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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믿음이 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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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번 주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병원 정문에 들어서자 마자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차 있었고 각 병실에는 환자들로 가득차 있었고 그들에게 각기 붙여진 병명은 그들의 수 많큼이나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많은 병명등 수 없이 다양하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떤환자는 담당의사의 정확한 진단이 없어서 자기가 무슨병인지도 모르고 뮥체의 고통을 호소하고 누워있는 환자들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들 이었습니다. 이처럼 각 병실은 환자로 북새통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환자들 보다는 그 환자들을 위로하러 온 그들을 아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호하고 간호하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가까운 친지나 부모형제들이 더 많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있는 병원에 환자들보다는 각각 한사람 한사람 환자들에게 딸려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있는 것을 보면서 진작 아파누워있는 사람도 힘들겠지만 그곳에 기거하면서 환자와 같이 밤을 새우며 더러는 특별한 환자의 식사를 손수 준비하며 대 소변을 받아내는 보호자들도 더 없이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제 자식을 다 키우고 여생을 편히 보내야할 늙은 할머니도 있었고 학교에 나가서 공부해야할 나이에 몸이 불편해서 몇 년동안이나 오랫동안 병원에 있는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젊은 어머니도 있었고 부모님 대 소변 받아내야하는 일로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고있는 젊은 부부들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광경을 보면서 이런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아플수도 있고 병원에 입원할 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내 자신이 이렇게 건강해서 병원신세지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짐짐 되지 않는 것이새삼 행복하다고 느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험클어지고 생기없고 수심에 가득차 지쳐있는 보호자들의 모습 속에 한 사람의 병환으로 그 가정에 평화가 깨어지고 수심의 그늘이 가정식구 전원을 덮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
 저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일입니다. 온 집안식구 모두가 이 일로 제대로 자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간호하는 사람도 죽을 지경입니다. 이런일은 어느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일어날수가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중에도 혹 이런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둔 어머니가 나오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귀신들린 사람은 의학으로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환자는 고질적인 정신병환자로 따로 따로 격리해두고 언제 어떤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각 방마다 큰자물쇠통으로 잠궈놓습니다.
 이렇게 귀신 들린딸을 둔 이 여인은 결국 예수님의 도움으로 소원을 이루는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조건으로 이 일을 행하심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칭찬한 이 믿음을 통하여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예수를 찾는 믿음입니다(21-22).
 사람이 사람을 바로 찾아 가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자는 훌륭한 스승을 바로 찾아야 하고 병자는 훌륭한 의사를 찾아야 합니다. 엉터리를 찾아가면 문제만 복잡해지고 고생만 죽도록 하게 됩니다. 이 여인도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치려고 수 없이 많은 노력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말로 점쟁이들을 불러모아서 푸닥거리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자는 약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흔히들 여자가 남자보다 질기다,찔기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육체적,정신적 극한 상황에서 남자보다 더 오랬동안 견딜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여인 즉 이 딸의 어머니만 나오는 것을 보면 아버지는 이제 그만 지쳐서 예수님에게로 오지않았을 수고 있습니다. 아니 이딸 때문에 먼저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돈 지방은 유대인으로서 절대로 가지 않는 지역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모르는 무할례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유대인들이 사람들로도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 버려지고 정죄의 땅에 오신 것은 이곳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한 곳이며 복음을 온세계에 전하라는 명령의 모범이십니다. 어쩟든 이 여인 즉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자는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기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소문을 듣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자기 동네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 왔던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찾아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요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주인공을 바로 찾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2. 낙심치 않는 믿음입니다(23-25).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큰 기대를 갖고 찾아와서 딸의 문제를 간구하였으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했습니다. 이 때 그 여자는 낙심치 아니 하였습니다. 23절을 보면 제자들도 예수님께 와서 여자의 문제를 간청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런 간청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긴 동정이나 사랑의 발로가 아닙니다. 이 여인의 계속 외치는 소리가 듣기 귀챦았고 그리고 계속 따라오면서 외치는 이 여인은 지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귀챦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자들의 간청은 “저 여자가 소원하는 것을 들어 주소서 그래서 빨리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바라는 것은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그 여자를 보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때도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십니다. 즉 그 여자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격멸의 말에도 이 여자는 낙심치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절하며 도와줄 것을 또 간구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아니하였습니다. 이처럼 불굴의 신앙이 큰 믿음입니다.

3. 주인을 아는 믿음입니다(26-28).
 낙심을 모르는 가나안 여자에게 주님은 너무도 심하다고 할 정도의 말씀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반영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큰 뜻이 있다고 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도움만 간구하였습니다. 어떠한 신앙도 고백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22절을 보면 이 여자는 처음에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칭호는 일반인이 즐겨 사용하는 당시 정치적인 칭호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세상적인 권세와 영광이란 관점에서 그저 부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귄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 분의 은혜를 받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을 보면 이 여자는 마침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를 많았을 때 이 세상에 있는 말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신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 여인의 요구를 허락하시기 전에 그 여인이 깨닫기를 원하신 바로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위대한 인간에 대한 요구를 살아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비로소 그 여자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하여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족해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큰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삶속에 어떤것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그것이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질병입니까? 아니면 직장 또는 친구, 그러면 결혼 또는 삶의 의미를 모르고 계획없이 대는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문제의 참Key,열쇠는 무었입니까? 자기의 삶속에서 자기의 문제도 모르고 살아가는 청년은 혹시 없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문제를 알고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지쳐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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