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 제자 훈련-제 6 과 제자의 믿음
본문
믿음은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한 기술과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의 허망함과 모든 시험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함을 쌓아 나가는 일을 승리케 하는 우리의 분별과 안목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여러분은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항상 같은 답변을 하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답변 이 무슨 이유 때문에 달라지게 되십니까?
<이해를 위한 설명>
믿음은 진리와 생명에 관한 것이요 진리와 생명에 관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믿음으 로 산다는 것은 진리와 생명된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 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좀 더 현실적이 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세분화시켜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 니다.
신자의 삶을 규정하는 믿음의 내용 그 첫번째는 죄인된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분별입니다. 세상이 무엇이 며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이라 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지만 동시에 세상과 결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우리와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을 올바로 아는 것이 믿 음의 주된 내용이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 을 말하여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 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 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7-19). 이 것이 죄인된 인간의 모습이요, 죄가 주도하는 세상의 모 습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큰 부분이라는 것 을 알아야 됩니다.
우선 죄인된 인간과 세상의 첫번째 큰 특징은 허망 하다는 것입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올바른 목표와 보람 있는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녁이 없습니다. 과녁 이 없는 곳에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잘 못 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초점이 있어야, 과 녁이 있어야 맞았다 안 맞았다가 있지 않겠습니까? 왜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만 이렇게 배타적이고 편협합니 까? 우리가 진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정답이 있을 때 만 오답이 증명이 됩니다. 맞는다는 것이 있어야 틀린 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데 맞는 것이 없으면, 즉 과녁이 없으면 어디가 틀렸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상을 볼 때 제일 웃기는 것은 모든 것에다 가 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자가 집안을 돌보지 않고 남편과 자식을 차버리 고 뛰쳐나가면 옛날에는 "무슨 무슨 무슨"이라고 했습니 다. 그런데 요새는 "용기있는 여성 인권주의자" 이런 말을 하는데 이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나중에 하나님 앞에 여 성 인권을 위해서 일하다가 왔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 고 그러실 것 같습니까? 천국에서도 여성 운동가로 살 아요? 훌륭하실 거예요. 허망해요, 참 허망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허망한 사람들이 떼를 지으면 설득력을 지닙니다. 유행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멋있거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다는 것이 유일한 설득력 아닙니까?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지킵니까? 그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허망하고 총명이 어두워 무지합니다.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당하고 진실되면 세상에서 평가를 받고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 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일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훌륭한 일이 아니고, 거룩한 세계에서의 훌륭한 일은 어려운 길을 가는 겁니다. 고독한 길을 가는 것입 니다. 실패자의 길을 가는 경우가 휠씬 많습니다. 그것 을 끝까지 견디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또 세상은 생명이 없고 감각이 없어 방탕합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허송세월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향하여 쌓아가고 연결해 가는 것이 없는 생활을 방탕하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 활은 더럽습니다.
이런 세상과, 인간의 모습은 믿음을 가진 자만이 압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진리와 생명을 부여 받은 새 생명을 가진 자만이 비로소 알고 이것을 비켜가며 여기 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초점을 삼으려는 것은 이 것입니다. 결국 신자란 '죄를 피하고 의와 거룩을 목적 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땅 끝까지 이른 증인의 모습이 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보여줘야 할 우리의 진 면목입니다. 그것은 활동적이고 사건적이기 보다는 훨 씬 존재론적이며 인격적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해결하고 어떤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나 수단이나 기술이 아니고 성품적이고 전인적이며 근본 적인 변화를 받은 새 생명의 모습,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신자의 삶을 규정하는 믿음의 내용 그 두번째는 종 말론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이라고 하 는 것은 현실 도피적이거나 내세지향적이라는 뜻은 아닙 니다. '종말론적' 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면 현실 도 피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은 다 무가치하고 다 쓸데 없고 빨리 주님이 오시고 그 나라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자라나 완성된 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6절,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 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 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 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 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6-10).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평가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거기서 받을 평가는 지금, 여 기서 시작하여 그 때, 심판받을 날까지 완성하고 키워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생명이 진리 안 에서 자라나는 일을 시작해야 되고, 가꾸고 키워, 마침 내 주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된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책임을 가진, 그리고 거기서, 그 때 받을 평가를 위하여 지금, 여기서 시작하고 가꿔 나 가는 것을 종말론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도 피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번째로 믿음의 중요한 또 하나의 성격은 생각하 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라나 야 되는 것이기에 그 근거가 되는 진리를 생각해야 됩니 다. '믿음은 진리에 근거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 각한다는 것은 소원에 근거하여 치성을 드리는 것과 대 비해서 쓰는 표현입니다. 치성을 드린다는 것은 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무작정 열심을 드려 그 결과 를 이루어 줄 대상을 항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지성 이면 감천이다'하는 겁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초월적인 힘을 빼앗아 오는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을 배워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나를 바꿔 나가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믿음을 동원해서 내가 하 고 싶은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려고 합니다. 그것은 치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 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을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 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 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 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 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 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5-30).
이 내용들을 잘 보시면 굉장히 논리성을 가지고, 논리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여기서 공중 나는 새를 보라는 것은 그냥 쳐다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고 생각을 좀 해 봐라'입니다.
여기서 하는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믿음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음의 강함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하나님의 일하심에 부합된 것을 말하지 기술적 측면이 아닌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 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 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 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여기에 믿음의 핵심이 아주 잘 드러나고 있는데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께 정성을 바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 음이란 내가 하나님을 공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과 의를 위하여 요구하시는 것을 열심이 아니고 아는 것입니다.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역하는 것은 뭐와 같으냐면 "사술의 죄와 같고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없는 것이 며,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핵심, 믿음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한 기술과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의 허망함과 모든 시험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함을 쌓아나가는 일을 승리케 하는 우리의 분 별과 안목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의 생 명과 진리로 말미암는 그 단마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입 니다.
오늘날 이 믿음을 가르쳐 주어야 되는 교회와 거기 서 이 믿음을 배워야 되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세상을 보 는 눈과 하나님이 성도들을 어떻게 만들어 가려고 하시 는가는 안 보고, 다른 모든 일은 제멋대로 살다가 하나 님의 이름으로 갑자기 모여서 십자군 전쟁 한 번 하고, 그러고 돌아가서는 또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되는 식으로 타협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합2:4)입니다. '세상이 이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악당들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저들 은 미끄러운 자리에 버려진 것이다. 내가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 나를 거룩으로 인도하시기 때문 에 생기는 것이다. 오늘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며 나한 테 맡겨진 일을 한다. 한 달란트를 지키며 그 책임을 다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신자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내용 세가지는 무엇이라고 본문은 말 합니까?
2. 다음 각각의 용어들은 세상의 특징을 묘사하는 단어들 입니다. 각각의 의미를 규정해 보십시요.
1) 허망하다 :
2) 방탕하다 :
3) 유행 :
3. 어떨 때 믿음이 강해지고, 어떨 때 약해집니까?
4.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제사일까요? 사울왕이 좋은 짐승을 제사용으로 남겨 놨다고 변명하지만 사무 엘에게 크게 책망 받은 사건을 통해 '믿음'은 어떤 성 격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5. 결국 본문에서 정의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우리 자신이 오늘 한 달란트의 책임을 지고 사는 길은 어떤 것이 있는지 말씀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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