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청년
본문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
이번 청년주일에 부족한 저에게 함께 하늘뜻을 나눌 기회를 주신 천안살림 식구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듣기로는, 청년주일이니까 '청년 목사'와 함께 하늘뜻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나이 서른이 조금 넘었으니까 사실 제가 '청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청년 목사'와 함께 하늘뜻을 나누면서 '청년주일'을 지키려고 하는 분들이 대강 저의 나이 위아래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설교를 듣는 사람'과 '설교를 하는 사람'이란 구분을 떠나서, 같은 길이의 세월을 살아 온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데에 끼어들어 같이 고민한다는 심정으로 오늘 함께 하늘뜻을 나눌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의 공생애가 흔히 몇 년 간이었다고 알고 계시나요?
또, 예수가 몇 살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알고 계시나요?
오늘의 본문은 잘 아시다시피,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내용입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예수의 나이와 공생애 기간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의 나이는 정확히 서른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이 속해 있는 누가복음서에 따른다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보다 여섯 달이 빠르게 태어났으니까, 예수와 거의 동갑내기라고 해도 될 겁니다. 즉, 이 이야기 속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오늘 '청년주일'을 같이 지키는 사람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는 겁니다.
크게 보면 로마의 패권에 지배당하고 있던 1세기 팔레스틴, 그리고 세부적으로 보면 사제 귀족과 지식인들의 권력에 지배당하던 1세기 팔레스틴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혁에 대한 꿈이 존재하게 마련이었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백성들이 '그리스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오직 물로 세례를 주는 자일 뿐이며, 더 능력있는 사람이 와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임을 미리 알리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변혁의 주역인 '그리스도'를 바라는 세상에서, 자신은 주역이 아닌 조역일 뿐임을 자처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진정한 주역인 예수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조역임을 자처했다고.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세례자 요한이 처음에는 자기가 세례를 받았으면 받았지 어떻게 세례를 주느냐고 황송해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의 본문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도 다른 이와 똑같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한 사람'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쯤 되면, 조역도 아니라 '엑스트라'라고 할 법도 합니다.
'청년'이 주제가 될 때 가장 많이 불려지는 찬송가가 있지요.
그 찬송가에 따르면, 청년이란 하늘같이 높푸르고, 바다같이 넓고 깊고, 화산같이 타오르고, 대지같이 광활하고 등등, 하여튼 넘칠 듯이 풍부하고 힘이 가득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복음들고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해야 할 존재입니다.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미래의 주역이라고 지칭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요. 실제로 '청년'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 정말 그렇습니까?
하늘같이 높푸르고 대지같이 광활하기는커녕,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복음들고 앞장서서 일하기는커녕, 자기 앞가림 어떻게 해야 하고 자기가 어떻게 먹고 사는가 외에 다른 일들에 신경쓰기 힘든 것이 어쩌면 더 현실에 가깝지 않나요? 그렇게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자기 먹고 살 것을 구할 수 있는 '자기 자리'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것이 현실적인 '청년'의 고민이고, 그 '자기 자리'를 잡아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가 그 다음 단계의 고민이 되는 것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특히나 저와 비슷한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이나요.
그것이 현실이라면, '미래의 주역'을 자처하기보다, 오히려 '조역'이나 '엑스트라'의 모습이 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방금 우리가 본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조역'과 '엑스트라'의 뒷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끝끝내 조역 노릇을 계속하다가, 통치자와 정면으로 충돌해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던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통치자의 또다른 소유지인 갈릴리에서,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 이제는 자신이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외칩니다. 그 때 그는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니라, 조역도 아니라, 이제는 자신이 당당한 주역을 자처합니다. 그래서 선배인 세례자 요한처럼, 그도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이렇게 끝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이유를, 오히려 저는 또다시 '조역'과 '엑스트라'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나 세례를 받으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데도, 끝내 '조역'의 자리를 자처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말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른이 되기까지 쌓아 온 자신의 삶의 결과로 만들어진 자신의 삶의 자리. 그 자리가 '조역의 자리'임을 세례자 요한은 자각하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추종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주는 세례는, 예수에게는 또다른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는 계기가 아니었을까요? 성서에서는 '광야에서의 유혹'이라고 되어 있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당한 후의 예수의 행보는, 그 '자신의 자리'에서 이제 아무도 의지할 이 없이 오직 자신만을 믿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래서 어떤 길을 갈 지를 새로이 결정해야 할, 예수의 고뇌의 시공간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 고뇌를 통과했기에, 예수는 이제 체포당해 죽은 자인 세례자 요한과 똑같은 메시지를 스스로 외치면서, 이제는 '주역'을 자처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의 길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길과 예수의 길은 둘 다 죽음으로 끝맺는 길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지더라도 개기는' 길이었습니다. 그 둘 모두, '자신의 자리'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길이었습니다.
언젠가 천안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천안(天安)이라는 이름을 이렇게 풀이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도저히 평안하게 다스릴 수가 없어서, 하늘의 힘으로나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하늘의 힘으로나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생길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자신의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가진, 그래서 그것 자체가 삶인 사람들. 그것 자체가 삶이므로, '지더라도 개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렇게 '지더라도 개기니까', '하늘의 힘으로나'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
'청년'이라고 한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제 막 '자신의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 자체가 삶이 되어, '지더라도 개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하늘의 힘으로나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 말 그대로 '天安' 사람이 되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이런생각을 합니다.
조금 더 나가본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天安'을 요구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변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다른 의미에서 '天安'을 요구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지더라도 개기는' 모습은, 어쩌면 '天安'조차도 넘어서는 모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굳이 '天安'을 요구해서 뭔가 다른 데 기댈 일이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지더라도 개기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삶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청년'이란, 바로 그렇게 '天安'을 넘어서기 시작하는 시간을 일컫는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청년' 중의 한 사람이었던 예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
이번 청년주일에 부족한 저에게 함께 하늘뜻을 나눌 기회를 주신 천안살림 식구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듣기로는, 청년주일이니까 '청년 목사'와 함께 하늘뜻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나이 서른이 조금 넘었으니까 사실 제가 '청년'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청년 목사'와 함께 하늘뜻을 나누면서 '청년주일'을 지키려고 하는 분들이 대강 저의 나이 위아래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설교를 듣는 사람'과 '설교를 하는 사람'이란 구분을 떠나서, 같은 길이의 세월을 살아 온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데에 끼어들어 같이 고민한다는 심정으로 오늘 함께 하늘뜻을 나눌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의 공생애가 흔히 몇 년 간이었다고 알고 계시나요?
또, 예수가 몇 살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알고 계시나요?
오늘의 본문은 잘 아시다시피,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내용입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예수의 나이와 공생애 기간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의 나이는 정확히 서른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이 속해 있는 누가복음서에 따른다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보다 여섯 달이 빠르게 태어났으니까, 예수와 거의 동갑내기라고 해도 될 겁니다. 즉, 이 이야기 속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오늘 '청년주일'을 같이 지키는 사람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는 겁니다.
크게 보면 로마의 패권에 지배당하고 있던 1세기 팔레스틴, 그리고 세부적으로 보면 사제 귀족과 지식인들의 권력에 지배당하던 1세기 팔레스틴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혁에 대한 꿈이 존재하게 마련이었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백성들이 '그리스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오직 물로 세례를 주는 자일 뿐이며, 더 능력있는 사람이 와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임을 미리 알리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변혁의 주역인 '그리스도'를 바라는 세상에서, 자신은 주역이 아닌 조역일 뿐임을 자처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진정한 주역인 예수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조역임을 자처했다고.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세례자 요한이 처음에는 자기가 세례를 받았으면 받았지 어떻게 세례를 주느냐고 황송해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의 본문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도 다른 이와 똑같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한 사람'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쯤 되면, 조역도 아니라 '엑스트라'라고 할 법도 합니다.
'청년'이 주제가 될 때 가장 많이 불려지는 찬송가가 있지요.
그 찬송가에 따르면, 청년이란 하늘같이 높푸르고, 바다같이 넓고 깊고, 화산같이 타오르고, 대지같이 광활하고 등등, 하여튼 넘칠 듯이 풍부하고 힘이 가득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복음들고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해야 할 존재입니다.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미래의 주역이라고 지칭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요. 실제로 '청년'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 정말 그렇습니까?
하늘같이 높푸르고 대지같이 광활하기는커녕,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복음들고 앞장서서 일하기는커녕, 자기 앞가림 어떻게 해야 하고 자기가 어떻게 먹고 사는가 외에 다른 일들에 신경쓰기 힘든 것이 어쩌면 더 현실에 가깝지 않나요? 그렇게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자기 먹고 살 것을 구할 수 있는 '자기 자리'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것이 현실적인 '청년'의 고민이고, 그 '자기 자리'를 잡아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가 그 다음 단계의 고민이 되는 것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특히나 저와 비슷한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이나요.
그것이 현실이라면, '미래의 주역'을 자처하기보다, 오히려 '조역'이나 '엑스트라'의 모습이 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방금 우리가 본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조역'과 '엑스트라'의 뒷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끝끝내 조역 노릇을 계속하다가, 통치자와 정면으로 충돌해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던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통치자의 또다른 소유지인 갈릴리에서,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 이제는 자신이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외칩니다. 그 때 그는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니라, 조역도 아니라, 이제는 자신이 당당한 주역을 자처합니다. 그래서 선배인 세례자 요한처럼, 그도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이렇게 끝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이유를, 오히려 저는 또다시 '조역'과 '엑스트라'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나 세례를 받으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데도, 끝내 '조역'의 자리를 자처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말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른이 되기까지 쌓아 온 자신의 삶의 결과로 만들어진 자신의 삶의 자리. 그 자리가 '조역의 자리'임을 세례자 요한은 자각하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추종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주는 세례는, 예수에게는 또다른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는 계기가 아니었을까요? 성서에서는 '광야에서의 유혹'이라고 되어 있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당한 후의 예수의 행보는, 그 '자신의 자리'에서 이제 아무도 의지할 이 없이 오직 자신만을 믿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래서 어떤 길을 갈 지를 새로이 결정해야 할, 예수의 고뇌의 시공간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 고뇌를 통과했기에, 예수는 이제 체포당해 죽은 자인 세례자 요한과 똑같은 메시지를 스스로 외치면서, 이제는 '주역'을 자처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의 길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길과 예수의 길은 둘 다 죽음으로 끝맺는 길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지더라도 개기는' 길이었습니다. 그 둘 모두, '자신의 자리'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길이었습니다.
언젠가 천안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천안(天安)이라는 이름을 이렇게 풀이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도저히 평안하게 다스릴 수가 없어서, 하늘의 힘으로나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하늘의 힘으로나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생길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자신의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가진, 그래서 그것 자체가 삶인 사람들. 그것 자체가 삶이므로, '지더라도 개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렇게 '지더라도 개기니까', '하늘의 힘으로나'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
'청년'이라고 한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제 막 '자신의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 자체가 삶이 되어, '지더라도 개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하늘의 힘으로나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들, 말 그대로 '天安' 사람이 되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이런생각을 합니다.
조금 더 나가본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天安'을 요구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변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다른 의미에서 '天安'을 요구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지더라도 개기는' 모습은, 어쩌면 '天安'조차도 넘어서는 모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굳이 '天安'을 요구해서 뭔가 다른 데 기댈 일이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지더라도 개기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삶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청년'이란, 바로 그렇게 '天安'을 넘어서기 시작하는 시간을 일컫는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청년' 중의 한 사람이었던 예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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