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목사 제자 훈련-제 3 과 제자됨과 사랑(I)
본문
제자훈련은 내가 갖고 있는, 내가 먼저 획득한 것 을 나누어 주는 자가 아니고 내가 어떻게 변했고, 왜 변했고, 무엇으로 변했는지, 그 변한 것으로 상대방 을 항복 시켜야 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훈련은 전도적이지 않고 변화된 인격으로서의 싸움이 어야 맞습니다. 제자훈련은 전도의 기술(Skill)이나 기교(Technic)나 열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 으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새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이 '사랑하라'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복음의 습격'이란 용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이 주는 느낌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요.
<이해를 위한 설명>
지난 시간에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특수 요원을 만들라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류가 차별없이 동등한 신분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며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은 전도적 사명과 범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말 미암는 새 생명으로의 구원과 새 생명이 갖는 변화된 삶 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제자 삼음의 원리들에 대해 정리했 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어떤 행 동들을 해야 된다는 것인가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 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에 있어서 '제자를 삼는 다'는 것은 당시의 제도로는 '도제 제도(徒弟 制度)' 입 니다. 오늘날처럼 정보를 전달하는 교육 제도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함께 숙식을 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배워야 되는 것이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 격적 ,전인적인 변화와 전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갖고 있는 정보의 전수 정 도가 아니며 더욱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 쳐 지키게 하라'는 말은 의외로 십자가 사건, 구속 사건 의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연결되기 보다 는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케리그마(kerygma)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거듭난 다른 인간상에 초점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 어졌다는 것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인간을 어떻 게 변화시키는가, 그 구원이 인간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 시켰는가에 초점이 가야 맞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는 일에서는 그 가르치는 제자들이 예수를 믿고 변 화된 모습이 전수되고 증거되는 것이 첫번째 초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제자 삼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갖는 케리그마를 땅 끝까지, 아직 이 케리그마를 모르는 자들에게 전달해서 저들로 하 나님의 백성을 삼는 전도에 그 모든 초점이 모여있는 것 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끝까지, 모든 족속으로 이렇게 뛰어 나가는 일에 그 동안 너무 초 점을 맞추다가 '주님이 분부한 것'과 '무엇을 해야 되는 가'를 조금 놓친 감이 있습니다.
그 분부한 모든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요한복음 13장 34절 말씀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4:34-35).
굉장히 의미심장한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의미에서 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 우리가 주를 따르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된 그 표를 나타내는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구절을 말할때 주님이 가지셨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이 일과 여 기 요한복음 13장 34절 이하에 있는 '서로 사랑하라'가 사실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연결된다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이제껏 대부분의 제자훈련은 복음 전도 일변도였습 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읍시다'하는 것이 제자훈련 의 초점이었는데 그것 자체로는 잘못도 아니고 분명히 제 자훈련과 제자된 자로서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되는 일차 적인 책임인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 점이 되었을 때 '서로 사랑하라'는 이 주님의 새 계명으 로 주신 말씀과의 연결의 부족으로 인해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났느냐면 제자훈련이 복음전도 일변도로 행해졌을 때 는 대부분 그 전도가 '복음의 습격'을 나가는 양상을 띄 었습니다.
'복음의 습격'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습격을 나간다는 것은 어떤 탈취할 목적을 위하여 나머지를 무참 하게 파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속에 있는 뉘앙스는 "너희는 죽어 마땅하고 너희는 벌받아 마땅한데 하나님께 서 나에게 이 명령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어서 나간다. 따라오면 너희 복이고 안 오면 죽어도 싸다" 입니다. 이런 식의 복음의 습격, 복음 전도가 제자훈련 의 초점이 되면 그 일을 행하는 자의 기고만장함이라는 것이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크게 오해됐고 실제 로 제자훈련과 복음 전도라는 이름 속에서 성도들에게 매 우 많이 해롭게 작용했던 부분들입니다.
전도라는 행위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이 대위임령을 근거로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과의 연계성을 놓치고 복음 전도가 제자된 첫번째 사명으로 이해되었을 때는 언제나 파괴적인 습격의 형태 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있어야 하는 가 장 큰 이유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 람을 귀의시키는 문제가 파괴적이거나 심판적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옳다는 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고, 거룩 한 자라는 것 때문에 용서와 긍휼이 없고 훨씬 그 명분과 옳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잔혹하게 군 것이 십자군 원정 을 비롯한 기독교 선교 역사가 증언하는 기독교인들의 부작용이었습니다. 그것이 옛날에는 정치적인 힘을 가지 고 군사력으로 크게 자행되었고 이제는 그 나쁜 유산들이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인간이 같기 쉬운 것이 우월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전도를 하거나 기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자기도 모르게 교만과 정 죄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가시면 4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 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 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 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 이 온전하라"(5:43-48).
하나님께서 왜 악인과 선인에게 그 해를 주고 의로 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주시겠습니까? 사람 중에 우리가 볼 때 선인과 악인이 있고, 의로운 자가 있고 불 의한 자가 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는 성경이 기록한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아닙니까? 그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베푸신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러 갈 때 마치 나는 선인이고 저들은 악인이며, 나는 의로운 자 고 저들은 불의한 자인 것처럼 그들 앞에 서기 위하여 나 간다면 그것은 제자도도 아니고 제자로서 훈련을 잘못 받 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자행되어 왔습니다.
제자훈련은 내가 갖고 있는, 내가 먼저 획득한 것을 나누어 주는 자가 아니고 내가 어떻게 변했고, 왜 변했 고, 무엇으로 변했는지, 그 변한 것으로 상대방을 항복을 시켜야 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은 전도 적이지 않고 변화된 인격으로서의 싸움이어야 맞습니다.
제자훈련은 전도의 기술(skill)이나 기교(Technic)나 열 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가야만 하는 것입 니다. 그 새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이 '사랑하라'입 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가봅시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 랑장인데 사랑에 관한 여러가지 개념 속에 이런 음미할만 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봅 시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 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 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 라"(고전13:4-8)
지금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상대방 편이 되는 것입 니다. 제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까지 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투기 하지 않습니다' 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조 금 전에 전도라는 하나의 명분만 갖고 있을 때 우리가 어 디에 빠지기 쉽습니까? "나는 주를 믿고 주를 위해 사는 데 너는 너만을 위해서 네 배를 불릴려고 사니까 사실 구원시켜 줄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이 시켜주라고 해서 내 가 딱 한번만 기회를 준다. 믿을래, 안 믿을래? 넌 이제 죽었다."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처럼 사는 것은 지옥가는 것이고 나같이 살아야만 된다'를 상대방을 변화 시키고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것과 '난 잘났고 넌 못났 다'를 얘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 습니다. 그리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 니다. "하나님 쟤는 회개하게 하지 마세요" 이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미우면 그 사람이 회개 할까봐 제일 겁나죠? '저 사람하고는 천국도 난 같이 갈 수 없다!' 얼마나 근본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 리 마음 속에 나쁘게 작용하는가를 보십시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 합니다. '너는 죽어가고 나는 구원얻고' 이런 차별로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구원을 얻어 함께 생명과 진리로 오는 것을 기뻐하며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을 믿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 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모두가 구원 얻는 일이 일어 나기를 바라며 일어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구원이 나에게 일어났으니 누구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사랑이요, 그 사랑이 모든 족속에게 갈 수 있 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 편에 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 수님이 우리 편을 들러 오신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베푸 는 자의 자랑이 아니며, 베푸는 자의 고결함의 증명이 아 니며, 그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 혜택을 받아야 사랑인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행위가 그것을 하는 자의 증명이 되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제자훈련도 남 다르다는 것으로 빠지지 않도 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땅 끝까지 가는 우리의 자 세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족속 앞에 서는 우리의 태도여야 되며, 제자의 가장 굵은 심정이요, 근거요, 원 리여야 되는 것입니다.
<도움말>
kerygma는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 내 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 다'입니다.
<이해를 위한 질문>
1. 사랑이 외면된 채 복음 전도만이 제자 훈련의 초첨이 되면 어떤 부작용들이 발생한다고 본문은 말합니까?
2. 제자를 삼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첫 번째 초점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제자삼는 일에 있어서 사랑이 전제되어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의를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데 있어서 사랑을 갖고 이 일 을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에 변화가 있을까요? 말씀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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