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 제자 훈련-제 9 과 제자된 자의 원리(I)-진리
본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것을 분명히 아는 것으로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신자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서 땅 끝 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고, 제자가 되어야 하는 책임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해를 위한 설명>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고, 제자가 되어 행해야 되는 책임을 생 각하면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이 며 우리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실 천해야 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야 되었던 것 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결정적으로 어떤 문제에 봉착하 게 되느냐 하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우리 주님께 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이 일에 있어서 그것이 다 만 지식에 전수라는 교육이라든가, 훈련이라는 차원 이전 에 근본적으로 다른 사명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 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가 확정되 지 않으면 저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고 우리의 인생관과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인가가 분명하지 않고는 나누어 줄 것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주께서 나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칠려고 하는 그런 사람으 로 내가 바뀌어 있다는 것에 먼저 초점을 두지 않고 '가 르친다''전수한다'에 초점을 두는 것은 순서가 어긋났다 고 생각됩니다.
'예수의 증인이다'그러면 예수가 누구냐를 설명하고 전달하는 자 이전에 그것을 전달하고 그것을 가르칠려고 하는 내가 누구냐가 먼저 분명하게 확인되는 일이 증인되 는 일의 첫번째 몫이라 말입니다. 저 사람이 무엇을 가 르치는냐가 아니라 저 사람이 왜 그것을 가르치느냐가 초 점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일단 예수의 증인되는 일은, 말로 나열하고 꺼내서가 아니라 존재로서 증인이란 말입니다.
제자훈련이 전도훈련으로 오해되는 것으로 인해서 시비를 걸었듯이 기술과 방법론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 유가 여기 있습니다.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고,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강조되어야 제자훈련이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제자훈련과 전도훈련은 같 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전도를 해야 됩니 다. 그러나 전도는 제자된 자의 여러 몫 중에 하나일 뿐 입니다. '제자 = 전도' 이렇게는 안됩니다. 물론 증인 이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그는 전도적 지위에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의 증인의 몫을 감당해야지, 전도를 한다는 행위로서만 제자라는 것이 확인이 된다면 잘못이라는 말 입니다. 우리는 말하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 법과 모습과 원리로서 분명히 이 사람은 다르다'라고 증 언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차적 책임입니 다.
존재적인 차원에서 예수의 증인된, 제자된 자들의 원리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것,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아는 것, 즉 진리와 생명으로서의 변화, 이것이 이 증인에게 있어 서 필수적인 조건인 것입니다. 첫째는 진리고 둘째가 생 명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가시면 31절에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 게 나옵니다. 제자된 큰 특징 중에 하나를 진리라고 합니 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에 첫번째 핵심되는 원리는 진리라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를 자 유케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거짓을 고발하며 바른 길 을 제시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편협하느냐는 지적을 불신자들로부터 받는 경우가 많으실 텐데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불교는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배타적인 것은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 고, 저들은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답이 있다는 것 은 정답이 아닌 모든 것을 틀렸다라고 얘기할 수 있고 정 답이 없는 자는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차 타고 다니실 때 중앙선 침범이라는 것이 큰 교통규칙 위반입니다. 그런데 중앙선을 그려 놓아야 중앙선 침범 이 있지 줄을 그어 놓지 않으면 중앙선 침범은 없습니다.
일부러 고발을 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는 효과를 가집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갖는 배타성으로 보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타성이 아니라 정답을 알기 때 문에 나오는 부수적인 어떤 효과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에 하나는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것 을 분명히 아는 것으로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다 어떻게 사는가 하면 자기의 욕 심을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이루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러니까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둘을 다 바 꾸어야 하는데 '무엇을'은 그냥 있고 '어떻게'만 하나님 이 개입 하시는 겁니다. '무엇을'이라는 목표는 내가 갖 고 있고 '어떻게'는 내 힘만으로는 안 되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열심을 떠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성도들에게 있어 제일 많이 틀리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신앙 생활을 30,40년동안 했다고 하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늘 헷갈리는 신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인 행사에도 익숙하고 기도도 잘하고, 무슨 성가도 하고, 무 슨 봉사도 잘합니다. 그런데 일상 생활로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보다 조금도 양보를 안합니다. 진리와 거짓이 있 는 것이 아니라 융통성과 재주만 늘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 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7-18) 믿지 않는 자들에 관한 설명은 진리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허망 하다는 것은 과녁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 을 해야 되는지, 왜 살아야만 되는지, 그걸 어떻게 살아 야 되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얼마나 그 표현들이 다 진리라는 차원에서 언급되고 있는 가를 보십시오. 목표도 없고 기준도 없으니까 잘했 다 못했다의 감각이 있을 수도 없고 양심상의 가책이나 올바른 길을 갔다, 틀렸다의 감각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무지한 겁니다. 미련하기 이전에 모르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몰랐다는 것에 대해 많이 봐주지만 모르는 것 은 큰 죄입니다. 예수를 모르면 안 믿은 것과 똑같은 것 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이 불신자들의 삶의 큰 특징이 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은 누구입 니까?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 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 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언제나 진리입니다. 저 쪽은 19절에 있는 바와 같이 "저 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그냥 물 결치는 대로 바람부는대로 내버려 둔 그런 인생인데 반해 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들 같지 않다는 것 은 저들 같이 방탕하거나 더러움에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 는 말입니다. 진리를 알고 생명에의 감각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정도 가지고는 안됩 니다. 그런데 우리는 윤리 도덕적인 수준에 있는 것을 더 평가해 주고 진리와 생명 안에 있느냐는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표현들을 잘 보십시요. 옛날 하 나님을 모르고 구원 얻기 이전에 자신을 방탕에 방임해서 물결치는대로 바람 부는대로 갈 때는 우리는 어디를 목표 로 삼고 애를 써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가는대 로 떠내려 흘러가면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 수를 믿고 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슨 오해 속에 있느 냐면 '하나님! 제가 주를 사랑하고 주의 뜻을 따라 살 진심이 있사오니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 데 하나님이 힘을 주지 않고 진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보여주지, 내가 그 것을 할 힘을, 일의 태엽을 감아주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하나님이 내 마음에 거룩한 마음 을 주시고, 거룩한 힘을 주사 거룩한 곳으로 나를 떠밀고 갈거라고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것을 아는 겁니다. 그 아는 걸 내 가 실천해야 됩니다. 물결에 휩쓸려 가던 생명없는 자에 서부터 생명를 가진 물고기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유혹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 으로 가는 길을 내가 해야되는 것입니다.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생래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습관으로, 제 2의 천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성화 나 거룩한 것들은 기도해서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연 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제자훈련이 나오는 겁니다. 이제 제자훈련의 적극적인 모습의 입구가 보입니다.
본질적으로 제자훈련은 절제와 거룩한 경건의 연습 의 익숙함을 위한 훈련입니다. 전도지 돌리는 것이 제자 훈련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기도했다, 성경봤 다, 부흥회 참석했다, 전도했다로 자기가 할 신앙적인 책 임을 다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제하고 참고, 견디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이 모든 것 을 습관화 해야 되는 것입니다. 표정과 감정과 행동과 모든 것을 그것으로 바꿔나가는 싸움이 결국 제자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지도력을 가 진 특수 계층의 책임이 아니고 신자 일반에게 요구되는 본질적 책임이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도가 뭐냐, 제자된 모습이 뭐냐 그럴 때 행위, 업적이 아니며 능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 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 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 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우리는 횃불이나, 레 이저나, 화염병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밝히는 것이지 타오르는 불길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 게 하고 싶습니까? "성령이여 임하사 이 온 세대와 이 온 민족을 그냥 성령의 불길로 삼켜 주옵소서" 이런 건 없어요. 왜 이렇게 정복적이고, 왜 이렇게 파괴적인지 모 르겠습니다. 그냥 우지끈 뚝딱 밀고 들어가는 식의 싸움 을 왜 그렇게 전도적 사명으로 갖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입니다. "저 사람은 다르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저 사람 안에는 분명히 우리가 갖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 것이 예수의 증인입니다. "왜 저렇게 됐느냐?"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느냐?" "저들이 믿고 저들이 목적하 는 건 뭐냐?" 이렇게 따지게 만들어야지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없다' 그러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찾아 가서 "예수 믿으세요. 좋은 말로 할 때 믿으세요. 안 믿 으면 가만두지 않을거예요"는 아닙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그래서 예수의 증 인된다는 것은 '우리가 달라진 것으로'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차원이 아닙니다. 생명과 진리의 문제인 것입니 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예수의 증인이 되는 이 문제를 전도적 차원에서 생각할 때 그것은 업적과 테크닉으로 가 는 것은 성경이 얘기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제자훈련이 기술과 방법론이 아닌 존재적 차원의 일 이라면 예수의 증인된 제자로서의 원리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2. 신자들이 진리를 근거로 하지 않을 때 예수믿는 신앙 생활에서 제일 많이 틀리는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3. 하나님께서 "제자 주를 사랑하고 주의 뜻을 따라 살 진심이 있사오니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에게 힘 을 주지 않고 진리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절제와 거룩한 경건의 익숙함을 위하여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전도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이 했던 방법과 본문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서로 말 씀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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