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 제자 훈련-제 8 과 제자훈련과 기도
본문
기도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시며 하나님이 내가 어떠하기를 원하시는가?' 따 라서 우리는 기도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쓰여지 는 주문이 아니고, 방법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 나님과 대좌하게 하는 특별한 초청인 것을 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공예배나 구역예배 때에 기도순서를 맡으면 기분이 어 떻습니까? 왜 그런 기분이 들게 되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요.
<이해를 위한 설명>
우리가 앞과에서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것이, 또 기 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존재와 삶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일을 위해서 성경을 아는 것이 필수적인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하나 님을 아는 이 일을 위하여 씌여져 있는 계시로서의 성경 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간구할 수 있고, 물어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우리가 기도를 해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신자로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거룩한 것 들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행 위고, 확인 이전에라도 의와 거룩과 생명과 진리에 속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것 때문에 기도가 필요 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믿음을 다루는 문제 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주문이 아니고 내가 요구하는 결과 를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며 이제부터 가져야 하고 채워 야 하고 넘치도록 해야 되는 거룩과 생명에 속한 것이 세 상에서부터 얻어지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 이 기도라는 당연한 결과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그 대표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변화산에 올라갔다 내려오시는 예수님 앞에 한 사람 이 제자들이 못고친 귀신들린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나왔 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치시고 9:29에서 이렇 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겁니다. 어떤 사본에는 금식이 더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금식이란 '내가 신령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세상 의 것이 힘이 되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람은 먹어서 힘을 냅니다. 먹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얻을려는 힘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신령한 것, 하나님이 주시는 것 입니다'라는 표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기도 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란, '지금부터 내가 얻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은 거룩하고 신령한 것들인데 이것을 세상이 주지 않았지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 나님께 구하러 온 것입니다. 제가 얻을려고 하는 것은 신령한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에스겔서 36장에 가면 지금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 하기 좋은 역사적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겔36:33-3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 땅이 황폐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 을 다시 회복시킬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회복될 수 없을 지경의 형편에 와 있는데 그것을 회복케 함으로써, 이건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이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일반적인 하나 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증명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려야 이루어 주시겠답니다. 기도를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된 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생각을 하는 데, 기도를 하면 되고 기도를 안 하면 안 되는 문제가 아 니라 그 일을 누가 하시는 것이냐의 확인을 위해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고 그 일이 일어나면 누 가 한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묘자리를 잘 써서 그렇게 된 것인지, 어젯밤 꿈을 잘 꾼 탓인지 불분명해지 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했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은 다 하나 님으로부터만 말미암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것 에 초점이 있습니다. 일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초점이 아 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도의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기도하는 요청이, 기도 속에 들어있는 간구의 내 용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 이런 주님의 가르치심이 있습니 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 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7-8).
여기서 중언부언이라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다'하는 식 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같은 말 을 여러번 할 수 있습니다. 그 간절함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하는 것을 중언부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정성을 바치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고 기도의 결과를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은 다른 것이 아니고 "비나이다 비나이다"입니 다. 그러니까 자기의 소원을 얻기 위한 열심만 있지 그 기도의 내용이 무슨 당위성과 무슨 필연적인 근거를 가지 는지 그래서 결과를 얻을 이유가 있는지가 없다는 것입 니다.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이 기도가 응답 될 필연적인 어떤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부합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당위성이 있어야 되는데, 이 당 위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의미의 당위 성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도의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기도하는 요청, 기도 속에 들어 있는 간구의 내용 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 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 설명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설명이 많은 이유는 내 생각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당연히 맞다는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 니다. 주문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주문은 가장 신속하 게 외우고 나열하면 그만이지만 기도는 그렇게 안됩니다.
기도는 편지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자신 이 왜 기도를 하려고 하는지, 하나님께서 왜 이 기도를 들어주셔야 되는지를 평소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을 근거로 하여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설 명은 설득과는 다른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사 저들을 멸하겠다 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뭐라고 중보기도를 하느냐 하 면 출애굽기 32장 11절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 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 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 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 이다"(출32:11-13). 이 기도의 내용이 재미있지 않습니 까? 간절하고 열심이 전부가 아니라 기도의 중요한 틀이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히 따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힐문을 하고 무뢰하거나 건방지게 기어오르는 식의 얘기가 아니라 생 각이 오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는 성경에 서 배우는 것과 별개로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는 부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도 모르게 많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일하 시는 방법에 대하여 특별한 깨우침이 기도 속에 있는 것 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부적과 주문의 신앙이 아닙니 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부르짖지 않았던들 일어나지 않았고 하나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그 런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생각할 틈이 없이 따 발총을 쏘면 안됩니다. 막힘없이 쏟아붓는 것을 잘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입니다. 기도는 좀 씹어가면서 해야 됩니다. 또박또박해야 됩니다. 그렇다 고 어눌하게 하는 것이 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할 틈이 없이 쏟아내는 것은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 서 통성기도는 굉장히 생각해 볼 문제인 것입니다. 통성 기도하면 옆에서 떠드는 바람에 방해 받지 않을려고 그냥 막 읊는 거 아닙니까? '누구 목소리가 더 큰가' 이것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기도를 소리 내서 같이 해 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공통된 기도 제목을 놓고 간단 한 내용이지만 절실한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통성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더 이 상의 생각이 필요없기 때문에 모두가 합심해서 소리를 내 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도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 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내가 어떠하기를 원하시 는가?' 따라서 우리는 기도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쓰여지는 주문이 아니고, 방법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대좌하게 하는 특별한 초청인 것을 봅니다. 하 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견,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게 합니다. 우 리에게 일어난 일과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하여 하나 님 앞에 가서 일종의 따지는 일을 허락하는 이 일은 하나 님이 우리를 기계나 종으로 부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을 하나님이 기계나 종으로 부리시지 않고, 설득하 시며 의논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와 의논하시며, 우리 를 설득하시며 우리를 항복시키셔서 일하시기를 기뻐합니 다. 이것은 하나님의 한 성품이며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럴 수 있다는 것이 기도입니다.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디로 밖에 못 써 먹습니까? "주시옵소서"밖에 못 써 먹습니다. "주시옵소서". 이것 은 신자가 누려야 할 특권을 스스로 박찬 꼴이 됩니다.
기도는 하다 하다 할 수 없어서 맨 마지막으로 뛰어가는 무슨 전당포 같은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된 이해들 로 인해 어떤 버릇이 있느냐면 현실의 제자훈련이라는 상 황을 놓고 볼 때 믿음도, 성경도, 기도도 다 기술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보란듯이 뭘 해드 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믿음이나 기도나 성경이나 어느 것 하나 일과 기술로써 쓰여지는 것은 볼 수 없고, 하나님이 그 궁극적인 목적을 우리에게 다 두고 있는 것 을 봅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이나 성경 안에서 우리가 깨우치는 것이나, 기도가 필요한 것은 그런 모든 것이 수 단과 방법으로 소용되지 않고 그것 자체가 다 하나님 앞 에서 존귀한 인격자로서 대접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답답하고, 내가 안타깝고, 이상해서 가지고 나 가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와 대좌 를 기뻐하시는 것이 더 먼저이고, 무슨 문제가 풀려서 어 떤 일이 되는 것은 2차적인 결과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하나님께 내가 열심히 기도하여 무엇 무엇이 이루 어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가서 하나님을 만나뵙고 하나님 앞에 앉았느냐에 그 자랑이 있는 겁니다. 기도란 '해라, 마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꾸 기도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그 기쁨과 그 대접을 누리라는 차원에서이지 그렇게 함으로써 남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다, 그래서 어떤 일이 해결됐다는 차원에서는 아니란 말 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는 내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하게 쓰임을 받 는가 하는 명분과 가치로서 보다 우리 자신의 지위와 대 접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되는 가장 큰 이 유는 무엇입니까?
2.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 수 있는 일을 왜 우리에 게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3. 출 32장에 나온 모세의 기도를 평가해 보십시요. 왜 그런 기도가 허용됩니까?
4. 기도가 특권이란 말의 의미를 본문을 토대로 하여 설 명해 보십시요.
<토의를 위한 질문>
1. 왜 우리는 더 자주 기도해야 됩니까? 그 이유를 생각 해 보시고,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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