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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니스 서판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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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니두스(Nabonidus) 연대기' 를 통해 '신 바빌로니아'가 기원전 539년에 멸망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다니엘 5장 30절은 갈대아왕 벨사쟈르가 살해되었다는 내용을 볼수있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미 예언한대로 539BC에 메디아(Medes), 페르시아 연합군이 바벨론성을 점령하면서 신 바빌로니아의 대제국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벨사쟈르(성경에서는 벨사살)이 죽기 전에 그는 술을 마시다가 맞은 편 벽에 손가락이 나와서 글을 쓰는 것을 보고 그 뜻을 푸는 자에게 바벨론의 셋째 치리자 즉 통치자가 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따라서 다니엘이 그것을 해석해 주자 다니엘을 그 자리로 세웠다. (참고 단 5:7,29) 그런데 역사가들은 성경이 말하는 '벨사쟈르'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신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Nabonidus)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는데, 성경 다니엘서를 입증할수있는 어느 고고학적 유물도 그리고 후기 역사가들의 자료에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점을 입증하였던 사람은 기원 70년 '유대고대사'를 저술한 '요세푸스'이외에는 찾아볼수가 없어서 였을것이다.


 뿐만 아니라 450BC에 바벨론의 역사를 기록한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us) 조차도 신 바빌로니아의 왕은 나보니두스라고 강하게 말하였기때문에 역사가들은 다니엘서는 단지 설화나 기록물의 가치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취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문들은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20세기초에 시작된 성경 발굴단(영국과 유럽의 고고학 박사들이 지원하여 고대 근동의 되는 곳을 발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이 하나하나의 중요자료를 발굴함에 따라 그 증거자료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나보니두스 연대기로 이 서판은, 나보니두스(Nabonidus)의 통치기간을 보여주고있다. (기원전557년 부터 기원전 539년까지), 서판 연대기의 한 부분을 보면 그의 통치말엽 10년간은 테마(Tema)에서 지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기간 동안에 태자 '벨사우스르(Belshar-usur)'가 바벨론 궁을 지키며 신 바빌로니아를 통치하였다는 내용을 볼수있다.


 일부를 소개하면 "그는 ‘진영’을 가장 나이 많은 아들, 맏아들[벨사쟈르]에게 맡겼으며, 전국 각지에 있는 군대에게 그의 명령을 따르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맡기고 왕권을 그에게 위탁한 다음 그 자신은 긴 원정 길에 올랐으며 아카드의 군대는 그와 함께 진군하였다. 그는 서쪽에 있는 데마로 향하였다. "고 한다. 그 말은 바벨론의 실제 통치는 벨사쟈르가 계승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다 다니엘 5:20절의 "세 번째 치리자(통치자)로 세워 주겠다"는 약속을 연결시켜 볼 때, 왜 다니엘이 그 왕국에서 셋째 서열이어야 하는 가를 이해하게 된다. 즉 부왕 나보니두스가 첫째요, 실권을 행하는 벨사살이 둘째요, 다니엘이 그 다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니엘이 말하는 벨사살에 대한 기록은 사실임이 입증됐다.


 이 연대기의 내용을 좀 더 본다면 "...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들여왔다.... 키루스(Cyrus)가 오피스(Opis)에서 바빌로니아 군대(나보니두스 왕이 진두지휘하는 군대)를 공격했을 때 ... 바벨론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켰다..."기록되어 있다.


 나보니두스는 패배하여 인근 성 '보르시파'로 도망하였다.


키루스는 자기를 일컬어 "마르두크(Marduk)의 사자"라고 하면서 마르두크 신에게 경배를 무시하는 바벨론 왕을 멸하려 왔다고 했던 것이다. 벨사살은 통치권은 소유했으나 '제사장'을 대행할 위치는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의식을 이행하지 못했었다.)


 최후의 보루 바벨론성 공략전


 오피스에서 나보니두스의 군대와 마주친 키루스의 연합군대와의 접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타슈리투월(月)에 키루스가 티그리스 강가의 오피스에서 아카드 군대를 공격하자 아카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나보니두스는 혼란에 빠진 그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14일에 시파르는 전투도 없이 함락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도망하였다.


 키루스는 이렇게 나보니두스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는 바로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벨론성으로 다가갔다.


 "이 성을 이겨내려면 20년은 걸리겠군~"


 한숨을 쉬며 이야기하는 키루스 그럴만한것이 바벨론성은 공략하기 힘든 성에 속해있었다. 말하자면 높이가 이백큐빗 지금 말하면 100미터 높이를 가진 성에 마차 두대가 나란히 갈정도의 넓이(15~ 20미터), 그것도 이중으로 된 성벽에 해자(성벽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든 물도랑)는 유프라테스 강물로 되어있었다.


 게다가 수성시 필요한 물자들이 20년간 수성할 수 있을정도의 식량과 무기들, 그것이 키루스가 공략하고자 하는 성이었다.


 당시의 역사학자의 기록을 자세하게 보자면, 헤로도토스는 기술하기를, “꼭대기에는 성벽 가장자리에 서로 마주 보는 방을 건축하였는데, 그 사이에는 네필의 말이 끄는 병거가 회전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라고 하였으며, "예레미야"에서도 그 높이가 실로 커서 100여미터 정도했을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의 역사가 ‘체시아스’에 의하면, 그 성벽들의 높이가 90‘미터’ 가량 되었다고 하는것으로 보아 공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리한 입장이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고대의 학자들을 통해 구분할수있는 성의 구조는, 성 둘레는 96Km이고, 성벽 높이는 50m이며, 두께는 25m이다. 성벽사이에 400m의 수로가 있고, 250개의 초소와 100개의 놋쇠 문이 있다.유프라테스강과 연결된 문이 25개이고, 강 밑으로 높이 4m, 폭이 5m, 지하 터널이 있다. 폭이 10m, 길이가 800m의 다리가 있다고 한다.


 키루스는 일단의 척후병을 통해 바벨론성의 약점과 주변여건등을 살폈다. 공략법을 알아내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바벨론성인근에 있던 인공호수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까지 늪이었던 호수로 니토크리스 왕비가 이전에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539년 메디아, 페르시아 연합군은 바벨론성에 흐르는 유브라테스강 줄기를 돌리려고 운하를 파고 있었다. 고레스 왕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이날 저녁을 기다렸는데, 그는 바벨론인들이 땅거미가 지는 일로 인해 경계를 소홀히 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자정무렵 그 운하를 터 놓는데 성공하였다. 강줄기가 돌려져 물이 충분히 얕아지자, 군인들은 강둑을 강바닥 안으로 밀어 넣어 평평하게 만들었다. 이날밤 강 위에서 들어가는 성문이, 아마도 과신 탓에, 열려진 채로 있었다. 메디아 페르시아 연합군은 불시에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고브리아스와 가다타스 휘하의 군대는 불시에 호위병들을 공격하여 바로 궁전 문을 통해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룻밤에 "그 도시를 함락시켰고 왕을 죽였다." 여러 방어 요새들을 지키고 있던 바빌로니아 군은 이튿날 아침에 항복하였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서는 알려주기를


 "타슈리트월 16일(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 구티움의 총독 고브리아스(우그바루)와 키루스의 군대는 전투도 없이 바빌론으로 입성하였다. 나중에 나보니두스는 바빌론에 돌아왔다가 붙잡혔다.  아라샴누월 3일에 키루스는 바빌론으로 입성하였고 푸른 나뭇가지들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평화’(술무)의 상태가 도시에 포고하였다."


 참고자료: 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Grand Rapids, Mich., Zondervan Publ. Co., 1970, P.424;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출판부, 1985,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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