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 제자 훈련-1과 성도로 부르심
본문
<생각을 위한 질문>
* 신자로서 자신의 최고의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이해>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나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병행 구절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자기의 사도직을 설명하는데 그 사도 직분이 오늘날 우리의 성도라는 직분을 이해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쟁이 있었고 부도덕한 음행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아주 부패하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저들에게는 많은 은사와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은 유치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가장 큰 세 가지 문제였습니다. 그 외에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받은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면서 그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사도직이 변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도직이 먼저 확보되어야만 그가 지시하고 권면하는 말이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모든 판정과 결론의 순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을 특별히 주의깊게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도직이 대해서 도전을 받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0에 보면 바울에게는 외관상의 약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 10:10). 여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사색 당파 중에 아볼로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아볼로는 바울과 동역한 훌륭한 협조자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뛰어나고 또 상당한 웅변가였습니다. 말에 힘이 있어서 토론에서 유력한 지원사격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 편을 들었던 사람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특별히 외모를 공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바울이 지금 내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그것을 변명해야 될 실제적인 공격들 중 하나인 것입니다. 외모로도 시원치 않고 능력도 의심이 간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그가 그 일로 사람을 등쳐먹는 사람이라는 공격도 받은 것 같습니다(고전 9:11-15).
왜 우리가 이런 일들을 들추어내느냐 하면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된 것과 사도 직분의 핵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옹호하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신자로서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성경적인 요구대로 우리는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어야 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바울이 당한 것 같은 아픔과 조롱과 어려움과 억움함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며 감수해야 되느냐 하는 것의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불렀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하는 것이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는 근거이고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 속에는 자기가 받은 공격에 대하여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는 생긴 것이 사도답지 못하다"라고 공격할 때 생긴 것을 고쳐서 저들에게 대답해야 된다는 생각이 없으며, "말을 못한다"고 할 때에 말을 잘해서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사도직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목표와 방법으로 밖에는 수행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감당할 직분이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사도로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왜 이 꼴로 불렀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을 너희가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으나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나도 그것을 변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자직이 그렇습니다. 신자는 전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바울과 같은 직분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내가 기왕 하나님의 자녀요 이 세상에서 빛이고 소금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것은 주지 않으셨습니까? 보세요. 저 사람들이 나에게 이것이 없다고 공격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거나 섭섭해 하는 것은 우리의 직분이 어떤 것인지를 바울식으로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전 4:9이하에서 자신의 연약하고 실패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사도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멋진 것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직분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스러운 모습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서 그 직분을 수행케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바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네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존귀한 일에 사도겠느냐?"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나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부르셨고 그것들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고쳐주지 않았다는 이 엄연한 사실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을 더 나아가 "더욱 우리를 만물의 찌끼같이 모든 세상의 미말에 두시사 구경거리로 삼았다는 것밖에 나는 증거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도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 된 직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성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면 무슨 망신이냐고 하지만 그런 것은 자신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지 하나님에 관한 문제는 사실상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최고의 예증, 최고의 실례는 십자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왜 죽어? 거꾸로 정복해야지"라고 공격해 옵니다. 그것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공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씻는 작업이 제일 먼저 필요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로 보일 뿐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사역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빛이 될 수 없고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하여는 사도 바울식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 약함이 여러분에게 좌절거리가 되거나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한답시고 주님 앞에 쓰이는 일을 거부하고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 문제가 그에게 좌절의 문제이거나 사람들을 항복시키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과 다른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증거라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원에 속한 것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나의 존재 속에서, 그리고 나에게 맡긴 직분 속에서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의 직분을 그런 모습으로 감당하기를 요구하신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을 봅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10:1-8).
바울의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적극적이고 깊은 이해를 보십시오. 우리가 육체에 있으나 육체대로 싸우는 자가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신이 되었고 하나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죄의 최고 핵심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무릎끓고 싶지 않은 자존심입니다. 사탄이 어떻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는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너희에게 저것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 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방불해지려고 먹은 것이 선악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의 뿌리, 죄 된 생각의 종착점은 언제나 자기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적인 싸움에서 하나님의 일꾼은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만 그 직분이 힘을 발합니다. 내가 얼마나 강하고 센가가 등장하는 순간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은 거기에 함께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승리한 것, 극복한 것으로 절대 나타내지 않습니다. 형통하고 승리한 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증인들의 승리와 형통은 언제나 그가 주 앞에 엎드려 혼자 몸부림치고,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고 남의 도움을 무시하던 교만으로부터 어떻게 내가 주 앞에 거꾸러져서야 평안과 해결을 얻었는가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이 높아지고, 주님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으로만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신자 된 모든 직분들이 사용되도록 의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이유로 외형적인 모습을 주지 않으셨다고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싸움은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니요, 영적인 것이니라" 이렇게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많이 요구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사용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소원이어야 되고 그 소원에서는 돈이나 건강이나 지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부터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존재와 내 삶에서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매일 자기를 쳐 복종케 하십시오. 그것을 구하십시오. 죽는 법을 구해 보십시오. 주께서 존귀함을 받으시기를 매일 구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필요하다면 그 밖의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얼마나 간단한 진리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가 천만에 이른다는데 이렇게 세상이 어둡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이해타산을 위해서 도입되었지 십자가와 주님 앞에 무릎끓기 위해서는 하나도 쓰여지지 않았다는 데 대하여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고만장했던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의 대학자 바울이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철학과 사상으로도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학식있는 바울이,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어느 분 앞에 납작하게 엎드렸습니다. 그 분이 '이래라' 하면 자다 말고도 일어나 '예'하고 순종하고, '나 자빠져서 거품을 물어라' 하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항복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자신이 항복하고 있는 그 분이 드러나기를 기뻐하는 존재가 된 것을 나타내는 것 외에는 그의 인생의 소원도 없고 미련도 없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세지요? 이것이 센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가능한 한 남의 도움이 필요없는 사람이 되는 것, 사람의 도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지 않아도 자급자족하는 사람이 되고, 남의 도움이나 충고나 가르침이 필요없는 유아독존적인 신이 되는 것으로 동원되기가 일쑤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만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내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인식한 그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 간절함, 그 처절함, 그리고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있는 만족과 환희와 기쁨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충만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최고의 약점이고 이 약점은 근본적인 신앙의 약점이기 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바로 이런 시점에서 이제 점검하십시오.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자신, 사도로서의 자신, 그의 인생, 그것과 방불한 우리의 모습,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의 지금 존재는 바울과 방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시고 주를 아는 일을 우리의 발걸음과 우리의 삶을 통해서만 나누시기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를 존귀히 높이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의 존재와 삶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공격받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과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우리의 존재와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3. 본문에서 제시하는 신자의 최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4. 본문이 지적하고 있는 신자들의 최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 오늘 공부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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