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레나룻 서양인, 70여만명에게 쪽복음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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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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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만명에게 쪽복음 전하다
아서 웰번 선교사는 1909∼1928년 경북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 순회 목회를 했다. 안동교회 구 예배당 사진으로 지금은 역사관 등으로 쓰인다. 구 예배당 오른쪽으로 100주년기념예배당이 들어섰다. 아래 흑백 사진은 구 예배당 앞에서 찍은 1951년 7월 안동중학교 졸업기념 사진이다. 6·25전쟁으로 교사(校舍)가 파괴돼 예배당에서 공부했다.
‘모든 현감에게 보낸 비밀 지령, 10월 15일 모든 기독교도 살해.’
1900년 11월 19일 황해도 지역 사경회를 위해 해주에 도착한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는 충격적인 전갈을 듣는다. 은율읍교회 영수 홍성서가 보낸 전갈로 ‘고종 황제의 칙령’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 한양의 친러 보수파 정권이 친미 개화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데 고종의 윤허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공사 알렌 등의 저항으로 윤허가 쉽지 않자 급기야 칙령을 날조해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을 음력 10월 15일(양력 12월 6일) 살육하라는 통지문을 지방관청에 보낸 것이다.
전모를 파악한 언더우드는 한양의 에비슨 선교사에게 라틴어로 적은 밀서를 보냈다. 영문이나 한글·한자일 경우 발각될 우려 때문에 라틴어로 작성해 보낸 것이다. 밀서를 받은 에비슨은 이를 영문으로 번역, 알렌에게 알렸고 알렌은 고종을 알현하고 음모 사실을 보고했다. 이 일의 주모자 김영준은 다른 부정사건 등과도 연루돼 처형됐고 친러파 세력은 제거됐다.
기독교역사학자 옥성득 미국 UCLA대학 교수는 2015년 그 라틴어 밀서를 발굴해 공개했다. 이 밀서는 선교사 아서 웰번(한국명 오월번), 새디 웰번 부부의 손녀인 프리실라 웰번이 저술한 책 ‘아서 고스 투 코리아’(2008년)에 게재됐던 것이다.
옥 교수에 따르면 당시 언더우드는 그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미국 북장로회 연례회를 마치고 세 명의 독신여성 선교사와 함께 황해도 지역 순회 전도에 나서던 길이었다. 그 세 여성은 의료선교사 새디, 화이팅, 체이스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그 역사 현장을 겪었던 새디 눌스는 이듬해 9월 아서 웰번과 결혼하게 된다. 옥 교수는 페르시아 제국 세력가인 하만이 여호와만 경배하는 배타적 유대인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 음모가 에스더의 기지로 발각되는 사건과 비슷하다고 했다. 한국판 부림절 사건으로 불릴 만하다.
‘기독교인 학살’ 음모 적발한 언더우드·새드 일행
사실 아서와 새디 선교사 부부의 삶은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서와 큰아들 하비(1903년 사망), 막내딸 앨리스(1914년 사망)의 묘소가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어 간간이 거론됐을 뿐이다.
하지만 웰번 부부는 1910∼1920년대 북장로회 안동선교부를 이끈 경북 북부 선교의 개척자다. 앞서 아서는 강원도 철원과 원주를 중심으로 사역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순례자들의 발길이 잇는 철원읍교회(철원제일교회) 설립자이기도 하다.
지난 주말 경북 안동시 안동교회 석조예배당. 많은 청소년과 장년 교인들이 석조예배당 안 역사관을 둘러본 후 계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654호) ‘한국기독교사적 32호’(예장 총회) 동판이 새겨진 석조예배당은 웰번 부부를 비롯한 대구·안동선교부 소속 선교사의 열정과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이 담긴 건축물이다. 역사관 안에는 웰번 부부의 선교 사역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1909년 설립된 안동교회는 석조예배당 옆에 ‘100주년기념관’을 헌당했다. 신구 예배당을 중심으로 유치원과 부속건물, 너른 주차장 등이 집중돼 있어 교회 자체가 ‘선교타운’이라고 할 만큼 규모가 있다. 또 교회 옆에 천주교회당과 유교문화회관, 사찰 등이 줄지어 있어 ‘종교타운’으로도 불린다.
2013년 9월 웰번 부부의 손녀 프리실라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프리실라는 할아버지의 달력, 나막신, 전도수첩, 대한제국 여권(호조)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중 1911년 발행된 달력에는 웰번 사택 사진이 담겼다. 지금의 안동교회 주차장 자리로 추정된다. 본국의 후원자 개발을 위해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새디는 1899년 내한해 대구선교부에서 간호 선교사로 활동하며 의료 선교사를 도왔다. 당시 대구선교부는 안동선교부가 생기기 전이라 경북 북부도 사역지로 삼고 있었다. 아서는 미시간 출신이다.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1900년 샌 안젤모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0월 내한했다.
웰번 부부는 누구의 소개로 결혼에 이르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서울에서 결혼식을 거행하는데 대구에 있던 새디가 ‘대장정’ 끝에 결혼식을 치렀다는 얘기가 화제가 됐다. 새디는 여성이 대구-서울을 조랑말에 의지해 오기가 쉽지 않아 낙동강 뱃길 등을 이용해 부산까지 내려간 후 인천 제물포행 배를 타고 이동했다. 제물포에 내린 뒤에는 경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갈 수 있었는데 도착 시간이 밤 9시 무렵이었다. 예식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신부는 신랑이 양파를 선물로 받았으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양파를 구해갔다고 한다. 그 시절 양파는 귀한 서양 작물이었다. 신랑은 이런 신부에게 쿠션 하나를 선물로 줬다.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이름 없이 이어지는 한국 사랑
부부는 1909년 이전까지 북장로회 서울선교부에 소속돼 강원 지역을 맡아 선교에 진력했다. 새디가 간호 선교사라 자주 떨어져 지내야 했다. 1909년 장로회와 감리회가 선교지 중복의 혼선을 막고자 선교구역 분할을 확정함에 따라 강원도가 감리회 선교 구역이 됐다. 아서는 이때 플래처(안동 성소병원 설립자) 선교사와 신설 안동선교부 책임자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그 첫 열매가 안동교회였다. 아서는 건축 일에 능했고 운동을 잘했다. 구레나룻이 유난히 짙어 어디가나 눈에 띄었다. ‘70여만명에게 쪽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구레나룻을 한 서양인이 장터에 서면 너나없이 몰려들었기 때문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실라는 그 무렵 아서가 경북 서북부 지역을 순회하며 적었던 수첩을 한국에 기증했다.
아서는 조용한 성격으로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동사목사, 교회 관리, 한국어 연구, 성서판매 감독 등을 주로 했다. 경북 영주시 영주제일교회와 풍기읍 성내교회 등 서북부 순회 목사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가 사과 재배 방법을 농사꾼들에게 가르쳐 줬다는 영주시 기록물도 있는 것으로 보아 다방면에 유능한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웰번 부부는 1909∼1917년 안동선교부에서 같이 헌신했다. 아서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백 자락 구석구석을 돌며 쪽복음을 전했고 새디는 안동 읍내를 중심으로 여성과 노년 성경공부반을 운영했다. 그러면서도 보름간 하루 40㎞씩을 이동하며 400여명을 전도했다고 선교 보고에 남겼다. 부부에 의해 내매교회, 풍기교회 등도 뿌리내릴 수 있었다.
새디는 출산과 과로로 몸이 허약해졌다. 결국 1919년 귀국했고 아서도 일시 귀국해 아내를 돌봤다. 아서는 새디가 회복 기미를 보이자 2년 만에 다시 선교지로 돌아와 헌신하다 1928년 과로로 사망했다. 앞서 새디는 남편을 다시 선교지로 보내고 홀로 투병하다 1925년 숨졌다.
그들의 뜻을 이은 차남 헨리(프리실라 아버지)는 목사가 되어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봉직했고, 셋째 바바라는 한국에서 미션스쿨 영어교사로 활동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어지는 한국 사랑이 3대째다.

새디 웰번 선교사가 촬영했다고 알져진 고종 황제 어가행렬 사진이다. 새디는 남편 아서 웰번에게 1904년 이 사진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손녀 프리실라는 2016년 이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가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사진의 정확한 촬영 날짜는 알 수 없다. 다만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후 대안문(대한문)을 나서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이 어가행렬은 대안문 맞은편 환구단(현 서울시청 앞)으로 제를 지내기 위해 나서는 장면으로 보인다.
프리실라는 이 사진 외에도 해방 후 미군정청 통역관을 지낸 아버지 헨리(1904∼1999·목사)의 뜻에 따라 한국 관련 희귀 사진 650여점을 기증했다.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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