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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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목사 제자 훈련-제 13 과 분별과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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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과 분별과 지혜   본문 / 마 11:28-30


우리는 용기와 만용의 차이, 지혜와 타협의 차이, 이런 것들을 아는 분별과 안목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제자훈련은 인생과 신앙 경륜에 있어서 많은 경험을 쌓고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서 이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키워진 분별력으로 실제로 목표 지점을 향하여 걸어가는 싸움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선과 악이란 윤리적 기준이 분명치 않은 일을 선택하 려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시곤 합니까? 예를 들면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해를 위한 설명>


제자훈련이라는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근본 적인 원리 하에서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것을 함께 이루 어가는 싸움이며, 그 함께 가는 싸움에서 우리가 절제해 야 되고, 양보해야 되고, 희생해야 되는 것도 있으나 또 고집해야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에 대 한 근본적인 이해와 원칙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더 풍성 히 하고 더 잘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분별과 안목 입니다. 한 마디로 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별과 지혜와 안목은 우리 신앙의 본 질을 지키기 위한 단호함에 경우에도 필요합니다. 기독 교 신앙 중에는 배타적일 정도로 유일함을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단호 하고 유일한 것들 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식으로 우리 것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 신앙이 커지느냐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다 다릅니다. 죽을 병에 걸려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누구는 권태로왔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누구는 위기에서 만나기도 하고, 누구는 성공해서 만나기도 합니다. 또 그의 신앙이 평화기에 발전하는 사 람이 있고, 고난기에 발전하는 사람도 있고 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될 사상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단호함 의 문제를 오해한 근본주의(fundamentalism)입니다.


근본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내용은 언제나 동일한 하나의 형태만을 취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 다는 것은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나쁜 데도 새벽기도를 하는 예는 드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정도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드물게는 한 번 도 안해 보던 사람이 정말 다급한 일이 생겨서 새벽같이 뛰어나오는 일도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외골로 달리는 것, 단호하고 선명 한 것, 그것은 하나의 목표와 기치를 드는 표적으로서는 가치가 있고 분명한 일을 해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을 살려 내는 방법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방향을 잡게 하는 가치가 있는 대신에 그렇지 못한 사람 은 정죄하려는 버릇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 선과 곡선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근본주의는 직선입 니다. 직선은 이쪽과 저쪽을 구별해 내는 확연한 분별과 차이를 만들어 내는 장점을 갖고는 있지만 그것이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는 대단히 나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목표에 도달하고, 목적을 이루는 것은 직선으로 갈 수 있 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내용은 하나의 형태를 가진다고 생각을 해서 거길 가야 하는 사람이 실제로 가야 될 때는 곡선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실제적인 길과 방법을 정죄하는 부작용을 낳는 것이 근본주의입니다. 보통 근본주의는 생활에서 나 타나기보다는 말에서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말을 하면 근본주의자에게 집니다. 말을 하면 완전주의, 이상 주의가 이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앉은 교회 안에서 저기 무역센터를 옥상까지 간다 그러면 맨처음 어 떻게 가야 됩니다. 직선으로 가려면, 벽을 뚫고 가야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근본주의적 신앙관은 저 벽을 이마 로 깨질 때까지 평생 받다가 순교하는 것이 됩니다. 미 련한 짓입니다. 실제로 가지 못하고 또는 안 가려고 그 쇼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려면 우리 출입구 가 반대 편으로 나 있으니까 먼저 반대편으로 나가야 됩 니다. 얼핏 보자면 목표와 반대되는 곳으로 나가 보이지 만 반대편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기 위하여 도는 것입 니다. 그 우회는 목표지점에 가기 위한 실제적인 싸움이 지 목표와 목적을 혼동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와 만용, 지혜와 타협이라는 선 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져야 됩니다. 목표에 기어코 도달하기 위하여 앞에 막힌 산을 돌고, 앞에 막힌 강을 돌아가는 것과 회피하려고 외면하는 것과는 얘기가 다릅 니다. 그러나 목표 지점에 가다가 장애물이 있어서 그것 을 돌아가는 모습은 외면하는 것 같고, 회피하는 것 같습 니다. 그것은 본인만이 아는 것입니다. 저기 목표한 지 점에 기어코 가야겠는데 가다가 쉬어야 되는 것, 가다가 밥을 먹는 것, 이건 다 가기 위해서 쉬는 것이고, 가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저기를 가는 것이라는 표만 내고 실제로는 가지 않을려는 마음에 간다는 쇼만 하기 위해서 그 쪽 방향으로 열심히 헤딩을 하고 있는 것과는 얘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와 만용의 차이, 지혜와 타협의 차이, 이런 것들을 아는 분별과 안목이 많이 필요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제자훈련은 인생과 신앙 경륜에 있어 서 많은 경험을 쌓고 그것을 말씀에 비추어서 이 분별력 을 키우는 것이 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키워진 분별력으 로 실제로 목표 지점을 향하여 걸어가는 싸움입니다. 이 것이 솔로몬의 지혜요. 모든 성도들이 갖고 있어야 되는 지혜입니다. 누구를 살리냐의 싸움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출애굽해서 시내산 아래 모여서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40일 동안에 아래에서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죽이겠 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 백성을 죽이시려면 제 이름도 빼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게 무슨 얘 기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옳았느냐, 내가 얼마나 굉 장하냐'가 아니라 이 백성을 구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 임을 아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으셨습니다. 누가 더 중요합니까? 우리가 더 중요한 겁니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목숨보다 우리가 더 가치있다는 의미가 아 니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초점이 어디 있냐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제 자훈련이 안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내가 오해를 받는 꼴 을 아무도 안 참는다는 겁니다. 교회가 깨지고 상대방이 묵사발이 되는 한이 있어도 내가 옳다는 것만은 증명을 해야 됩니다. 이 싸움에서 다 지는 겁니다. 그러지 마시 고 상대를 살리는 싸움을 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제자도 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며, 많은 열매를 위하여 심기우는 밀알이 되 는 것입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하여 남을 죽이지 말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죽어야 하는 겁니다.


분별과 지혜의 차원에서 무엇이 정직이냐 하는 싸움 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실수를 하느냐 하면 '나는 정직했다, 혹은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것만 으로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무조건 나를 용서해야 되 고, 무조건 그 다음부터는 없었던 것으로 해야 된다는 요 구를 하기 시작을 하는데 그건 잘못입니다. 만일 자기 실수를 고백해야 되면 고백을 하고 벌도 달게 받을 각오 를 하셔야 됩니다. 짐을 넘기는 식이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나 할 것 다했어. 그러니 이제부터는 당신이 책임 을 지세요'는 안됩니다. 그건 정직이 아닙니다. 내 짐 을 상대방한테 떠넘기는 걸 정직이라 그러지 않습니다.


책임 회피라고 합니다. 평생 그 짐을 지고 미안해 하면서 살으셔야 됩니다. 그것이 정당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서 그의 과거를 감춰주시고, 지금 자기가 받지 못할 대접 을 받게 하신 것을 감사하면서, 다른 모든 문제에서 어떤 의미의 희생을 달게 받으면서 사는 것이 정당한 신앙입니 다. 이것을 잘못 쓰지 마십시오.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 무슨 가장 모범이 되는 모델이 라든가, 스텐다드라든가, 표준이 되는 것은 훌륭한 것,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한 것일 겁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못 났다든 가, 타협을 했다든가, 게으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별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만은 다르다'라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일이 유별나지 않다고, 훌륭하지 않 다고 제가 자꾸 강조하는 것은 조금 전에 예를 든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 훈련들은 짐을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멋있게 나타날 수는 없 죠. 멋있게 나타나는 사람은 전부 훈장을 달고 나타나야 지 짐을 지고 나타나서는 안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세 상적으로는 우리가 모든 고민을 털고, 짐도 털고, 백마 타고, 칼을 높이 든 모습으로 승전가를 부르는 승리자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오늘도 그 일을 다 끝내지 못한 일꾼 같이, 아직도 풀어야 되는 숙제가 많은 학생같이 오늘의 삶을, 내 몫을 지켜나가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지기 때문 에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 이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펴 보는 바와 같이 실제로 신 앙생활을 해나가는 이 일에 있어서는 그 신앙 생활이 직 선적이지 않고 대단히 곡선적이라는 분별이 있어야 되고, 그것이 지지고 볶는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 다. 그래서 우리의 안목은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면 우리 의 싸움이 보이는 싸움도 아니며, 자랑하는 싸움도 아니 며, 시원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목표하 고, 우리가 부름받은 자리에 가기 위하여 현실이라는 길 목을 돌고, 돌고, 돌아서 거기에 도착해야 되고, 그 돌 고, 돌고, 도는 것이 감춰져 있고, 권태롭기 짝이 없는 인내의 싸움이요, 긴 싸움이요, 반복되는 싸움이라는 것 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리 좋은 신앙과 아무리 좋은 방법을 가지고도 그 문제가 하 루 아침에 해결되는 싸움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짐을 지고 가는 싸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제 가서 짐을 벗느냐 하면 여러분이 이 세상을 하 직해야만 짐을 벗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내 짐을 벗게 하 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 이 요구하는 제자훈련의 목록들을 보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짐을 내가 지고 있는 것이 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마치 한 건물의 기둥과 같습니다. 기둥은 그 건물 이 필요로 하는 한 지붕을 이고 있으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여러분들의 신 앙 생활과 인생살이 속에서의 어떤 짐들, 그것이 가족에 관한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그 짐 은 여러분이 짐으로써 여러분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지 어 떤 방법으로든 그 짐을 벗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하면 그것은 사실 본연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도망가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성경말씀으로 마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 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 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이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수 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대하는데, 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짐을 대신 져주신다는 내용은 없습니 다. 우리는 얼핏 보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해놨으니까 주님이 그 짐을 대신 져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그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짐이 쉬었다 그럽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그 짐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쉽습니까? 마음으로 억울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쉽습니다. 그 짐을 지는 것이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이 요, 주님의 책임입니다. 그 짐을 짐으로써 열매를 보시 는 구원의 사역의 짐입니다. 기꺼이 지신 짐입니다. 우 리에게도 그렇게 요청하십니다. '너희가 지는 짐이 무엇 인지 알고 어떻게 져야 되는지 나를 보고 배우라'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이 헛된 세상에서의 보상과 억울함에서 벗어나셔야 됩니다. 이렇 게 짐을 지는 삶이란 크게 튀어나지 않고, 일상에 묻혀있 는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보석이란 대부분 희소가치 때문에 보 석이 되는 예가 많고, 유명한 사람이라는건 다 어떤 독특 함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세상의 법칙입니 다. 세상의 경쟁적이고, 남과 같지 않고, 나만 가진 것 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은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공기, 물 이런 것들입니다. 성도들의 경우엔 구원, 하나님의 사랑, 보호하심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은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이아몬드, 이런 것은 하나님 쪽에서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 는 가지고, 누구는 안 가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눈 두 개, 이것은 누구에게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중요함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성도에게 줍니다. 성령님의 내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는 것, 이런 것은 모두에게 주십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어떤 특별한 체험, 방언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합니다. 그것을 받아서 신앙이 꼭 더 낫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누구 에게 허락하시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낫다는 것은 아닙니 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가장 조심 히 다뤄야 할 것은 모두에게 주었기 때문에 과소평가하는 것은 없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보기엔 신앙생활이 란 지지고 볶고 사는 것입니다. 그걸 소중히 하십시오.


형제 중에 누가 아프다고 해서 병문안 한 번 가는 것, 굉 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도와준 것, 주님께 한 것이랍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 게, 모두에게 있습니다. 배우고 가진 사람만의 일이 아 니고 모든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할 줄 알아야 되고 그 일의 귀중함을 알고, 그 일에 충성되고, 세상적 가치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이 참다운 제자의 삶이요, 모습이요, 훌륭한 길인 것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근본주의가 오해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의도는 무엇 입니까?


2. 솔로몬의 판결과 모세의 기도에서 배우는 점은 무엇 입니까?


3. 신자가 신앙적 환경이나 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신앙의 최고 원리는 무엇입니까?


4. 잘못했으면 정직하게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벌을 달게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잘 못해서 사과했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무엇 을 오해해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5. 짐을 지는 삶이 일상에 묻혀 있는 평범한 삶일 수 밖 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우리가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것을 싫어하는 원인이 어디 있는지 각자의 경우를 서로 말씀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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