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 제자 훈련-제 4 과 제자됨과 사랑(II)
본문
제자도는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 하는 것이요, 그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동참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임 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나누어도 손해 보지 않는 일이며, 부요한 결실을 맺는 길임을 그 수 혜자에게와 그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동참한 우리 모 두가 확인하는 일로써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하나의 일거리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된 본질과 격(格)에 관한 문제임을 배우는 것입 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불신자를 전도하러 갈 때 우리의 심정은 어떤 상태입니까? 해당되는 것에 check(V) 해 보십시요.
․ 호응이 없을까봐 불안하고 두렵다 □
․ '믿으면 좋고, 안믿으면 말라'라고 담담하다 □
․ 복음의 날선검을 들고, 불신세계를 공격하러 간다□
․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간다 □
․ 내게 이미 누리고 있는 풍성함을 나눠주러 간다 □
․ 저들을 섬기기 위한 자세로 간다 □
․ 교회에서 시키는 일이니 의무로 한다 □
․ 기타 ( )
<이해를 위한 설명>
지난 시간에는 제자도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에 대 하여 공부했습니다. 그 사랑은 나의 만족을 위한 사랑이 아니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 면 이번 시간에는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 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 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 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눅 10:25-29).
율법사의 질문은 이겁니다. '어디까지 해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다하는 것이 됩니까? 사돈에 팔촌까지면 됩니까? 아니면 버스타고 두시간 거리 내에까지 입니 까?' 그러자 주님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선한 사마리아 인 비유를 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36절, '내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질문과 답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시겠습니 까?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해라"였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상이 분명한데 이웃 은 어디까지입니까?" 바리새인의 질문은 '사랑을 할 자 쪽에서 어디까지 해야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은 강도 만난 사람이 볼 때 누가 이웃이냐는 것입니다. 37절에 답이 나옵니다. "가 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 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이 바로 '땅 끝까지'와 '모든 족속'입니다. 땅 끝까지, 모든 족속 앞에 십자군기를 들고 내가 가진 구원 과 내가 깨우친 진리를 쟤는 의미에서 나눠 주러 가는 것 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었 듯이 저들을 도우러 가는 자로, 하나님 앞에 일을 맡은 자로, 종과 섬기는 자로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대접을 받는 자로서 선생과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 실제 내용으로서는 그런 면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 오히 려 종과 하인으로서 보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냈듯이 우리가 이제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영혼들을 향하여 하나 님의 종으로 섬기려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 땅 끝까지요, 모든 족속 앞에 가는 것입니다. 전혀 자세가 달라진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에서 잘난 척 을 했듯이 주님의 크신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잘난 척 을 꼭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섬기는 것으로 규정지워진다는 것을 놓치지 않 아야 됩니다. '대접을 받듯이 가지 않고 섬기는 것으로 간다'. 이유는 제자도가 내가 무엇을 나누어 준다는 시 혜자로서의 자랑보다는 주께서 하시는 일을 옆에서 시중 드는 자로서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땅 끝까지 가 는 이 일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이 일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났던 '원 수를 사랑하라'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 내가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안되는 자가 다 내 이웃입니다. 모든 신자의 이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한 자요, 그 은혜를 소개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시중들 어야 되는 대상이 다 우리의 이웃인데, 그럼 누가 제일 먼저입니까? 원수가 제일 먼저라는 겁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을 하고 갈만한 곳에 가는 것,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취미활동입니다. 사랑은 베푸 는 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자가 결정하는 것 입니다, 그 대상과 그 일을.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전파한다는 우리의 사명을 누 가 더 멀리, 더 어려운 곳에 가느냐의 싸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태국 가서 선교사 하는 것과 아프리카 콩고 에 가서 선교사 하는 것은 어느 쪽에 더 쎄 보입니까? 그것 말고 여러분 주변을 보십시요. 먼 곳에 가는 것이 자랑이 아니고 내 주변에 얼마든지 널려있지 않습니 까?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이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찾으러 다녔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은 다 오시 오" 이렇게 말하고 다닙니까? 가다가 우연히 만난 겁니 다. 그 때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더 멀리 가고, 누가 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으로 잴려고 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 는 아무도 종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이 되 며, 섬겨야 되는 이 싸움, 이것이 제자도요, 그것을 훈련 해야 되는 것이 제자훈련입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또 다 른 하나의 핵심은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편안 하고 폼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고달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갖되 그 사랑을 무엇으로 감수해야 되냐면 섬기는 것으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섬김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이유 와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태복음 22장 3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 다함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4-40). 여기서 왜 율법의 대강령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됩니까? 하 나님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게 충분하시다'라는 뜻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하나님이 우리 에게 보호자 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 이외에 더 필요한 다른 근거와 보호자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 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도적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등은 모두 다 나에게 주신 것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23편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여호와는 나의 목 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가진 것으로 내가 불평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 님은 나에게 충분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 아서 내가 가져야 될 그 핍절함에 있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것이 근거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 랑하는 이유는 내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나의 부족함을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도에 있어서 서로 사랑해야 되는 이유 는 내가 이제 세상에 사는 자들 같이 약육강식, 적자생존 하듯이 남의 것을 빼앗고, 앞선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인생을 사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산다는 증명이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내가 섬기러 가는 것과 함께 갈 수 있는 이유는 저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든, 어떤 은혜를 베풀고 복을 주시든 그것이 나에게 이미 충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사랑에 증인으로 가는 가장 큰 이유는 그걸 내가 먼저 가졌고, 넉넉히 가졌기 때문입 니다. 내가 누구에게 사랑을 베푼다고 해서 내 것 중에 서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든지 주시는, 나 에게 이미 넉넉히 주셨고 또 누구에게든지 넉넉히 주시는 일에 수종들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사랑의 마음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가시면 이 문제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을 만납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 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 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2-15).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 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명예가 깎이든가, 주님이 가지신 어떤 소유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 리스도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 시고 모든 무릎을 그 아래 꿇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 광을 돌리게 하셨다는 빌립보서의 기록을 우리가 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굉장히 풍부 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사 그의 목숨을 버리셨다고해서 주님이 밑지신 것이 없는 것처럼, 그것이 고난의 길이고 억울한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손해보고, 희생하고, 섬기는 일로 부름받은 그 길은 그것이 더 멋있는 덕목이기 때문 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도 밑지는 것 이 아니요 오히려 많은 열매를 맺는 부유하고 영광된 길 이기 때문에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행위나 원리나 계명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냐를,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었느냐를 드러내 는 것이며, 하나의 제자상을 정립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된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 제자도라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 하는 것이요, 그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임을 증거하 는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나누어도 손해 보지 않는 일이 며, 부요한 결실을 맺는 길임을 그 수혜자에게와 그 은혜 를 베푸시는 일에 동참한 우리 모두가 확인하는 일로써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하나의 일거 리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된 본질과 격(格)에 관한 문제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란, 제자도란 결국 제자된 신자 개인 인격의 뿌 리요, 근거요, 핵심이요 또 흘러 넘쳐나는 모든 것으로 드러나는 영혼과 인격의 어떤 격이란 말입니다. 제자훈 련을 받음으로서 어떤 특수 요원이 되고, 특별한 기술을 배워 특별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자녀된 격이 이렇게 다른 것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 안에 부요해 지도록 노력하고 훈련하여 채우려는 데에 제 자훈련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우리가 섬김의 모양으로, 이웃에게 나아갈 수 있는 힘 은 어디에 있습니까?
2. 사랑은 행위나 원리와 계명이 아니라 무엇을 나타내는 원리가 됩니까?
3. 주님의 걸어가신 고난의 길 및 십자가 사역이 보여준 외형상의 모습은 무엇이며 실제 이루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내 사랑의 대상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주변에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지금 나의 가장 긴급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서로 이야기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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