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셀 수 없게 일어나는 것이 교회가 갖는 성격이고 원리이며 분위기이고 증거해야 되는 것들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선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선교적이라는 것은 나가서 강제적으로 한 영혼을 불러옴으로써 선교적이라고 하는 말 이상으로 우리의 삶, 이 세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오는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는 것으로 우리의 목표와 원리로 삼고 그것을 훈련하는 삶입니다. 또한 그것으로 이 세상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기에 우리 이웃 사람들이 이를 보고 예수를 믿고 진리에로 돌아오는 결실이 된다는 의미에서 선교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되는 것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서슴치 않고 물질이라고 합니다. 물질을 서로 나누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느냐 하면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더 어떤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이 초대교회에서 물질을 교회가 갖는 종말론적인 성격, 선교적인 사명의 대표적인 핵심으로 꺼낼 수밖에 없느냐는 것을 오늘 우리가 추적해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을 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절) 성경이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을, 저들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내세를 추구하며 그 길로 가고 있는 모습으로 물질을 꺼낸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입니다. 왜 중요합니까? 돈 그 자체는 사실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인도에 갇혀 있으면 돈은 쓸모없습니다. 돈을 씹어 먹을 수도 없고 아픈 데 붙여서 낫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돈이 중요한 이유는 그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도 되고 첩도 여럿 데리고 사는 것이 오늘날 돈의 위력입니다. 그뿐 아니라 혹 어떤 곳에서는 장로도 사며 젊음도 삽니다. 실제 나이는 어쩔 수 없어도 돈으로 주름살을 제거하며 뭐든지 합니다. 사람들을 부릴 수 있으며 자존심을 마음껏 세울 수 있고 거들먹거릴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고 최고의 목표로 하고 있는 원리를 통칭하여 돈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자면 우리의 신앙은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 가기를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의 실력과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추구하며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추구합니다. 진리와 생명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사모하며 그것을 준비하는 자라는 표현을 지금 모두가 개인적인 세상의 욕심과 세상의 싸움에서 벗어난 것으로 증명해낸 것이 본문의 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성공인 것 같고 행복인 것 같습니다. 어느 틈에 교회는 만병통치약을 파는 이상한 곳으로 전락됐고 세상에서 잘 살게 해주는 주문과 부적을 만들어 주는 공장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이가 공부를 안해도 좋은 대학에 붙고 남편이 승승장구하고 아픈 병이 낫고 안되는 일이 없고 의사가 포기한 병도 기도하면 낫습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하나님이 어떻게 온 천하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가를 증명해야 되고 그것을 우리에게 납득시켜야 될 때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된 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신앙인의 현실 삶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순교로 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어디 형통이라는 단어가 맞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놓고 있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물려 받을 사람으로서 훈련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에서의 빈부와 귀천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부자들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남들에게 겸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굽실거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조심할 것은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자란 부자라는 이름, 또 권세자는 권세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일반인의 욕과 비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까지도 책임입니다. 부자가 가져야 되는 책임입니다. 내 돈 갖고 내가 쓰는데 누가 뭐래? 안됩니다. 좋은 음식도 몰래 먹어야 됩니다. 부자는 좋은 차도 몰래 타야 되고 흙을 묻혀서 타고 다녀야 됩니다. 그것이 덕입니다. 뽐내기 위해서 해서는 안됩니다. 부자다 가난하다, 권세를 가졌다 천하다는 것은 결단코 영원한 나라에까지 지속되는 신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기 가장 좋은 방법과 환경과 길로 인도해서 얻어지는 결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신자가 가져야 되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거들먹거리는 부자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때 이렇게 욕하지 마십시오. '있는 것들 눈꼴셔서 못 보겠네.' 그러지 말고 '아직도 신앙이 어리구나' 이렇게 하십시오. 그것을 돈이나 권세로 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그 문제만이 아닙니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아직 신앙이 덜 됐구나' 하고 쓱 웃자구요. 돈 가진 사람이 눈꼴시게 굴면 웃자구요.

 똑같이, 없는 자들에게는 이런 약점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보다 능력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운이 없어서 이렇게 됐을 뿐인데 이렇게 나를 괄시하기요?'하는 열등감에 반발이 예민합니다. 가난한 자의 큰 약점은 누구를 보면 할퀸다는 사실입니다. 정당한 일을 보고도 할퀴고 가장 평범한 일에도 지나가지 못하고 꼭 한 번 긁고야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의 주변에는 친구가 잘 안 모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점심을 사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만나면 밤낮 씹기 때문에 안 모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난과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아직 신앙적으로 극복을 못하고 아우성을 치거든 '없는 것들은 저래!'라고 하지 말고 신앙이 연약하구나라고 하란 말입니다. 교회에는 있다 없다, 잘났다 못났다 하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있는 것을 나눠준 자나, 없어서 남의 것을 얻은 자나 잘났다 못났다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닌 사람들로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영원한 나라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으로서의 훈련, 그렇게 부름받은 일에 대한 감사로 꽉 차고 그 훈련을 위해서만 모이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일로 인해서 이것이 흔들려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갖는 기준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도 각자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는 귀한 분도 있고 천한 분도 있고 부한 분 또는 빈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기준이고 사회적인 분별입니다. 저희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한 형제이고 한 자매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있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고 있고 그 안에 부름 받은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만 평가받습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여러분의 점수를 쌓아 나가십시오. 늘 드는 예로, 입학시험 문제지에 얼마나 고급 연필로 답을 쓰느냐 하는 것이 전혀 채점에 고려되지 않습니다. 누가 정답을 썼느냐입니다.


 여기 여러분이 어떤 지위와 어떤 명성과 어떤 옷을 입고 오느냐는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누가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진심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마음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주께서 가신 길을 뒤쫓으며 힘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채찍질하고 경건을 연습하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 주님의 칭찬을 얻기 위하여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는가 밖에는 주님에게 평가받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 오셔서 신앙적인 문제로 대접 못 받으시거든 안타까워 하셔야 됩니다. 교회 갔더니 아무도 아는 척을 안해, 교회에 안가! 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여기 오셔서는 신앙적인 문제로 대접받지 못하고, 신앙적인 문제로 여러분이 모든 사람 속에 숨겨진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인하여 안타까워하셔야 됩니다.


사회에서는 실패하셔도 여기서는 실패하시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여러분은 교회가 여러분의 이익을 위하여, 영원한 나라에서의 상급을 위하여 제안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힘을 다하여 참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영적 실력을 늘리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더 강건케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약속들과 영원한 소망들을 더 많이 채우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방법을 배우셔야 되고 물어보셔야 됩니다. 기껏 불러다가 목사 밥 사주는 것으로 끝내면 안됩니다. 물론 사주면 제가 기분 나빠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밥 한 번 나눠 먹은 것에 불과하지, 저와 친하고 저와 깊이 악수하는 것이 여러분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적 실력을 늘리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조명하십시오. 그 부르심을 향하여 여러분을 점검하시고, 영적인 사람으로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것들로 여러분의 삶의 원리와 기준으로 삼아 끊임없이 노력하기로 결심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를 그런 교회로 만들기로 하고 여러분의 신앙도 그런 신앙으로 기준 삼아 쓸데없는 싸움은 하지 말기로 합시다. 너무나 손해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영적인 분위기를 풍기십시오. 영적인 도움을 서로 얻으십시오. 영적인 동지가 되시며 영적인 문제에 경쟁자가 되시고 영적인 문제에서 주고 받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 주십시오. 그것이 교회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고 교회에 와서 여러분이 얻어야 할 마땅한 것들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내세 신앙(종말론적 신앙)이 가지는 적극적인 정의는 무엇입니까?


2. 내세 신앙, 즉 종말론적 신앙이 초대교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교인들에게 나타났습니까?


3.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까?


4. 빈부와 귀천에 대하여 새로운 안목을 신앙인으로 가졌을 때 모습은 교회 안에서 각각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부한 경우:

가난한 경우:


<토의를 위한 질문>


* 초대교회의 물질을 유무상통했던 것과 같은 모습을 교회 안에서나 우리 주위에서 보았다면 서로 말씀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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