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예수 믿으소서”… 마부, 왕손 전도하다
최고관리자
2020.05.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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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쪽 봉화산(159.8m) 정상에 오르면 서울 동남쪽 일대가 시원하게 보인다. 왼쪽 아차산과 오른쪽 남산의 숲이 시야에 들어온다. 남산의 N서울타워(남산타워)와 아차산 뒤쪽으로 뾰족 튀어나온 롯데월드타워가 ‘번영의 대한민국’을 웅변한다. 봉화산은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서울시 사적 15호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주능선을 아차산으로 봤기 때문에 ‘아차산봉수대지’로 표시했다. 봉화산은 현재 서울 중랑구에 속하는 야트막한 산이다.
오늘날 서울 동부지역의 복음은 바로 이 봉화산 산자락에서 퍼져나갔다. 1904년 미국 감리회 하운셀(한국명 하운설)과 미국 북장로회 클라크(곽안련) 목사에 의해 초석이 다져진 봉화현교회(현 서울 중화1동 경동제일교회)는 중랑·동대문구, 구리·남양주·양평 지역 교회의 모교회다.
교회 설립 당시 이 일대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이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양주군 구리면이었다. 1963년 서울 동대문구 중화동이 됐고 1988년 중랑구에 속하게 됐다. 조선시대 서울 동부지역은 도성에 채소와 육류, 과일 등을 대는 농지였다. 그중 봉화산 자락은 과수와 배추, 미나리 농사가 잘됐다. 1970년대까지 봉화산 일대는 배밭으로 유명했다.
마부 엄귀현, 왕손 이재형에게 “예수 믿으시오”
엄귀현이라는 우직한 마부가 이 산자락에서 태어났다. 봉수대가 있던 마을이라 봉수군 후손이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마부 엄귀현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경기도 안양 즈음에서 미군 전투기 폭격에 의해 죽었다. 피난 도중 동생, 부인 그리고 말과 함께 폭사했다. 그는 전쟁 발발 직후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았다가 1·4후퇴 때 교인 등의 권유로 마지못해 피난을 가다 변을 당했다.
한평생을 마부로 살았던 그를 한 줄로 기록하라면 ‘경동제일교회 영수(領袖) 엄귀현’이다. 영수는 한국 초대교회 직분으로 그 직책은 교회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봉사직이다. 영수는 교회 종치기, 청소, 행정은 물론 설교자가 없을 때 설교도 했다. YMCA운동가 전택부(1915∼2008) 선생은 엄귀현을 두고 “봉화현교회(1942년 경동제일교회로 개명)는 엄 영수의 기도와 피땀이 어린 곳”이라고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한국 초대교회사를 여러 형태로 정리하면서 필부 신앙인 엄귀현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꼼꼼히 기록했다. 한국교회가 영향력 있는 목회자나 장로 중심의 서술이었던 점에 미루어 전택부 선생의 엄귀현에 대한 접근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경동제일교회 95년사’는 그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신앙을 잘 지키다 간 사람”이라고 적었다. “주일과 수요일 밤이면 남폿불을 켜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했고 새벽종을 치고 청소를 빼놓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난롯불을 꺼뜨리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말고삐를 잡고 “이놈아 오늘 삼일 밤 예배 있는 날이다. 어서 가자” 하며 말을 사람 대하듯 했다.
이런 성실함을 눈여겨본 이 교회 용희창 목사는 1940년 그를 서리집사에서 영수로 임명한다. 마부라는 비천한 신분이 교회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는 황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리고 하나님께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이 필부의 이야기는 언제부턴가 한국교회 설교 예화에 등장했다. 왕가 출신 이재형 목사(1871∼1947)를 전도한 이가 엄귀현이기 때문이다. 설교 예화는 엄귀현의 사진 한 장이 없었던 탓에 부풀려진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다. 엄귀현 사진은 국민일보가 이번 지면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지난 11일 경동제일교회 예배당 1층 복도. 선대 목사와 장로 얼굴 사진이 횡으로 이어졌다. 거기에 ‘3대 영수 엄귀현’이라는 사진이 눈에 띈다. 깐깐한 시골교회 장로 같다는 느낌이다.
경동제일교회 고 강광섭 장로의 회고.
“엄 영수님은 나보다 훨씬 웃어른인데 그 신앙은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어요. 본래 기운이 장사이고 예수 믿기 전 아주 사나우셨으나 예수 믿고 양순해지셨던 분이죠. 엄 영수님은 자나 깨나 기도하셨어요. 예배당 바닥에 이마를 대고 기도했거든요. 어찌나 그랬던지 이마에 달걀만 한 못이 박혔어요.”
이렇게 신앙이 뼛속까지 박힌 엄귀현이 어느 날 이재형 나리 견마잡이로 나섰을 때 얘기다. 이재형은 왕손 이재황(고종 임금)보다 이르게만 태어났더라면 왕이 될 수 있던 서열로 통상 승동대감으로 불렸다. 과거 급제 후 풍기군수를 거쳤으나 세상이 어수선해서 되는대로 사는 왕손이었다. 그가 충주 선산에 갈 때 엄귀현이 마부로 따라나섰다. 이때 엄귀현은 극진히 이재형을 모셨다. 주막에서 잠잘 때 불침번을 설 정도로 자기 일에 정성이었다. 이런 그가 하도 대견해 이재형이 이것저것 묻게 됐다. 한데 당혹스러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리, 황송하오나 오늘부터 예수를 믿으소서. 그래야 나리도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사옵니다.”
이재형은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내심 마부꾼이 양반더러 예수 믿으라 하는 세태에 놀랐다. 병원과 학교 짓는 예수꾼들이 마부 같은 천한 백성의 마음을 움직였단 말인가.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이재형의 아내 정씨부인이 먼저 예수를 믿게 됐다. 이재형은 주유천하하고 있었다. 결국 이재형이 재산을 탕진하고 갈 곳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와 승동교회 교인들이 너나없이 그를 예배당으로 등 떠밀었다. 이재형은 호통 치며 나무랐다. 하지만 순종이 즉위하자 울적한 마음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1910년 국권 피탈된 후 나라가 울분에 휩싸였다. 교회는 백만구령운동으로 매달렸다. 이 무렵 경기도 사경회가 승동교회에서 열렸다. 초신자 이재형은 사경회에서 ‘마부 엄가’를 보게 됐다. ‘엄가’가 근엄하게 꿇어앉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형님, 이렇게 만나니 반갑구려. 내게 전도하던 엄가 아니시오” 하고 그를 반겼다.
이에 당황한 엄귀현은 “나리, 저를 형님이라 부르다니요. 황송하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도 예수를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마부 신세 면하려고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승동교회 교인들 앞에서 벌어진 이 일은 금세 퍼졌다. 이 교회 양반 출신 박승봉 장로와 교회 천민들은 이 기적 같은 일에 형제자매가 되어 춤을 추었다.
1943년 12월 19일 주일 주보. ‘경동제일교회 장로 취임식과 안수식’ 순서지가 경동제일교회 사료로 남아 있다. 이 순서지에는 이재형 목사가 교인들에게 주는 ‘교회에게’라는 제목의 권면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이날 예배는 그가 축도를 함으로써 마친다. 이 예배를 준비한 이는 엄귀현 영수이다. 마부와 왕손으로 만났던 두 사람이 영수와 초청 목사로 예배를 함께 드린 것이다. 이재형은 회심 후 신학공부를 마치고 남대문교회 초대목사와 승동교회 목사를 지냈다.
한데 이 순서지는 일제가 강제하는 ‘국민의례’를 예배 머리에 담고 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교회에 가해지는 황국신민화 모습이다. 왕족이 됐든 마부가 됐든 나라 잃은 백성은 이렇게 역사의 질곡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되고도 엄귀현은 마부 일을 계속했다. 충주 가던 길에 이재형에게 “저는 마부꾼 신세 면하려고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이제부터 마부꾼 노릇 더 잘해얍지요. 나리께서 예수 믿으시면 일평생 마부꾼으로 나리를 모시겠습니다” 하던 그였다.
엄귀현은 일감을 가지고 말을 몰고 도성을 향할 때면 세 차례 멈춰 기도를 올렸다. ‘봉우재 한길가’ ‘중랑천 다리목’ ‘안감내 다리목’ 지점에서였다. 봉화산 정상에서 그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중랑천만은 분명히 드러나 가늠이 가능했다.
엄 영수는 1·4후퇴 당시 평택까지 내려갔다가 “교회를 지켜야 한다”며 되돌아오다 숨졌다. 오르내리던 길에 시체가 보이면 국군이건 인민군이건 보이는 대로 묻어주고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리고 동행하던 동생마저 폭격으로 죽자 아내와 함께 달려들어 기도드리다 이어진 폭격에 그 자세로 죽었다. 전택부 선생은 생전 그의 참된 신앙을 발굴해 세상에 드러냈다.
▒ “영수님께 어떤 품위를 드려야할지”
YMCA 운동가 전택부 선생의 탄식
“아 애석하고 가엾다. …한국교회는 엄 영수와 같은 성스러운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일평생 말과 함께 남을 섬기다 죽은 님, 일평생 남을 위해 기도만 하다 죽으신 님, 일평생 궂은일만 도맡아 하시다 죽으신 님, 이런 엄 영수님에게 어떤 품위를 드려야 죄스럽지 않을까. 이에 대해 한국 개신교회는 너무도 무심하다. 크게 반성해야 할 일이다.”
YMCA 운동가 전택부(사진) 선생이 ‘토박이 신앙 산맥’이란 저술에서 밝힌 내용이다. 엄귀현은 남들이 ‘장로’가 될 때 그 아래로 취급받는 ‘영수’에 머물렀다. 결코 그가 장로가 되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엄 영수의 성스러운 이야기가 받들어지지 않고 발굴되지 않은 데 대한 전택부 선생의 탄식이 깔려 있다. 전택부 선생은 경건한 삶을 살았던 천주교 수도원 문지기 꼰라도와 알퐁소, 부엌데기 필라델포 등이 성자 반열이라며 애석해했다.
한국인 첫 여의사 박에스더의 남편 박유산도 마부였다. 그는 가난한 이에게 헌신하는 의사 아내를 돕다 미국 땅에서 숨졌다. 폐병쟁이로 교회 종지기를 하며 작가가 됐던 권정생도 비천했다. 이런 경건한 이들이 숱하다. 한국교회가 목사 등 교역자 중심의 신앙 인물 발굴에서 그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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