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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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제자 훈련-2과 성도의 자기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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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 성도의 자기성찰   본문/고전 1:1-9


<생각을 위한 질문>


* 일반적으로 스스로 신자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자책감을 많이 가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이해>


신자 혹은 성도라는 말의 뜻이 성경에서 어떻게 쓰여지고 있으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이 성도라는 말을 쓸 때는 그 사람의 자격을 논해서 성도라는 말을 쓰는 적이 없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성도란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의 죄를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중한 죄를 갖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피를 흘리는 것 외에는 그 죄를 씻을 수 없는 가장 악질들, 천하에 몹쓸 녀석들 이것이 성도입니다.


신자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는 방법 외에는 깨끗해질 방법이 없었던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나은 자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우리가 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가 됐다. 신자가 됐다'고 하면 우리에게 어떤 오해가 있느냐 하면 '나는 예수를 믿었고 저 사람은 믿지 않았다'라는 것으로 자꾸 구별을 합니다. '나는 믿은 자, 저 사람들은 안 믿은 자', 이런 식으로 구별을 가져서 신자가 그래서 낫다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물론 낫긴 낫죠. 그러나 그 낫다는 것은 은혜를 입었다는 뜻에서 낫다는 것이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의미에서 낫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건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성도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데 원래 성도라는 헬라어 자체의 뜻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깨끗한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일차적인 뜻은 아닙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자, 하나님이 자기의 소유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이지 그가 뽑힐 만한 자격이 있었다던가 뽑힐 만큼 노력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자기의 소유로 삼은 자라는 뜻입니다.


전부 다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이고 능동적이지 않다는 뜻은 우리가 뽑힐 만한 준비를 했거나 조건을 만들었거나 연습하지 않고 아니 그런 것을 연습할 수도 없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편지 서두에다가 사도 바울이 꼭 써야 되느냐 하면 고린도교회에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저들의 교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많은 분파가 있고 음행도 있고, 은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시기하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교인들입니다. 왜 어리석어졌느냐 하면 저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로 말미암아 자기네들이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이라는 교만한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시작부터 사도 바울이 이 부분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잘나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불렀기 때문에 성도가 된 자들이다." 이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이 신앙심이 뛰어나서 그들이 교회를 만들어서 고린도교회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고린도라는 곳에 교회를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저들을 부르시고 교회를 세워 주셨기 때문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꼬집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고 싶은 얘기를 아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신자란 누구든지 예외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와 긍휼로 부르시어 우리를 붙잡아 내셨기 때문에 신자가 되는 것이지, 혼자 결심하고 혼자 연구하고 혼자 잘나 어느 날 도를 깨우쳐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틀리면 그 이후의 신앙의 모든 분야, 모든 생각에서 틀려집니다. 즉 내가 어떻게 신자가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은혜를 모르는 것이며 우리가 죄인으로부터 이 자리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모르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교만하면 싸움하고 하나님이 그 인생을 통하여 일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스스로 방해하는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살펴보아야 되느냐하면 성도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 각자가 개인적으로 자기의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때 가장 중요한 싸움을 어떤 기준, 어떤 안목에서 분별하며, 싸우며 극복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겸손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겸손이 모든 해결점이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 싸움이 걸리고 시험이 걸리느냐 하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이 쓸데없는 싸움에서 우리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신자는 이중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신자의 이중 구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눈을 뜨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작업을 하셔서 어느 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과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것과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를 믿기로 약속을 하고 주 앞에 엎드립니다.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보았고 빛이 무엇인가, 무엇이 죄이고 사망이고 무엇이 생명이고 영원인가를 알게 되어 그를 선택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이제부터 내가 영원한 것과 거룩한 것과 생명에 대한 것을 쌓아나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없던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오해가 빚어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뜨게 하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시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도록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우리에게서 자라납니다. 그것을 보고서 우리는 '내가 원래부터 그런 것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냈다'고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원래 어두움에 있었을 때, 사망 아래 있었을 때 우리가 가진 것이 있었고 쓸 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시켜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고 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내시고, 불러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경건에 속한 것, 영원에 속한 것, 생명에 속한 것을 이제 새로 주셨는데도 그것을 얻은 다음에 이런 것들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기를 쓰고 나를 꺼내셨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계속 '은사를 봐라 이게 원래부터 우리 속에 있었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잠재력이라고 오해를 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초반부터 못을 박는 것입니다. "너희가 왜 성도인 줄 아느냐? 너희에게 어떤 조건이 있고 자격이 있고 실력이 있고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너희를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이 너희를 자기의 소유로 삼았기 때문에 성도요, 너희에게 있는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허락했기 때문에 가지게 된 재능이니라. 너희는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보다 하나도 더 나은 조건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니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초두부터 고린도교회에 그리고 우리에게도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그가 쓸모 없는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요, 그가 구원을 얻은 후에 이 생명과 영원과 그리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새로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가 어떤 조건이 있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에 의해서 선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어떤 좌절과 실패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에는 언제나 무엇으로 돌아가서 자기를 다시 분발시켜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원래 가진 것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들어왔다는 것으로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됩니다. 원래가 빈손 들고 하나님 앞에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밑질 것도 없고 실패할 것도 없고 빼앗길 것도 없는 자리로부터 온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내가 놓쳐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가져야 되는 맨 밑바닥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가 있어야만 그 다음에 신자의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성화입니까? 원래 내 속에 좋은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불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불러서 내 안에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 거룩한 것들, 영원한 것들, 생명에 관한 것들, 진리에 관한 것들, 신의 성품에 속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를 언제나 출생으로 비교합니다. 출생, 거듭난다, 중생했다 그럽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아이로 출생을 합니다. 그래서 자라나야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죠? 자기 것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해서 그가 이제부터 자라나야 되는 모든 영광에 속한 것, 생명에 속한 것, 진리에 속한 것을 우리의 것이 아닌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낯설고 서투르며 어리석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무릎이 깨지지 않고 자랄 수 없는 것같이, 싸우지 않고 클 수 없는 것 같이, 병들지 않고 클 수 없는 것 같이 우리는 실패하고 실수하면서 크는 법입니다.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되느냐 하면 모든 신자는 그가 가진 영혼과 진리와 생명에 속한 것을 키워 나가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매어달려서 완성품을 결과로 받아내는 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신앙이 이렇게 기도 많이 해서 뚝 떨어지는 식으로 되는 것은 성경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가장 굵은 신앙의 핵심되는 내용과 맞지 않는 사상입니다. 신자는 예외 없이 누구나 그가 예수를 믿는 것이 시작에 불과한 어린아이로부터 장성한 자리로 성장을 책임져야 됩니다. 이게 신자의 이중 구조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모든 교만은 자라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은사들로 인하여 저들이 원래 갖고 있었던 것을 꽃피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말미암는 싸움들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짜리가 국민학교 2학년짜리를 괄시할 수 없습니다. 중학교 2학년과 국민학교 2학년이 같은 시험을 놓고 보면 중학교 2학년이 낫겠지만, 중학교 2학년짜리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어땠느냐를 가지고 국민학교 2학년 하고 비교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자라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면 사람들은 국민학교 2학년짜리의 실수를 그의 결정적 실수로 단정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지금 유치원을 지나가고 있느냐, 국민학교를 지나가고 있느냐 중학교를 지나가고 있느냐를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다양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 속에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대학원생인데 어느 부분에서는 유치원생과 같은 복합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기도는 대학원생인데 말씀은 유치원생인 사람, 거꾸로일 수도 있습니다. 열심은 대학원생인데 말씀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라면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는데 실천을 하라면 전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내라면 잘 내는데 사람을 용서하라면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분야가 다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어떤 하나의 일만을 보고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기능적인 어떤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인격을 가지고만 평가를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떤 일들을 처리하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두각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는 언제나 누가 더 하나님 앞에 잘 쓰임 받느냐인데,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은 언제나 감추어지는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묵묵히 감추어지느냐? 누가 부름 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나를 쓸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중에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이 있어서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겨 아무것도 아닌 나를 불러서 그가 나에게 무엇을 채웠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내가 나타날수록 손해라는 것을 알아 본인을 감추고 주께서 나타나도록 자신을 씀으로써 우리는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대단한 존재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모두 여기에 말려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말려들어 있습니다.

이걸 깨 버려야 됩니다. 우리는 전혀 쓸모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이고 도적이고 우리는 정말 아무 가치도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해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을 때 비로소 제로(0)입니다. 마이너스에서 제로입니다. 이제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경건에 속한 모든 것들을 넣어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이제부터 우리에게 쓸 만한 것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갈고 닦고 키워 나가야 됩니다. 우리에게 예전에 없던 것, 나한테 있었던 것이 아닌 것,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고린도교회를 꾸짖을 때 사도 바울이 했던 말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인가로 쓰이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원래부터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 받으신 것 있습니까? 쓸모 없는 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혼자 하셔도 되는 것을 나를 통해서 하심으로써 나를 가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이요, 내 편을 드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신 마음이십니다. 그것을 감사할 줄 모르면 금방 우리는 눈이 돌아갑니다. "넌 왜 그래, 넌 왜 그렇게 해." 심판, 공격, 잘난 척밖에 나오는게 없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들었던 시험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마다 교인들이 늘 넘어지는 시험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신자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들어온 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옛날에는 갖고 있었던 것을 세상을 위해 쓰고 나를 위해서 썼지만 이제는 이것을 주를 위해 쓴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갖고 온 것 중에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다 쓸모 없는 것들 뿐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내게 있는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까? 없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쓸모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알게 된 것, 주 앞에 쓰임 받는 것, 여러분이 기쁠 때 감사할 곳이 있고 위기에 처했을 때 매어 달릴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요, 여러분이 그걸 가질 수 없었던 존재에서부터 그 모든 것을 갖게 된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을 감사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뻔뻔스런 악당인 줄 아십니까? 이미 확보된 모든 것들을 감사하기는 커녕, 왜 나에게는 저 사람에게 준 것을 안 주었습니까? 왜 저건 안 주었습니까? 왜 저건 안 줍니까? 이것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성도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주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부여받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키워가야 되는 존재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키워 가시고 어떻게 보잘 것 없는 우리와 함께 동역하시며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헛소리들입니다. 감사할 줄 아셔야 됩니다. 모자란 사람들을 보시거든 기다리실 줄 알아야 됩니다. '나도 저 사람과 방불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별로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셨다' 우린 지금 어리석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는 일과 쓰임받는 일에 혹 우리가 미련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원한 나라와 오는 모든 세상의 영광된 것을 기업으로 이을 자들입니다. 그 감격이 있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로서의 부족한 자신을 애통해 하는 신자된 자각, 분발, 안타까움이 있으셔야 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부르신 상급의 풍성하심에 대한 그 엄청난 기대와 주리고 목마른 아우성이 있어야 됩니다. 경건한 갈증이 있으셔야 됩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이 기본적인 자세를 놓치면 우리는 금방 교만해지고 불평하게 되고 싸우고 하나님은 없어지고 사람끼리 서로 칼싸움하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위치를 깨달으면 감사할 것뿐이요, 기뻐할 것뿐이요,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모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하는 이런 것들이 사실인 것을 여러분이 금방 알게 되고 누리게 되고 권면하게 됩니다.


신자된 것은 세상이 주는 어떤 것으로도 흉내낼 수 없고 뺏을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자랑과 특권과 감격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의 신앙의 어느 곳에선가 병이 든 줄로 아셔야 됩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여러분의 신자 된 특권, 감사거리, 기대, 마땅히 찬송해야 되는 여러분의 위치를 확보해 보시고 깨우쳐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 특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이해를 위한 질문>


1. 성도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2.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성도'를 꼭 써야했던 이유는?


3. 신자는 신앙 생활에서의 실수와 실패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자에게 적극적으로 어떤 역할을 합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 신자의 이중 구조를 배움으로 나에게 어떤 위로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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